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3ab-1934]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문을 넘어 걸어오는 존재들에게 환히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차라도 한잔?”
존재들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로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에 남자는 난처한 기색으로 외관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작은 소녀였다.
소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태연하게 말했다.
“언짢으시다는 거, 충분히 인지하고 있답니다. 손님 여러분.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대화라는 걸 해보는 게 어떨까요?”
소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압도적인 힘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존재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소녀는 다시 외관을 바꾸어 이제는 늙은 노인이 되어 인자하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전부 우연이랍니다. 우연히 우수 세계선에 구멍이 뚫렸고, 아뿔싸……. 신력이 잠시 길을 잃고 흘러 들어가 버렸네요.”
노인은 다시 젊은 신사가 되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신이 세계를 위해 못 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인류에게 새로운 이능을 뿌렸으며, 그 가여운 영혼은 미처 틈새로 잘못 흘러 들어간 이능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을 뿐입니다.”
존재들은 그런 신사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어 한마디 뱉었다.
“내놓아라.”
그에 신사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걸 어쩌죠. 이미 영혼은 저희 세계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그 영혼에는 저희 세계의 책임도 생겼다 이 말씀입니다. 만약 여기서 그 영혼을 바로 건네드렸다가는 차원관리자에게 들켜버리고 말 겁니다.”
신사의 외관이 젊은 여성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여성은 태연하게 박수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참!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무려 우수 세계선에 구멍이 뚫린 바람에 영혼들이 대거 이탈하지 않았습니까? 지금처럼요.”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문제는, 그중 하나는 회수하지 못하였다고.”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지.”
존재의 물음에 여자는 대답했다.
“멸망 직전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방면으로 철저하게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한껏 여유로워진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걸 어쩌나. 영혼의 상실은 아주 큰 타격일 텐데. 특히 우수 세계선의 행성에서 말이죠. 할당된 영혼의 양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어쩜 좋아. 하나의 영혼이 사라져 버려 균형이 무너지고 하나씩, 하나씩.”
“…….”
“사라지다간 제 세계 꼴이 날 테지요.”
존재들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여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차원에 구멍을 냈다.
한번 구멍이 난 차원으로 무고한 영혼들이 흘러 들어갔고,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이 문제를 기회로 삼아 저들 좋을 대로 이용해 먹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저는 정말 성실하게 우수 세계선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성물을 만들어 손님들께 신호를 보냈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이 마음 붙일 화신까지 선물해주었구요.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구요.”
여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거래를 하나 하죠.”
“무엄하다.”
“소멸하기 일보 직전인데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어떻게. 영혼이 이대로 이 세계와 함께 소멸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여자의 말에 존재 중 하나가 또 다른 존재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만. 너무 뻔하군요.”
그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그럼요! 영혼을 공짜로는 드리지 못합니다. 일단 그 영혼은 제 세계에 있는걸요. 억지로 앗아갔다가는 말씀드렸다시피 차원관리자가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규율을 어긴 대가로 소멸시켜버리겠죠.”
존재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지금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제 조건은 이러합니다. 이미 저희 세계는 당신들의 세계와의 평행 관계에서 벗어났습니다.”
여자는 다시 남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손아귀 위에 누군가의 인영을 띄웠다.
“딱, 내 세계만. 당신들의 차원 구석에 숨겨주시죠. 그렇다면 강력한 영혼을 함께, 드리겠습니다. 이미 영혼 하나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잖아요? 모자라지 않습니까?”
남자의 말에 존재들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는 이미 대화의 흐름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존재들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이미 이 영혼은 본인의 영혼을 스스로 바쳤기 때문에 균형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존재들은 남자의 손 위에 올려져 있는 인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때 보았던 자로군.”
“어떻습니까.”
어차피 존재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우수 차원으로서 균형은 중요하니 말이다.
“겨우 몇천 년 더 유지하자고 발악을 하는군.”
“몇천 년 정도면, 양호한 편입니다. 당장 멸망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습니까.”
남자의 눈빛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리고 다시 장난스럽게 변했다.
“원플러스원 행사! 이번 기회가 아니면 잡지 못합니다. 여러분.”
***
최지혁은 갑자기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야, 왜 그래?”
유라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최지혁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야.”
왠지 속이 안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꼭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그런 기분 말이다.
최지혁은 유라 몰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이다. 아무도 없다.
“아빠, 오늘이랑 내일은 이모랑 삼촌이랑 노는 거야?”
“어. 당분간 아빠 찾지 마라.”
“알았어. 잘 가!”
최지혁은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잘 가라니. 옆에서 율이는 또 좋다고 제 언니를 따라 손을 흔들었다.
“아빠 뺘뺘.”
“야. 너무한 거 아니야? 가지 말라고 안 해, 최솔 최율?”
최지혁이 소박을 맞든가 말든가 유라는 리온과 에르켈에게 열심히 당부하고 있었다.
“애들 과자 사달란다고 사주지 말고! 강아지 고양이 절대 안 돼! 햄스터도 안 돼! 우리 집 애완동물 금지야!”
“마스터는 10년이 지나도 깐깐하냐.”
“리온. 집에 가고 싶어?”
“닥쳐라, 박쥐. 나는 주군의 명을 잘 따를 자신이 있다.”
최지혁은 그런 유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는 종종 유라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던 서번트들이 이렇게까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유라야. 가자.”
최지혁은 덥석 유라의 허리를 안고 차로 달려갔다.
꿀 같은 휴가를 조금이라도 더 즐겨야 했다.
“악! 최지혁, 아직 나 말 안 끝났어! 애들 아이스크림 작작 줘!”
“마스터, 빨리 좀 가라.”
유라는 여전히 씩씩대다가 그가 차에 태우자마자 조수석에 널브러졌다.
“최지혁.”
최지혁은 오랜만에 듣는 풀네임에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유라는 열 받을 때마다 그의 이름을 불렀으니 말이다.
“너는, 뭐가 문제야?”
최지혁은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의 죄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음, 쇼핑이나 갈까.”
“핸드폰 내놔.”
최지혁은 찍소리도 못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는 유라가 화내도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화내면 무섭다.
“도대체 어제 뭐야?”
최지혁은 유라를 보며 그냥 허허 웃었다.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들켜버렸다.
그는 일반인이 아니었다. 단순히 힘만 센 게 아니다 이 말이다.
“뭔데 명절날에 어디로 쑥 들어가서 허공에다 대고 뭔 대화를 한 거냐고. 나 다 봤어.”
최지혁은 열심히 시선을 피했다.
“야, 나 똑바로 안 봐?”
그리고 말을 돌리려 노력했다.
“유라야, 오늘 백화점 가기로 했,”
“백화점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너 똑바로 말해. 뭐 보이지.”
유라가 뒷목을 잡았다. 그리고 최지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들켜버렸다.
각성한 이후로 최지혁은 언데드들이나, 던전 안 귀신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지금까지도 적용되는지는 몰랐다.
가끔 유라네 집 제사나, 지인들 장례식장에 갈 때 뭐가 희끗희끗 보이는 게 아닌가.
보통은 그를 보자마자 후다닥 도망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벌써 유라네 가족행사에 참여한 지 10년도 넘었고, 유라네 제사 때마다 오는 유령인지 조상인지 모를 인간들도 처음에는 도망가다가, 이제는 그가 익숙해졌는지 3년 전쯤부터 자꾸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
결국 이게 다 어제 제사에서 간 큰 인간 중 하나가 그에게 로또 번호를 알려주겠다며 말을 건 게 화근이었다.
“최지혁. 대답 안 해?”
“……하하하, 유라야.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말 자꾸 돌려.”
최지혁은 결국 꼬리를 내리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처음부터?”
“내가 미쳐.”
유라는 결국 제 이마를 잡고 뒤로 뻗었다. 최지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유라에게 속삭였다.
“유라야. 이번에 고조선호텔에서 미슐랭 받은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럴 줄 알고 무당집 예약해놨어.”
“…….”
최지혁은 입을 꾹 닫았다. 음식으로 꼬시는 건 안 먹히는군.
3년 전까지는 먹혔는데.
유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최지혁의 양 뺨을 붙잡고 강조하듯 말했다.
“그런 게 보이면 진작 말을 해야지! 왜 그래?”
“나는…… 너 걱정할까 봐.”
“아니, 내가 내 남편 걱정 좀 하면 어때! 그럴 거면 나랑 결혼 왜 했니?”
큰일 났다. 최지혁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무당집은 개뿔, 그냥 이대로 들쳐 업고 휴양지나 가고 싶었다.
“너, 또 숨기는 거 있어, 없어.”
최지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숨기는 거? 많다.
“말해. 말 안 하면 이대로 각방이야.”
최지혁은 재빠르게 여태까지 숨겨온 비밀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각방은 절대 안 된다.
“그날 너 가고, 2년 동안 나 혼자 있었어.”
최지혁의 말에 유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지혁은 짐작했다. 한 대 맞겠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유라는 그의 턱을 제게로 끌어당겨 그대로 입 맞춰 주었다.
“이 밥팅아.”
최지혁은 활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
최지혁은 이제 혼자가 아니다.
“그걸 왜 숨겨.”
유라의 따뜻한 손길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행복하다. 지난 세월이 억울할 만큼 행복했다.
“유라야, 이제 다 말했으니까, 호텔.”
“정치인들도 가는 데야. 내비 찍었으니까 빨리 가자.”
최지혁은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서 한마디 더 했다가는 한 소리 듣겠지?
“표정 안 풀어?”
“응.”
“애교 부리지 마.”
“……내가 언제 애교를 부렸다고 그래.”
“자꾸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최지혁은 결국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시동을 걸 수밖에 없었다.
유라는 그를 잘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