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 따위는 금방 잊었을 거다. 벌써 2년이니까.
그러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 혼자 바보처럼 이러고 있는 거지.
“지혁지혁, 전화 왔다. 멍 좀 그만 때려라.”
최지혁은 미간을 매만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또, 지성준이었다.
- “야, 강준우 취임식 나도 가니까 전에 밥이나 먹자.”
“……뭔데.”
- “그 근처에 돈까스집 있는데 예서가 먹고 싶대.”
“예서는 왜 데려가는데.”
- “강준우 팬이잖아. 요즘 초딩들 사이에서 장난 아니야, 걔.”
“…….”
최지혁은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아서 해.”
- “야, 차는 내가 끌고 간다. 그런데 너네 집 군식구들도 간다냐?”
“그렇겠지.”
-“하, 씨. 큰 차 끌고 가야겠네. 아무튼 기다리고 있어.”
***
지성준은 끈질기게 최지혁과 함께 밥을 먹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업무상으로 많이 부딪히니까.
게다가 명분상 최지혁은 멸망을 막은 장본인 중 한 명이고.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지구는 문명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멸망의 원인과 멸망이 멈춘 원인쯤은 알아낼 수 있었다.
태양계가 통째로 이동을 했단다.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세상에 초능력자들도 날아다니고 유니콘도 날아다니는데 뭔들 안 일어날까.
“계산은 네가 해라.”
“넌 안 하냐.”
“난 너랑 밥 계속 먹어주잖아. 네가 내야지, 당.연.히.”
지성준이 의기양양하게 예서를 번쩍 들고 강준우가 있을 건물을 향해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어 뒤에 있던 리온이 장난스럽게 최지혁을 향해 물었다.
“내 몫도 지혁지혁이 긁는 거 알지?”
“……니들이 언제부터 그런 걸 물어봤는데.”
“혹시나 해서.”
최지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성준을 뒤따라갔다.
취임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는데, 다 아는 얼굴이지만 관심 없는 이들이었다.
“형! 여기요, 여기!”
최지혁은 그를 향해 방방 뛰며 달려오는 강준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유라랑 하는 짓이 묘하게 비슷했다.
“아니 준우준우 너는 취임식이라며 왜 여기 나와 있냐?”
리온이 어이없다는 듯 강준우를 향해 물었고, 강준우는 그런 리온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최지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형, 며칠 못 봤다고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똑같을 텐데.”
“씁. 볼 때마다 더 창백해지는 것 같은데. 저희 병원으로 진료 받으러 오라니까요?”
강준우의 말에 옆에 있던 지성준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상사병을 네가 뭔 수로 고쳐?”
“……형. 말 좀 가려서…….”
강준우는 당연히 당황한 표정으로 지성준을 쳐다보았지만, 최지혁은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아, 맞다. 회사 사람들 와 있어요. 도경 아저씨가 형 보면 끌고 오래요. 왜 김치 얻으러 안 오냐고……. 아, 저기 벌써 오시네.”
“오오, 최지혁이~. 웬일로 사회로 나오셨당가.”
최지혁은 자리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유라 방 침대에 누워 눈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밖은 너무 피곤하다.
“취임식 시작까지 20분 남은 걸로 아는데. 준비 안 하세요?”
“아, 변호사님. 오랜만이에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최지혁은 대충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회사 사람들은 늘 마주하기 힘들었다.
하긴, 뭔들 안 힘들겠어. 아직도 온 세상이 유라로 가득한데.
지금도 저 사람들 틈에 유라가 섞여 있을 것만 같다.
“…….”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권이영 변호사가 갑자기 인상을 팍 찌푸리며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유라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라 최지혁은 최소한의 예는 갖추는 편이었으니 당연히 갑자기 저리 매섭게 쳐다보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봐요. 최지혁 씨.”
“……왜, 부르시죠.”
“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계속 그런 얼굴로 다니면 나중에 유라 양이 보고 놀라요.”
최지혁은 조금 놀란 눈으로 권이영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최지혁 앞에서 유라의 이름은 거의 꺼내지 않는 분위기였으니까.
그게 나름 사람들의 배려이고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어어, 형, 이게 무슨.”
사람들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최지혁은 멍해진 얼굴로 제 손을 쳐다보았다.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소란스러운 클랙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뭐지? 설마 정신계 빌런이라도 나타난 건가……?’
하지만 방금까지 한 말도 안 되는 가정이 깔끔하게 날아갔다.
왜냐면, 그의 눈앞에 겁먹은 유라가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그쪽 뒤 봐주려고 핸드폰 보다가 차에 치여서 죽을 뻔했는데 우연히 절묘한 타이밍에 그쪽이 있는 곳으로 소환, 뭐 그런 게 됐다?”
그리고 하필이면, 유라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이 생각나 버려서.
최지혁은 무작정 유라를 껴안았다.
그리고 유라를 향해 돌진하는 트럭을 무심코 들어버렸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뭐지? 최지혁은 빠르게 유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유라의 눈가와 코끝은 방금까지 펑펑 운 사람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아……. 이게 뭐야.”
유라의 목소리였다. 분명했다.
유라는 잠깐 그를 꽉 껴안으려다가 꼭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품 안에 그의 얼굴을 가뒀다.
“헉, CCTV! 최지혁, 그걸 들어버리면 어떡해! 도망가!”
일단 그 또한 경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꿈속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유라의 말대로 도망가려 했다.
아, 그 전에 할 게 좀 있었다.
“유라야. 블랙박스 좀.”
“……응?”
최지혁은 유라를 안아 든 채로 굳게 닫혀 있는 트럭의 문짝을 잡아 뜯듯 억지로 열어버렸다.
“운전 똑바로 해, 개새끼야. 죽을 뻔했잖아.”
그리고 팔을 쭉 뻗어 달려 있는 블랙박스를 아작내 버렸다.
당황한 트럭 기사의 얼굴이 보였고, 아직까지 횡단보도의 불은 파란색이었다.
사실 더 응징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유라가 무척 급해 보였기 때문에.
꿈일까? 아닐 텐데.
최지혁은 환각 아이템에도, 약에도 손을 댄 적이 없다.
말 그대로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데 환각 증세가 일어날 리 없다.
그냥 정신병인가?
그래도 주기적으로 강준우가 소개해준 의사와 억지로 상담하는 중이었는데.
이러는 걸 유라가 알면 실망할 거다.
유라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서도.
“최지혁. 빨리, 저 버스 타.”
최지혁은 유라가 이끄는 대로 종이 인형처럼 따라갔다.
“아저씨, 두 명이요.”
한참 동안 똑바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제정신을 차린 순간은, 유라의 아기자기한 자취방에서 현실에서는 이미 희미해져 버린 유라의 체취를 느꼈을 때.
그리고 유라가 그의 입술에 몇 번이고 입 맞춰줬을 때.
“이제 너랑 나랑 쌤쌤이지? 너도 동의 없이 나 끌고 왔으니까 나도 동의 없이 데리고 와 버리기?”
“……유라야?”
“진짜 괜히 울고불고 쌩쑈했네. 하지만 이 정도면 개고생한 가치가 있다!”
유라의 입술이 연신 그의 볼에 닿았다.
“최지혁? 왜 말이 없지? 괜찮아……? 설마 신분 때문에 걱정돼? 에이. 그거야, 내가 열심히 돈 벌어볼게. 그리고 내가 신분 얻었던 거랑 똑같이……. 어라. 근데 이게 뭐지.”
유라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서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유라가 집어 든 서류는 다름 아닌 그의 신변에 대한 여러 가지 문서들이었다.
“……486억……후계자……숨겨진……엥. 진짜 이게 다 뭐지.”
유라는 당황한 듯 서류들을 침대 위에 흩뿌려 놓았고, 여전히 멍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최지혁. 인벤토리 좀 열어봐.”
그는 유라가 시킨 대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멀쩡했다. 통신 아이템도 그대로 담겨 있었고, 그가 쟁여놓은 생활 물품도 다 있었다.
“아, 인벤토리는 없나 보네.”
최지혁은 눈만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있는데, 안 보이는 건가?
“그런데 진짜 이 서류들 뭐지? 꼭 신분이 다 마련되어 있는 것…… 같……. 세상에. 말도 안 돼. 설마 보상이 이 뜻이었어?”
최지혁은 유라가 들고 있는 서류를 살펴보았다. 유산으로 거액을 넘겨받았다는 사실 빼고는 그의 개인정보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호적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의 이름이 똑같이 적혀있었고, 전부 사망처리가 되어 있었으며 통장 잔고는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금액과 동일했다.
“아, 어떡해. 인터넷 뱅킹 열어봐, 최지혁.”
어이가 없었다. 핸드폰도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유라가 시키는 대로 유라 계좌에 돈도 이체가 됐다.
유라는 그제야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서 그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최지혁,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나 너 평생 못 보는 줄 알았잖아. 진짜 바보 같아.”
최지혁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실감이 안 나서. 꿈 같아서.
“그런데 얼굴이 왜 이래? 어디 아파?”
유라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걱정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리고 그제야 최지혁은 입을 열 수 있었다.
“유라야, 유라야.”
“응, 최지혁. 울지 마. 왜 너까지 울어. 응?”
“유라야.”
유라를 꽉 껴안았다. 진짜다. 전에 안았던 유라랑 똑같은 냄새, 그리고 똑같은 온도였다.
유라가 눈앞에 살아있었다.
“아, 맞다. 깜빡했어. 최지혁, 나도 사랑해. 알았지?”
“…….”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아니, 죽기 싫었다. 평생 이렇게 살고 싶었다. 절대 죽기 싫었다.
유라가 눈앞에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거 뭐지?”
유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느 문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감격의 재회는 금방 끝날 수밖에 없었다.
최지혁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그리고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문자 한 통이 왔는데, 내용이 아주 기가 막혔다.
[귀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십시오 :)]
최지혁은 잠깐 아득해진 표정으로 유라를 쳐다보았다.
“아, 군대를 두 번…….”
유라는 경악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사실 상관없었다. 뭐, 이까짓 게 유라를 만나기 위한 대가라면 정말 싼 편이었다.
최지혁은 유라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까짓 거 백 번도 갈 수 있어.”
그리고 익숙한 유라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구레나룻이 그대로 쭉 당겨졌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다.
“가긴 어딜 가, 이 밥팅아! 싫어!”
- 남주가 내 후원을 좋아해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