0. 프롤로그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소설 속에 빙의한 것?
아니면, 소설 속 악녀에게 빙의한 것?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소설 속 남주들과 함께 마법이 걸린 외딴섬에 갇혀 버렸다는 거다.
그래, 인생은 본디 엿 같은 타이밍으로 이뤄져 있는 법이지.
* * *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발견한 건 고요하고 맑은 하늘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귓가에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습한 공기가 안면을 훅, 강타했다. 치솟는 불쾌지수를 억누르며 나는 찬찬히 주변을 살폈다.
발밑으로 파도가 밀려 나가는 게 보였다. 내가 쓰러져 있던 곳은 모래사장이었다.
“대체 여긴 어디지……?”
해변의 모래사장을 둘러싸고 야자수가 빼곡했다. 낯선 광경이다. 적어도 한국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차차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또 뭐야?”
내 옆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젖은 모래사장에 엎어져 있는 남자는 화려한 제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밤하늘을 닮은 아름다운 흑발을 갖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를 돌려 눕혀 얼굴을 확인한 순간,
삐이이이이-
머릿속에 일정한 강도의 이명이 울렸다.
“읏.”
아찔한 감각에 나는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고개를 숙였다.
‘마거릿 로즈 플로네’라는 여자의 일생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마치 내가 본래의 마거릿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억이 뒤섞였다.
나는 이질감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이명이 잦아들 즈음, 나는 깨달았다.
에녹 황태자, 란그리드 제국, 플로네 공작가. 마거릿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이름들이 낯설지 않다는 걸.
나는 지금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XX.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나는 길에서 주운 누군가의 습작용 소설을 읽으며 걷던 중에, 떨어진 간판에 머리를 맞고 죽었다.
비명횡사보다 더 어이없는 건, 죽고 난 뒤에 내가 읽고 있던 바로 그 소설 속에서 깨어났다는 점이다.
‘고수위’, ‘피폐’, ‘로맨스 판타지’인 <생존보다 중요한 것> 속의 악녀가 되어서.
소설은 대성녀인 여주와 제국의 황태자, 마탑주, 대주교 등 높은 신분을 가진 다섯 명의 남주가 어느 날 갑자기 무인도에서 깨어나며 시작된다.
작가는 그들이 마법에 걸린 무인도에서 일 년간 살아남는 과정을 조난 생존물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이 <생존보다 중요한 것>인데, 고수위 소설에서 생존보다 중요한 게 결국 뭐였겠는가.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겠다.
거기다 섬에는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물질 같은 악녀도 존재했는데, 악녀 마거릿. 그게 바로 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내가 빙의한 마거릿이 이 소설 중반부즈음 남주들에게 살해당한다는 거다.
그녀가 남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대성녀 유안나 루시를 시기했기 때문이다.
마거릿은 유안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다가 결국 절벽에서 그녀를 밀어 살해 시도까지 하고 만다.
섬에 갇힌 채 미쳐 가던 남주들은 그 사실을 알고 이성을 잃게 된다. 그러곤 유안나에게 위협이 되는 마거릿을 죽여 버린다.
그게 이 소설의 두 번째 키워드가 ‘피폐물’인 이유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내가 그 미친 섬에서 눈을 떴다는 거지.
바로 지금, 소설의 시작점에서.
* * *
“뭐 이런 X 같은 상황이…….”
나는 다시 내 옆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이젠 이 남자의 정체를 알겠다.
‘에녹 아스터 클라우스 란그리드.’
그는 란그리드 제국의 황태자, 에녹이었다.
그리고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의 메인 남주이기도 했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주들은 모두 마거릿을 싫어했는데, 그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 바로 이 에녹 황태자였다.
제기랄, 왜 하필이면 이 남자랑…….
“윽.”
그때 에녹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깨어날 기미를 보이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만약 이곳이 정말로 소설 속이고 내가 마거릿에게 빙의한 거라면, 나는 남주들을 피해 숨어야 했다. 그들이 날 곧 죽일 테니까.
1년 뒤에 섬 밖으로 탈출하는 ‘문’이 열리기 전까지 안전하게 숨을 곳이 필요했다.
나는 빠르게 내 차림새를 훑었다.
그나마 잠옷이 아닌 실내 드레스 차림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물론 마거릿의 평소 취향이 취향이니만큼 실내 드레스도 상당히 화려한 편이었지만, 더 치렁치렁한 외출복이 아닌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신고 있던 구두도 플랫 슈즈였다.
드레스를 한번 점검한 난 스무 걸음쯤 앞에 우거진 숲을 노려봤다.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는 건 물론 매우 위험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경멸하는 남주들 옆에서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고 벌벌 떨며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빠르게 결심을 마친 나는 발을 뗐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커다란 손이 내 발목을 붙잡지만 않았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 거다. 나는 발을 떼자마자 곧장 모래 바닥에 처박혔다.
“마거……릿?”
에녹이 내 발목을 잡고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X발, 내 계획은 초장에 엎어지고 말았다.
그래, 말하지 않았나. 인생은 본디 엿 같은 타이밍으로 이뤄져 있는 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