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아무리 봐도 지혁지혁 병원 가봐야 한다. 인격이 달라졌잖아!”
“맞다. 주군.”
요즘 들어 리온과 에르켈이 이쪽 세상으로 자주 온다.
이유는 간단했다.
“야, 일 안 하냐?”
“지혁지혁은 농땡이 안 피우냐?”
저쪽 세계 일이 하기 싫을 때 마다 농땡이 피우러 오는 거다.
“지성준한테 연락한다.”
“마스터가 날 보고 싶다는데 어떡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와야지.”
에르켈이 소파에 누워서 한마디 보탰다.
“지성준 그 인간 너무 부려먹는다.”
그리고 나는 하하하 웃었다. 최지혁의 세계는 많이 변했다. 이제 평행세계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그럼 너희 이제 완전 슈퍼히어로네?”
“그런 거창한 이름 갖다 붙이지 마라. 오래 사는 고급 인력이다. 주군.”
리온과 에르켈은 변해버린 사회에서 잘 적응한 모양이었다.
준우와 회사 사람들이 잘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었고.
“슈우퍼히어로? 뭔 놈의 슈퍼히어로가 맨날 고소만 당하냐!”
최지혁은 골치 아프다는 듯 나를 끌어안은 채로 내 귀를 막았다.
“초인 규제법은 왜 만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마스터. 그러니까 내가 맨날 도피하지.”
또 초인 규제법이다. 아무래도 지금 저쪽 세상에서는 그게 가장 큰 이슈인 것 같았다.
뭐, 이미 각성자들도 많을 테고, 게이트 때문에 생태계 변화나 넘어온 몬스터들의 번식 문제도 있을 텐데.
리온과 에르켈이 바쁜 건 당연한 얘기다.
“그래도 우리 세계보다는 그쪽 세상이 살기 편하지 않아? 여기서는 신분도 없고, 뭘 자유롭게 하기가 불편하잖아.”
내 말에 에르켈이 말했다.
“주군. 우리가 왜 이 세계로 넘어와 있다고 생각하나?”
그에 최지혁이 대답했다.
“애 보러.”
“…….”
“빨리 클래스 나가. 공짜로 재워주는 거 아니라 했잖아.”
최지혁의 말에 리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서번트를 베이비시터로 쓰는 헌터가 어디 있냐!”
최지혁은 상큼하게 받아쳤다.
“지금은 꽃 보러 가는 공무원이니까 잔말 말고 숙박비 내. 30분 있다 수업인 거 알지.”
“최지혁, 인간이 되었군.”
에르켈이 조금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리온은 억울하다는 듯 방방 뛰며 대답했다.
“인간은 개뿔. 지혁지혁은 사탄이다!”
“나는 알다시피 천계에서 아기 천사들을 교육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가지 않아도 된다.”
“개소리야. 뭔 놈의 아기천사가 지옥 타르타노를 잡냐? 인간 아기는 그런 거 못 잡는다, 비둘기.”
“…….”
***
나는 크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앙! 엄마아아아아아아아! 아빠가! 아빠가!”
“……솔아. 그러니까, 이걸 하나 더 사주는 걸로 합의 보자.”
“흐헉, 꺽, 슈슈는, 슈슈 리리카 2세는 하나뿐이란 말이야! 산타 할아버지가, 산타 할아버지가 준 건데!”
환장하겠다. 언제 공장제 슈슈가 리리카 2세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옆에 있는 율이는 언니 울고 있는데 뭐가 좋다고 박수까지 치며 꺄르르 웃고 있었다.
“야. 최.”
“유라야, 내가 이걸 부수려고 부순 게 아니고. 목이 안 움직인다고 해서.”
“엄마, 슈슈 목이, 목이 뿌러졌어!”
나는 결국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솔이의 슈슈를 집어 들었다.
아주 아작을 내 놓으셨다. 와중에 슈슈 상태는 끔찍했다. 가위질로 머리카락 다 잘라 놓고 사인펜으로 얼굴에 죽죽 뭘 그어놨는데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만했다.
이렇게 만들어서 팔면 고객센터 난리 나지. 암암, 그렇고말고.
어우, 꿈에 나오겠다.
“최솔. 네가 슈슈 옷 다 찢어 놓고 머리카락 개판 만들어 놓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아니야! 슈슈 화장한 거야!”
어휴, 목청도 좋다. 나는 열심히 최지혁을 째려봤다. 애를 울리긴 왜 울려?
“내가 예쁘게 화장해줬어. 엄마도 해줄까?”
“응, 엄마 말고 아빠 해주자.”
“……유, 유라야?”
내 말에 최지혁이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립스틱을 하나 건네주었다.
다행이다. 새로운 재물을 찾으니 울지는 않네.
“아빠 예쁘게 꾸며줘.”
“응! 아빠 이쁜이 만들어 줄게! 아빠 공주 드레스 입자!”
“최솔. 싫어. 나 안 해!”
“아빠 무당벌레 핀 꽂아!”
솔이가 최지혁의 등을 타고 기어 올라갔고, 최지혁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율이를 안아 들고 최지혁을 마음껏 비웃었다.
“그러게, 내가 힘쓰지 말라고 했지.”
“아니, 인형 머리가 안 움직이는데 어떡해. 최솔, 무당벌레라며. 그건 샤랄라잖아.”
솔이는 뭔 놈의 리본핀을 한 주먹 들고 와서 최지혁의 머리카락에 정성스럽게도 꽂았다.
참 볼만했다.
“엄마, 아빠 예뻐졌다!”
“입술은 안 발라줘?”
“솔이가 예쁘게 해줄게!”
솔이가 내 립스틱을 가져다가 최지혁의 볼에 자비 없이 죽죽 그었다.
나는 푸하하 웃으며 말했다.
“조커다, 조커.”
“…….”
최지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뺩뱌!”
“율. 너도 내가 웃기냐.”
“뺘!”
최지혁은 허탈한 얼굴로 허허 웃었고, 이미 솔이는 슈슈가 운명하신 걸 잊은 모양이었다.
“아빠 공주님이다, 공주님!”
최지혁은 빠르게 내 뒤로 도망 오며 괴상한 얼굴로 말했다.
“유라야. 내가 잘못했어.”
“아빠! 근데 나 똥 마려!”
“……왜 똥 마려울 때만 나를 찾아.”
“똥!”
최지혁은 결국 조커 상태로 솔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쟤는 누구를 닮았나 몰라.
물론 엄마의 말이 스쳐 지나가긴 했다.
‘너 어릴 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솔이는 약과야, 약과.’
흠. 흠. 아무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주 잘 살고 있는 중이었다.
“유라야. 애들 부르자.”
“이 상태에서 리온이랑 에르켈 부르면 우리 집 난리 난다. 현대예술의 절정을 우리 집 벽지에서 볼 수 있어.”
“…….”
사실 솔이를 가질 때만 해도 최지혁은 회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나 보다.
최지혁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나도 안다.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아깝지.
내가 최지혁의 세상에 잠깐 갔을 때 그 인간 얼굴을 안 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살아는 있을까?
“율아. 아빠 웃기지?”
“먐먀.”
“응, 시끄럽고 밥이나 달라구?”
육아 난도가 살짝 심하게 높은 편이긴 하지만 괜찮았다.
자신 없는 것치고, 최지혁은 완벽했으니까. 아무래도 힘이 세서 그런 것 같다.
놀아주는 것도 하루종일 가능했고, 안아달라고 칭얼대도 번쩍 번쩍 잘만 안아주니까.
장난감 좀 부수는 것 빼고는 정말 완벽했다.
장난감을 좀 많이 부수기는 하지만……. 아, 물론 장난감 말고 다른 것도 잘 부순다.
저번에는 엄마 아빠랑 같이 간 가족 여행에서 펜션 문짝을 부숴서 한번 난리가 났다.
벌레 나와서 비명 좀 질렀다고 문짝까지 부수면서 달려올 건 뭐야.
그래서 다 들킨 상태다. 최지혁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기야, 오늘 애들 데리고 분수 보러 갈까?”
내 말에 최지혁이 세수라도 했는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야, 그런데 나 힘들어.”
그리고는 솔이를 등에 달랑달랑 단 채 내 쪽으로 흐느적거리며 쓰러졌다.
“아빠, 나 비행기 할래.”
“솔. 아빠 고장 나서 엄마한테 수리 맡겨야 해.”
“아빠 고장 났어?”
나는 결국 최지혁의 허리에서 뛰고 있는 솔이를 내 쪽으로 끌고 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아빠 허리에서 왜 뛰어?”
“재밌단 말이야.”
“너 아빠한테 자꾸 버릇없게 굴래?”
내가 한 소리를 하자 최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휴, 저걸 어쩜 좋아.
“유라야. 나 괜찮아.”
“당연히 괜찮으시겠죠. 트럭도 한 손으로 드시는 양반이. 이보세요, 애가 좀, 버릇없이 굴면 혼을 내.”
내 말에 최지혁이 헤벌레 웃으며 말했다.
“귀여운데 어떻게 혼내…….”
“얼씨구?”
“솔. 이리 와.”
“아빠아아아.”
환장하겠다. 아주 뽀뽀하고 난리가 났다.
“솔, 분수 보러 갈까?”
“나 구슬 아이스크림.”
“오늘 벌써 아이스크림 두 개 먹었잖아.”
“그건 구슬아이스크림이 아닌걸?”
“…….”
쟤는 어떻게 애랑 말하는데도 져? 최지혁은 또 ‘그런가?’라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내놓으며 열심히 쪽쪽거렸다.
진짜, 솔이 가졌을 때까지만 해도 무슨 불안증 걸린 사람처럼 굴더니 아주 고슴도치 뺨친다.
나는 결국 최지혁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최솔. 아빠 그만 꼬셔. 아이스크림 안 돼.”
“엄마는 맨날 안 된대.”
“뭔 맨날이야. 너 오늘 아이스크림 누가 사줬어.”
“엄마.”
내 말에 우리 똑똑한 최솔 양은 인상을 찌푸리며 깊게 고민하더니 거실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최지혁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할무니, 할아부지! 오늘 솔이 큰집 갈래요!”
“…….”
할 말이 없어졌다. 뻔했다. 엄마 꼬셔서 아이스크림 사달라 하겠지.
나는 진지하게 최지혁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최솔 쟤 천재인가 봐. 어떡하지.”
“……학교 알아볼까.”
“좀 알아봐봐.”
솔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온갖 애교를 부리며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넹넹, 자고 갈래요!”
그 말에 최지혁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내 허벅지에 뉜 머리를 번쩍 들고 내 허리를 꿈지럭대며 껴안았다.
그리고 바보인지 음흉한 건지 구분할 수 없는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유라야…….”
“그러고 싶어?”
내 물음에 최지혁이 내 볼에 제 뺨을 부비며 웅얼대듯 말했다.
“싫어?”
그에 나는 방긋 웃었다.
“내일 출근 안 하시려구?”
“때려치우지, 뭐.”
“애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백수 안 하시겠다며?”
내 말에 최지혁이 정곡을 찔렸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