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45)

생각보다 내 일상은 아주아주 평화로웠다.

최지혁은 군대로 쏠랑 가버렸고, 나는 여태까지 미뤄뒀던 내 일상을 챙겼다.

“야, 확실히 남친이 잘생기니까 게임도 눈에 안 들어오나 보지?”

“앗……채은 미안……그 일은 그만 잊어주면 안 될까.”

“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너라서 손절 안 했지. 진짜 4년 동안 참은 내가 보살이다, 보살. 손잡고 센터 끌고 갈 뻔했다니까?”

“음, 그건 인정.”

채은이는 음료를 마시며 내 핸드폰 화면을 확대했다.

“근데 너도 웃긴다. 고딩 때는 파이브미닛 좋아한다고 남자애들 관심도 없더니. 아주 한 방이 겁나 커. 도대체 게임하다가 어떻게 만나는 거야?”

“그럴 만한 운명적인 사건이 있었지.”

“예예. 아주 소싯적 주접력 어디 안 갔고요. 잘 감상했구요.”

생각보다 내 주변 사람들은 최지혁에게 평가가 아주 후했다.

물론 아빠는 아직도 서운해하지만 뭐, 어쩔 거야. 평생 모쏠로 살라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요 근래 최지혁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는데,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최지혁의 예의는 저세상 간 게 아니라 그냥 그동안 예의를 안 차렸던 거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 동네에서 딱히 예의 차릴 만한 상황이 없긴 했다.

내 세계는 두말할 것 없이 평화로웠다. 최지혁의 쓸데없이 강한 힘이 아예 필요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 물론 포상휴가 나올 때는 아주 쓸모가 있었다.

저번에 최지혁이랑 친한 후임 얘기를 들어보니까 말뚝 박으라는 소리를 엄청 듣는 것 같던데 군생활을 잘하긴 잘하는 것 같았다.

잘할 수밖에 없었다. 최지혁은…… S급 헌터였는걸…….

그리고 생각보다 친해진 애들이 많아서 놀랐다. 거의 일방적 관계인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놀라운 건 놀라운 거였다.

연하한테 인기가 많나? 생각해보니 준우도 최지혁이 그렇게 틱틱대는데 졸졸 잘만 따라다녔다.

“야, 근데 너 졸업하고 뭐 할 거야?”

가만히 최지혁 생각을 하고 있는데 채은이가 허를 찔렀다.

나는 그냥 얌전히 음료만 쪽쪽 빨았다.

“나도 최지혁 따라서 공무원 시험이나 볼까. 걔는 돈도 많으면서 뭔 바람이 불었나 몰라.”

“너희 부모님이 못마땅해하신 거 아니야? 어른들 돈 많아도 백수 싫어하잖아.”

채은이의 말에 아차 싶었다. 맞다. 최지혁은 우리 엄마 아빠한테 약했다. 아니? 약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기는 수준이었다.

“아씨, 아빠가 또 뭐라 했나?”

“그럴 수도?”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감쌌다.

“아, 취업 어떡해? 나 학점 개망했잖아.”

진짜 심각하게 망해서 할 말도 없었다.

“……내가 할 말이 없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냥 최지혁이랑 결혼해 버릴까. 난 최지혁이랑 다르게 돈 많은 백수 완전 땡큐인데.”

“장난 똥때리냐. 너 스물다섯이세요.”

그건 맞다. 결혼하기에는 평균적으로 이르긴 하지.

“아, 내 인생 어쩌지.”

“뭘 어째. 다 똑같이 취준생 되는 거지.”

“날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까?”

나는 정말 근심걱정을 다해 채은이에게 물었고, 채은이는 정말 뭔 질문이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회사 싫으면 개업이라도 하든가. 너 요즘 땅에 관심 많잖아. 공인중개사라도 따.”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공인중개사!”

“……야, 그냥 말한 거야.”

나는 고마움의 의미로 채은이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나 잡았어. 오늘부터 공부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학점은 글렀어.”

“……그냥 한 말이라니까? 듣고 있니?”

“왜, 너랑 사주 보러 갔을 때 나더러 돈 많이 들어오는 팔자라고 했잖아?”

“그건 네 남친을 뜻하는 게 아닐까.”

“최지혁이랑 나는 별개지!”

“…….”

채은이는 한참을 짜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결국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지은 선배가 너 찾더라. 그 언니 사업 한다는데 관심 있으면 연락이나 한번 해보든가.”

***

최지혁은 바짝 언 채로 유라네 아버님을 쳐다보았다.

“허어, 그래서 하란다고 진짜 해?”

“네. 원래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라네 아버님은 최지혁을 삐딱하게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유라만 좋으면 내가 별수 있나 싶지만, 내가 그래도 너를 3년은 보지 않았나. 그렇지?”

“예.”

“이게, 아무리 유라가 좋다고 해도 사람이라는 게 살아가는 목표가 유라……가 되는 건 안 되지 않나?”

“……죄송합니다.”

“거기서 죄송합니다가 왜 튀어나와? 유라랑 사귀는 게 나한테 죄송할 일인가?”

“네? 아, 그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가 당황하자 유라네 아버님이 웃기다는 듯 한마디를 툭 던지셨다.

“왜. 내가 싫다 하면 헤어지게?”

“아니요.”

“어쭈? 정색하는 거 봐라? 이럴 때만 대답이 빨라져.”

“고치겠습니다.”

유라네 부모님은 좋으신 분들이었다. 유라랑 똑같았다.

“인마, 유라가 시키는 것만 하지 말고, 네가 원하는 걸 해. 돈도 많다며.”

“그. 반은 거의 다 유라 돈이라…….”

“뭐?”

아차 싶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최지혁은 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유라가 투자에 일가견이 있어서 어쩌다 보니…….”

“하! 참나, 이놈의 지지배 누구 닮아서 겁이 없어? 그게 뭔 소리야, 대체?”

“아, 유라가 막 생각 없이 투자한 건 아니고, 그러니까요, 제가 돈이 조금 있었는데 유라가…….”

“뭘 또 횡설수설 변호를 하고 앉아있어?”

“죄송합니다.”

또 등신같이 굴었다. 최지혁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다시 점수를 딸 기회를 노렸다.

사람을 대하는 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특히 유라네 가족들은 더더욱. 잘 보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유라가 그렇게 좋아?”

아버님의 말에 최지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예……. 죄송합니다.”

“아니, 뭐가 죄송하냐고. 좋으면 좋은 거지. 내가 말했잖아. 나는 신경 안 쓴다니까? 네 인품 좋고 유라만 좋으면 다른 게 뭐가 필요 있어?”

“…….”

유라네 아버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뭔 생각 하는지는 알아. 물론 살다 보면 가정환경, 배경, 현실적으로 아주 중요하지.”

“…….”

“그래도 그거 가지고 기죽을 필요 없어. 너만 당당하면 되는 거야, 너만. 가족은 만들면 되는 거고, 부족한 건 채워 나가면 돼.”

유라네 부모님은 유라와 정말 똑같았다.

“공무원이 정말 하고 싶어?”

최지혁은 가만히 앞에 놓인 커피를 보며 생각했다.

하고 싶은 거?

생각해 본 적 없다.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다.

“네.”

“뭐, 또 유라가 좋아하면 된다, 이런 대답 할 거면 그만두고.”

최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공무원 하고 싶다. 단순히 유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 어차피 유라가 취직하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었다.

그 스스로 강해지는 것 외에 다른 일을 골라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 이 정도면 하고 싶은 일이 맞다.

“아니요. 저번에 말씀드린 거하고 똑같습니다. 갖고 싶습니다. 적당한 지위.”

“얼씨구, 이러다 유라 기 살린다고 국회까지 가겠어.”

“원하면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유라가 생각보다 관심 받는 건 안 좋아해서…….”

“인마, 정신 차려!”

최지혁은 가만히 유라네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말씀과는 다르게 웃고 계셨다.

“하긴 내 딸이 정신 못 차릴 만큼 예쁘긴 하지? 애가 누굴 닮았는지 참 예뻐.”

최지혁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이랑 똑같이 생겼습니다.”

“야, 그럴 때는 나 닮았다고 해야 하는 거야. 이래 가지고 사회생활 하겠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입이 귀에 걸리셨다. 최지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 닮았습니다. 유라.”

“엎드려 절 받냐?”

“아닙니다.”

“이놈 자식이, 유머가 없어, 유머가. 허허 웃지 마, 짜샤.”

“넵.”

***

최지혁은 요즘 들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라네 부모님은 최지혁을 좋아해 주셨다.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씨, 작가 누구야. 주인공을 죽이긴 왜 죽여!”

“……유라야. 울지 마.”

유라는 평소와 똑같이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고 울었고, 최지혁은 열심히 유라의 얼굴을 감상 중이었다.

3년이나 지났는데 꿈같았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너 괜히 직장에서 힘쓰다가 국정원 같은 데 끌려가지 마. 내가 너 힘쓸 때마다 막 심장이 벌렁거려. 알아?”

“나 힘 안 쓰는데.”

“안 쓰긴 뭘 안 써. 저번에 캠핑 갔다가 진흙에 바퀴 빠진 거 어떻게 해보겠다고 힘쓰다가 엄마 아빠한테 들킬 뻔했잖아.”

최지혁은 유라의 맞는 말에 잠시 시선을 피했다.

“나 봐.”

“음, 그건…….”

“그리고 설날에 무슨 선물 박스를 혼자 다섯 개를 들어? 힘세다, 하고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보면 완전 이상하거든?”

최지혁은 입술을 쭉 내밀고 유라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아버님이랑 나눠 들 수는 없잖아.”

“왜 못 나눠 들어?”

“…….”

최지혁은 유라의 허리를 껴안고 그대로 유라에게 제 턱을 부볐다.

“야, 불리할 때마다 애교 부리지 말라 그랬지.”

“……유라야. 나 졸려.”

“졸리긴 뭘 졸려. 여태까지 자다 나오셨거든?”

“둘만 있고 싶다.”

“얼씨구. 수작 부릴래?”

그리고 유라를 그냥 더 세게 껴안아 버렸다.

잔소리 들어도 좋았다.

“힘 안 쓸게.”

“쓰지 마. 알았지? 절대 안 돼.”

“둘만 있을 때는?”

“너 자꾸 그런 거 물어볼래?”

“응, 알았어. 안 물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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