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45)

***

“인간들이 아이템, 마법, 뭐 이딴 거에 익숙해지다 보니까 물리적인 걸 까먹었더라고. 얼굴을 완전히 갈아엎었는데 아무도 모르더라?”

최지혁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유라가 그동안 그에게 그토록 당부했던 모든 것들이 흐릿해져가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놈은 열심히 그의 앞에서 잘난 척을 하고 있었다.

이걸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와, 일이 어떻게 이렇게 허술하게 돌아가냐. 네가 S급이라고 의기양양한 모양인데, 내 인생 망친 책임은 지셔야지. S급이면 다야?”

죽일까? 그래. 지금, 유라가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뭐가 중요할까.

“당연히 네가 사라진 1년 동안 헌터들을 무력화시킬 능력을 개발했지. 왜냐면 헌터들이 너무 나대면 여러모로 통제하기가 힘들거든. 너네도 너무 안일했어. 그렇지?”

이미 한국 측 헌터들은 저 빌어먹을 물건에 당해버렸다.

역시, 그 인간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

‘안티 에스퍼 박스인가?’

최지혁은 인상을 찌푸리고 바닥에 떨어진 채로 웅웅대는 물건을 노려보았다.

돈과 인력을 쏟아부은 모양인지 회귀 전에 있던 물건과 품질부터 달라 보였다.

하기야, 그러니 그를 잠깐이라도 붙들어 놓을 수 있었던 거겠지.

이 정도로 작정하고 유라를 데려갈 줄은 몰랐다.

“감히 내 창창한 미래를 박살 내? 나도 똑같이 네 미래를 박살, 커헉!”

딱히 어떤 놈인지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알아두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근처에 시민들을 통제하러 나온 경찰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어차피 일반인들은 빌어먹을 저 기계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그 대신 팔다리 정도는 분질러 놔도 상관없겠지.

“악, 아아아악!”

최지혁은 가차 없이 이름 모를 인간을 경찰들에게 던져주며 말했다.

“신원 조사 부탁드리죠.”

그리고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하나둘 붙잡아 똑같이 만들어 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유라가 실망할지도 모르니까.

민간인들도 다 보고 있어서 언제 언론으로 터져 나갈지 모른다.

“아아악! 커헉!”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유라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말해. 어디야.”

최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S급 헌터로 보이는 남자의 손을 짓밟으며 물었다.

복면을 벗겨보니 백인이었다.

소속이 어디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규모의 S급 헌터를 모을 수 있는 국가는 몇 안 되니 말이다.

“빨리.”

최지혁은 억지로 남자의 입을 벌리고 유라가 잔뜩 사준 물약 중 하나를 쑤셔 넣었다.

“상황에 따라, 바뀝니다, 저도 자세히 어디인지…… 보안을 위해……!”

남자가 영어로 나불거렸고, 최지혁은 있는 힘을 다해 인내심을 발휘했다.

죽이면 안 된다.

유라가 실망할 거다. 유라는 도덕적인 사람을 좋아하니까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지켜야지.

“대가리가 누구야.”

최지혁의 말에 반쯤 뒤로 꺾인 남자의 팔이 고통스럽게 움직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을 보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헌터 하나가 보였다.

지금까지 움직임이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암살자 계열 같았다.

질문을 하는 순간 그의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와 죽이려고 들었으니까.

최지혁은 바로 놈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으로 내려찍었다.

인간을 상대하는 건 자신 있었다.

“채유라 어디 있는지 불어.”

***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대로 최지혁을 기다려야 하나? 나는 현재 이상한 실험실에 갇혀있었다.

웬만한 던전에서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공포로 심장이 덜덜덜 떨렸다.

큰일 났다. 손발이 묶여 움직이지도 못했고, 옆에 놓인 주사기들을 대충 보니 자칫하면 나한테 놓을 생각인 듯했다.

아니면 그냥 겁주는 것이거나.

- ‘마스터, 비둘기 지금 못 들어오는 중이다.’

- ‘나도 알아.’

에르켈이 해결책을 구하러 갔으니, 여기서 어떻게 버티면 곧 핸드폰은 손에 들어온다.

저놈들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연구원이라는 자가 분명 ‘세계 멸망 저지 프로젝트’라고 했으니까.

버티기만 하면 된다. 날 굶기지도 않을 거고 나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면 분명 누군가는 들어올 거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 핸드폰만 손에 넣으면 된다.

- ‘리온, 따로 놈들이 하는 얘기는 못 들었어?’

내 말에 리온이 대답했다.

- ‘마스터 가지고 실험이라도 할 모양이야.’

그건 나도 안다. 그 전에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여기가 도대체 어딘지를 알아야지.

- ‘그리고 건물 전체에 S급 헌터들이 포진되어 있는데 어떻게 모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 ‘환풍구 같은 건 없어?’

- ‘사람이 들어갈 정도는…… 오?’

하지만 그때였다.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실험실 안 스크린이 팟, 켜지며 남자 하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 “이런, 유감스럽게도 저희 건물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은 출입 불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형화된 에르켈이 이상한 기계에 날개를 붙들린 채로 바동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웅웅웅 돌아가는 톱니 칼을 에르켈의 목에 들이밀며 낄낄낄 웃었고, 내 머릿속은 완전히 하얘졌다.

- “이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근처에 있겠죠?”

남자는 킬킬킬 웃으며 바로 에르켈을 짓뭉개 버리려는 듯 손을 들어 올렸고, 나는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에르켈, 돌아가!”

콰직. 책상이 찍히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텅 빈 실험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역소환이 안 되었다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다리가 덜덜덜덜 떨려왔다.

- “아, 아깝네요.”

나는 멍하게 화면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언제나 어디서든 쓰이는 방법이니까요.”

내가 영어 리스닝이 되는 게 짜증 났다.

남자는 하하하하 웃으며 나를 겁주려고 작정한 듯이 옆에서 방독면을 가져와 제 머리에 뒤집어쓰며 익살스럽게 말했다.

-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 마요.”

그리고 실험실에 푸쉬쉭, 안개와도 같은 기체가 퍼지더니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여기서 기절해 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 ‘마스터, 정신 차려!’

리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또 한 번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숨어있던 리온이 나와서 사람들과 싸우려 했지만…….

눈이 자꾸 감겨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리온……돌아……가…….”

“안 돼, 마스터!”

다른 건 다 모르겠고 하나는 알았다.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기절하면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할 수 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곳 사람들은 멸망을 막기 위한 거대한 집단이다. 나를 붙잡으려 보낸 이들도 전부 S급 헌터였으니 본부에는 얼마나 있을지 모른다.

아마 내가 본 것보다는 훨씬 많겠지.

심지어 최지혁의 힘을 잠시 동안 막을 수 있는 물질 같은 것도 만든 것 같았다.

최지혁이 나를 구하겠다고 여기 쳐들어오면…….

안 돼.

최지혁이 나를 구하기까지 기다리면 안 된다.

당연히 놈들은 최지혁이 여기까지 올 걸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분명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하게 해놓았겠지.

“넣어.”

“예. 가동하겠습니다.”

철컥 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어딘가에 묶였다.

우우웅 소리와 함께 무언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애써 눈을 떠보니 이상한 원통형 기계 같았다.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만약 최지혁이 나를 구하러 온다면…… 최지혁은 혼자 올 것이다.

왜냐면, 최지혁의 말대로…….

아무 대가 없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제야 최지혁이 여태까지 왜 그리 예민하고 거칠게 행동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아니다.

사회는 내 생각만큼 따뜻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강대국에서, 작정하고 멸망을 막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납치했는데 그걸 막을 사람이 어디 있어.

심지어 안 좋은 이유도 아니고 멸망을 저지한다는 원대한 이유다.

아무리 한국 언론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고 해도 내 편을 들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지성준이 최지혁이랑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내가 아무리 준우랑 친하다고 해도.

다들 나보다 중요한 존재들이 있다.

얼마 보지도 않은 날 위해 움직여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엄마.”

무섭다.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아빠, 흑…….”

집에 가고 싶었다. 내가 멸망을 막을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나는 진짜 평범한 사람인데 내가 멸망을 무슨 수로 막냐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 옆에는 리온도, 에르켈도 없다.

이 이상한 기계에 갇혀서, 손발이 붙들린 채로,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오기 시작했다.

“흑, 최지혁…….”

이러면 안 되는데 최지혁이 와 줬으면 했다.

하지만 최지혁은 여기 오면 안 되는데…….

뭐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가스량 올려.”

“예!”

갇혀있는 원통 안으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진짜 못 버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설마 여기 영영 갇혀버리는 건 아니겠지? 죽이지는 않는댔으니까 괜찮은 걸까?

모르겠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나한테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도대체 뭐라고.

“큰일 났습니다. A동에 침입자가……!”

문득 원통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의식 너머로 뭔가 삐용삐용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덜커덩, 갇혀있는 원통이 움직였고, 그 이후로는 잘 모르겠다.

“개새끼들……. 죽여버릴 거야.”

“허. 숨통만 안 끊어놨지 거의 죽여놨으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화신.”

“약.”

“……싸가지하고는. 자.”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입 안으로 매우 쓴 액체가 흘러들어왔고, 눈을 떴을 때는 피범벅이 된 옷을 입은 채로, 물에 푹 젖어있는 최지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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