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2화 (142/145)

최지혁의 성격이 이상해졌다.

아니, 실은 원래 성격이 이제야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경계가 완전히 풀렸다고 해야 하나?

“우응, 유라야.”

“왜에, 최지혁.”

“나 집에 안 가면 안 돼?”

세상 사나운 얼굴을 하고 애교 부리는 꼴을 보니 웃기지도 않다.

“가지 마, 까짓 거 가지 마!”

나는 최지혁을 마주 부둥켜안았다.

사실 최지혁이 내 세상에 온 뒤로, 어차피 돈도 많은 거 꿈에 그리던 집을 샀다.

그것도 서울에!

그리고 나도 몰래 살고 있던 원룸을 빼고 들어가서 살려고 했는데 보기 좋게 들켰다.

아니, 엄마는 귀신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았나 몰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최지혁이 내 집으로 놀러 오는 중이었는데 말이 놀러 온 거지 그냥 눌러 앉았다.

최지혁 집에 가보면 아주 찬바람이 휑하니 불고 냉장고에 음식도 없다.

당연했다. 그 넓은 집 놔두고 10평짜리 집에서 뭉개고 있으니.

이제 출근도 여기서 한다.

어이가 없다.

“진짜?”

“응, 완전 진짜로!”

최지혁이 그 커다란 몸을 내게로 밀어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는 내가 지한테 안겨도 모자랄 판에 왜 자꾸 내 품에 파고드는지는 모르겠다만 부피감이 좋아서 안기 딱 좋았다.

특히 겨울에는 더 좋다.

“최지혁. 그동안 이러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대?”

나는 최지혁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최지혁은 이곳에 오자마자 미친 듯이 공부를 시작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일주일 동안 밤을 새우는 건 좀 심해서 일부러 내가 기절시킨 경력도 있었다.

그리고 또 웃긴 게 공부한다며 꼭 내 옆에 와서 하더라.

내 앞에서 해야 집중이 잘된다나 뭐라나.

그런데 기분 좋아 보여서 그냥 놔뒀다.

내 얼굴만 봐도 좋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닳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잠깐은 참을 수 있어.”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최지혁은 그렇게까지 참지는 않았다. 예를 들자면 열 번 볼 거 아홉 번만 봤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최지혁 인내심에 이 정도면 초인적인 힘을 낸 게 맞긴 했다.

“유라야, 나 이제 취업했으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최지혁이 내 목에 제 입술을 박은 채로 웅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스타트업이라 나 빠지면 큰일 나.”

“나 이제 퇴근도 일찍 할 수 있는데.”

“응, 나는 야근이야.”

“…….”

최지혁은 아무튼 그렇게 빡세게 공부를 해서 행정고시에 붙었다. 어떻게 공부하나 잠깐 봤는데 그냥 달달달 외우더라.

던전 공략하듯이 말이다.

아니 그런데 상식적으로 군대 포함해서 3년 만에 행정고시 합격이 말이 돼?

“그리고 내 소원대로 놀면 큰일 나. 우리 엄마 잔소리 감당할 자신 있어?”

내 말에 최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니.”

죽어도 우리 엄마한테 미운털 박히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최지혁은 유별나도록 거기에 민감했으니까.

참고로 나는 공인중개사는 개뿔. 친한 선배가 하는 스타트업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영업팀으로.

정말 가볍게 채은이의 말을 듣고 연락 한 거였다.

그리고 멱살을 잡혔다. 잘 왔다며 바로 회사로 끌고가더라?

그래서 어차피 할짓도 없고 최지혁도 열공중이라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다시피 지금까지 못나오는 중이었다.

“5년 있다가 때려치울 거야.”

“……5년?”

“그때 되면 엄마가 잔소리 안 하지 않을까.”

“…….”

“그리고 결정적인 건 신입이 안 들어와……. 나 임원 될 것 같아…….”

최지혁의 표정이 아득해졌다.

“확, 그냥 책임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귀농이나 해버려?”

“……노력해 볼게.”

“무슨 노력?”

“때려치우……기?”

나는 최지혁의 등짝을 내려칠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봐. 그럴 거면 밤새우면서 공부 왜 했어?”

최지혁이 등을 움찔거리며 내 쪽으로 더 붙었다.

“네가 원하면 상관없어. 돈 없는 것도 아니잖아.”

맞다. 돈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돈을 쓸 수가 없다. 쓸 수가.

486억을 어떻게 써? 여차여차 잘 썼는데도 3년 동안 486억은 개뿔, 40억도 못 썼다. 심지어 35억은 집이다. 2억은 인테리어비고 나머지 2억은 차. 그리고 나머지는 최지혁이랑 열심히 놀러 다니면서 썼고.

차마 70억짜리 집은 간 떨려서 못 샀다.

그도 그럴 게 엄마 아빠도 최지혁이 받은 유산이라고 해봤자 40억 남짓인 줄 알고 있다.

486억이라고 실토했다간 무슨 재벌가의 숨겨진 아들 아니냐며 못마땅해할 게 뻔해서 말 못 했다.

“최지혁. 우리 외국 나가서 살까?”

“외국에는 김장김치 없는데.”

“……나도 한국이 좋아.”

나는 최지혁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최지혁이랑 사귄 지도 벌써 거의 4년이었다.

최지혁은 나이를 어디서 얻어왔는지 벌써 29살이고 나도 벌써 26살이다.

“유라야.”

“응.”

“난 네가 좋으면 다 좋아. 하고 싶은 거 해도 돼. 어머님 잔소리는 내가 들을게. 미운털 박혀도…… 괜찮아.”

참 쟤는 내가 하고 싶은 돈 많은 백수 하라는 소리를 저렇게 돌려 말한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벌써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어, 최지혁.”

“…….”

“거짓말할 거면 잘 좀 해봐.”

“춥다…….”

최지혁이 커다란 몸으로 나를 확 껴안아 제 품에 가뒀다. 말 돌리는 것 좀 봐.

내가 못마땅하게 보거나 말거나 최지혁은 내 뺨에 제 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헤벌레 웃었다.

정말, 그때 보상으로 최지혁을 안 데려왔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나는 똑같이 최지혁의 입술에 입을 맞춰주며 말했다.

“좋아?”

“응.”

다행이었다. 과거가 더 이상 최지혁의 발목을 잡지 않아서.

최지혁은 이제 사람을 향해 가시를 세우지 않았다.

아빠랑 방에서 몰래 대화하는 걸 엿들은 적이 있었다.

‘당당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행정고시 보겠다고? 그게 뭐 쉬운 일인 줄 알어?’

‘아니요. 그래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만족하실 수만 있다면……. 저도 압니다. 저 별로 마음에 안 차시는 거.’

당연히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소속된 집단 없이, 아무런 지위 없이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도 말리지 않았다.

비록 동기가 썩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지혁이 처음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이니까.

마음에 안 들면 최지혁 말대로 때려치우면 된다.

다행히 지금 직장이 마음에는 드는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도 많았다. 챙겨주는 어른들도 많았고.

“유라야.”

“응?”

최지혁이 나를 빼꼼 쳐다보며 물었다.

“……나 겨울 이불이 없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하긴, 없을 법도 했다.

집 매물 한참 보고 매매한 건 올 봄이긴 하니까.

심지어 가을부터는 못 참겠다며 아예 우리 집에 눌러앉았고.

최지혁 집에 봄여름 이불밖에 없을 게 뻔했다.

“하나 사.”

내가 시니컬하게 대답하자 최지혁이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최지혁. 왜.”

“……내 마음대로?”

나는 최지혁의 물음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잠깐.”

최지혁 마음대로 사게 놔뒀다가는 집 인테리어랑 안 맞게 새파란 꽃무늬 어린이 이불 같은 거 사올 게 뻔했다.

아무리 내가 최지혁을 좋아한다고 해도 최지혁의 안목까지 칭찬해 줄 수는 없었다.

“안 돼. 나랑 같이 사.”

“……왜?”

“같이 쓰는 거 너한테 맡겨서 내 속만 터지라고?”

내 말에 최지혁이 그제야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는 한참을 그렇게 웃으며 나를 안았다.

“뭐야.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

“……그래서 이게 결혼반지라고?”

“아니요. 프러포즈 링입니다.”

“여보, 이게 뭔데? 비싼 거야?”

아빠의 물음에 엄마가 내 손을 덥석 잡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너 연봉 다 털었니?”

“넵.”

최지혁은 뿌듯한 얼굴로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옆에서는 아빠가 박수를 치며 감탄하듯 말했다.

“허, 세상에. 국세청 뭐 하고 있나, 이놈 안 잡아가고.”

물론 나도 받고 어이가 없긴 했다.

최지혁은 2년을 일해서 번 돈을 통 크게 프러포즈 링에 꼬라박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게 결혼해 달라고 말했다.

당연히 나는 최지혁을 내 세상으로 데려올 때부터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 곰팅이가 원래 있는 돈이 아니라 제가 번 돈을 모으고 모아서 한 큐에 반지에다 쏟아부은 점이 참, 감동적이었다.

역시 내가 남자 보는 눈은 있다니까?

“나, 이거 칭찬해야 해?”

“이미 샀는데 뭘 어떡해. 환불도 안 될 거 아니야. 6천만 원짜리라며.”

아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최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최지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결혼반지는 따로 준비할 생각입니다.”

“허어, 환장하겠네. 6천만 원? 결혼반지 또 따로?”

“그렇다니까 그러네. 얘가 생전 돈 안 쓰더니 이상한 데서 통이 커.”

아빠랑 엄마는 최지혁이 말하는 결혼보다는 6천만 원짜리 프러포즈 링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엄마랑 아빠는 우리가 결혼할 걸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명절마다 최지혁을 끌고 가족행사에 다 참석시켰지.

물론 그만큼 연애도 오래 했고.

“아니, 진짜 쌔빠지게 일해서 반지에 다 꼬라박았다고?”

“어휴, 이 양반이 진짜. 말 좀 예쁘게 해. 애 앞에서 꼬라박았다가 뭐야? 꼬라박았다가.”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최지혁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괜찮아. 난 반지 대만족이야. 가보로 하자.”

“……응.”

최지혁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몰래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 불안한 듯이 꼼지락거렸다.

그러게, 어제 드라마는 왜 봐서 겁을 사서 먹어?

“괜찮아. 우리 엄마 아빠 돈 봉투 없어. 돈 안 뿌려. 꺼지라고 안 그래.”

“얘는, 쓰기도 아까운 돈을 왜 뿌려? 그래서 식은 언제 잡을 건데. 너네 빨리 해야 한다. 식장 잡기 어려워.”

엄마의 말에 최지혁의 얼굴이 금방 새빨개졌다.

“어휴, 얘 귀 봐라. 터지겠다, 얘.”

“여보. 나는 아직 장인어른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운명이야.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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