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45)

처음에는 엄마 아빠를 만나면 굉장히 반갑고 감정이 사무쳐 올라올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최지혁 옷 사야 하는데 망했네.’

최지혁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 차 앞에서 안절부절 난리가 났다.

운전을 자기가 해야 하는지 아니면 닥치고 뒤에 타야 하는지 고민 중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최지혁의 뒷덜미를 잡고 뒷좌석에 넣었다.

최지혁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니?”

엄마의 말에 최지혁이 정자세로 빳빳하게 앉아서 대답했다.

“최지혁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

“유라랑 세 살 차이네?”

“넵.”

큰일 났다. 애가 긴장해서 덜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엄마의 질문을 가로채서 대신 답해줬다. 뭐, 엄마가 궁금해할 건 뻔하지.

“최지혁하고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최근에 접촉사고 날 뻔했는데 최지혁이 구해줘서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 됐지?”

그에 차를 빼던 아빠가 브레이크를 꽉 밟았다.

그리고 엄마가 폭발했다.

“이놈의 지지배가, 됐지? 되긴 뭐가 돼! 그런 일이 있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아, 엄마!”

“뭔 사고. 똑바로 말해, 너 거짓말 치기만 해봐. 용돈 다 끊어버릴 거야.”

“그래, 여보. 쟤 용돈 끊어버려. 너 계속 게임에 현질한다고 학점 개판 난 거 내가 다 봤어.”

망했다. 나는 그냥 내 얼굴을 가려버렸다.

민망하다……. 몹시 민망하다. 내 치부를 다 들켜버린 모양이다.

내 학점…… 정말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죄송합니다.”

“왜 네가 사과를 하니?”

와중에 최지혁은 또 덜덜 떨면서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

“채유라. 너 대답 똑바로 안 해?”

결국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교통사고 날 뻔했고, 엄마 아빠 걱정할까 봐 말 안 했,”

그리고 결국 나는 귀를 잡히고 말았다.

“얘가, 미쳤구나?”

“악, 엄마, 아파! 아파!”

***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당당했다.

다행히 내 폭탄 발언 덕에 최지혁을 향한 엄마랑 아빠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래서 유라랑 사귄 지 좀 됐다고?”

“……네.”

최지혁은 열심히 고기를 구우며 묻는 말에 답했다. 환장하겠다.

“직장은. 있나?”

“……없습니다.”

“뭐, 아직 학생인가 보지?”

“……아닙니다.”

아빠는 무슨 취조하러 나온 사람처럼 최지혁에게 꼬치꼬치 캐물었고, 나는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만하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그래 봤자 나중에 물어볼 것 같은데.

게다가 계속 입막음 해봤자 언젠가는 알게 될 얘기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부모님은 뭐 하시나?”

“그게……. 돌아가셔서……, 안 계십니다.”

“아.”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아빠, 그만 물어보고 밥 먹자. 우리 오늘 한 끼도 안 먹어서 배고파.”

“하하하하! 그래! 자네 술은 하나?”

“안 하는데 마실 줄은 압니다.”

최지혁의 말에 아빠가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오, 술담배 안 해?”

“……옙.”

“그건 합격.”

최지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래, 나도 그건 합격이다.”

옆에서 엄마까지 한술 거들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최지혁의 자세가 스르륵 풀렸다.

긴장이 아주 쪼금 풀린 모양이다.

“채유라, 방에서 게임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어쩌다 이런 미남을 만났어? 연예인이네, 연예인.”

“그래! 그 너 학생 때 좋아하던 원숭이 자식들보다 훨씬 잘생겼네.”

최지혁의 얼굴이 금세 시뻘게졌다. 그리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최지혁에게 속삭였다.

“맞지? 나 눈 높다니까?”

“……유라야. 먹어. 다 익었어.”

최지혁이 내 밥 위에 고기를 올려놓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빠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리고 아빠, 파이브미닛 원숭이 아니거든? 잘생겼거든?”

“얼씨구. 이제 한물갔지. 걔들 다 30대 아니야?”

“아빠!”

“어휴, 뭔 놈의 사내놈들 웃통 까고 있는 포스터를 방에 다닥다닥 붙여놓고 다니더니, 골라도 똑같은 놈만 골라 오냐.”

환장하겠다. 최지혁은 여전히 입 닫고 고기만 구웠다. 물론 얼굴은 아직도 시뻘겋다.

“비리비리한 애들보다는 훨씬 낫지, 뭐.”

옆에 있던 엄마가 새침하게 말했다.

“네가 좋다고 하는 애들 중에서 얼굴은 제일 낫네.”

“그거는, 나도 인정.”

최지혁은 연신 지속되는 외모 칭찬에 바르르 떨며 ‘감사합니다’만 중얼거렸다.

“일단 오늘은 밥만 먹고, 피곤해 보이니까 갈라지자.”

아빠가 엄마의 접시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최지혁이 너무 긴장한 걸 보니 안쓰러웠나 보다.

“너, 내가 지켜본다. 밥 다 먹고 유라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네 집 가. 알았어?”

“……넵.”

아무리 아빠가 그렇게 말해도 어쩔 수 없다. 최지혁은 집이 아직 없거든.

“채유라 네가 제일 문제야. 보니까 네 남자친구 꼬셔서 홀랑홀랑 해먹지?”

“……아, 하하하하하! 엄마, 무슨 소리야. 내가 최지혁을 꼬시긴 뭘 꼬셔. 최지혁, 내가 너 해먹었어?”

내 물음에 최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머님. 유라 그런 애 아닙니다.”

최지혁의 대답에 아빠가 뿌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얼씨구. 짜식, 남친이라고 유라 편드는 거냐? 너 그 태도 아주 좋아.”

아무튼 나는 무사히 고기를 해치웠고 최지혁은 아무리 봐도 얹힌 것 같았다. 다 끝나고 옷 사러 가자니까 얼굴이 창백해져서 지하주차장에서 스르륵 주저앉았다.

“최지혁. 괜찮아?”

내 물음에 최지혁이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옷 사러 갈 수 있겠어?”

“……인터넷으로 시킬까?”

“안 돼. 인터넷으로 시켰다가 어깨 안 맞으면 어떡해.”

“아.”

사실 나도 좀 힘들긴 했다. 오늘 하루 너무 정신없어서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럼 일단 잠옷하고 속옷만 사오자.”

“응.”

최지혁이 나를 덥석 껴안았다. 그리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유라야. 나…… 나가서 자야 하는 거지?”

최지혁의 표정이 매우 애처로워 보였다. 환장하겠네.

나는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오늘은 호캉스다. 최지혁. 카드 꺼내.”

“……어?”

“하, 돈 썩혀서 뭐 해. 플렉스해! 다 써버려!”

완벽한 계획이었다.

“집도 알아보고 차도 사!”

“……유라야. 그렇게 막 써도 되는 거 맞아……?”

“이미 통장에 들어왔는데 못 쓸 건 뭐야?”

***

최지혁은 유라를 품에 안고 죽은 듯이 잤다.

사실 새벽까지 눈을 감지 못했다.

눈 감으면 모든 게 사라질까 봐. 그래서 유라네 부모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유라를 기어코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망했구나 싶었다. 들키는 순간 죽음이었다.

미운털은 죽어도 박히기 싫었는데 이미 박힌 것 같았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학력도 없고, 직업도 없고. 그래서 최지혁은 고민에 고민을 했다.

하고 싶은 건 딱히 없었다. 유라만 있으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최지혁도 알았다. 지금은 유라가 그를 좋아해준다고 해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남으면 금방 질려버릴지도 몰랐다.

유라가 만족할 만한, 주변에 말하고 다녀도 절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면 직업이 필요했다.

최지혁은 유라를 품에 안은 채로 지성준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공무원밖에 없었다.

유라네 부모님이 적당히 좋아하실 것 같고, 퇴근도 정확하고, 명분도 서고.

학력도 필요 없고.

공부는……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죽어라 노력하면 된다. 빌어먹을 세계에서도 꾸역꾸역 살아남았는데 그까짓 공부, 하면 된다.

공부한다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것도 아닌데. 할 수 있다.

그렇게 새벽 내내 그 생각만 하다가 결국 중간에 깬 유라에게 야단을 맞고 최지혁은 드디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죽은 듯이 잤다.

지난 2년간 못 잔 잠을 한꺼번에 몰아서 자는 것처럼 그렇게 잤다.

꿈도 안 꿨다.

그리고 눈을 뜨니 그의 품에서 잠든 유라가 보였다.

아직도 꿈같았다.

왜 유라는 그를 좋아하는 걸까?

왜 허락한 걸까? 왜 그를 이 세상으로 부른 걸까?

여전히 의문이 남았지만 최지혁은 유라의 당당한 답을 믿기로 했다.

유라가 좋다면 좋은 거다. 이유를 궁금해할 필요 없다.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집중하자.

“유라야……. 나 너무 좋아.”

최지혁은 유라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행복해.”

또 울고 싶어졌다. 멋없는 거 알면서도, 울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응, 최지혁. 몇 시야…….”

“오후 세 시.”

“……음, 네 시에 나가자. 나 피곤해.”

“응.”

유라가 있었다. 신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유라가 그의 옆에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꼭, 유라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최지혁은 느릿하게 핸드폰을 들었다.

빌어먹을 군대 가기 전에 교재나 사 놔야겠다.

몬스터들 패턴 외우듯이 다 외워버리면 되겠지, 뭐.

“일어나야 하는데 못 일어나겠어. 아직도 피곤해…….”

“유라야. 여섯 시에 맛있는 중국집 예약해놨어.”

“……어제 얘기한 거기?”

“응.”

유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뺨에 여러 번 입 맞춰 주었다.

뇌가 녹을 것 같았다.

“아, 진짜 너무 좋아!”

“……나도.”

“최지혁. 군대 가지 마. 어떻게 보내.”

유라가 그의 품에 뺨을 비비며 칭얼댔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의무라잖아. 시키는 대로 해야지. 휴가 많이 따올게.”

“2년 어떻게 기다려……. 최지혁. 거기다 집 살까? 군부대 앞에 그냥 살아 버려? 매일 보게?”

최지혁은 그냥 하하하 웃었다. 유라의 말대로 더럽게 가기 싫었다.

하지만 안 갔다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해?

그건 죽어도 싫었다.

“나 없는 동안 나 때문에 못 한 학교생활 해야지.”

사실 그 얘기만 나오면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유라의 일상을 망쳐버린 건 또, 그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죽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미안하지만 가능한 한 껌딱지처럼 유라 옆에서 오래오래 살 거다.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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