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145)

약속대로 지성준의 성좌 계약을 깼다.

의외로 에그로스는 순순히 내 명령에 따랐고, 이제는 완전히 굽신거리며 내게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사실 기다렸습니다. 주인님을 뵙기를요.”

그에 옆에 있던 에르켈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툭 뱉었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분명 서번트 계약 후 네 신변이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첨하는 것 아닌가.”

에르켈의 말에 에그로스가 들켰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이로써 자존심은 바닥났어도 존재는 유지했으니 본전은 뽑았네.”

에그로스의 말에 조그맣게 변한 채로 최지혁의 머리를 가지고 장난치던 리온이 말했다.

“알긴 아나 보지? 그러게 싸게, 싸게 서번트 하라니까. 마스터만큼 인간 취급 해주는 각성자 없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악마.”

에르켈의 말에 리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준우준우랑 던전 돌면서 못 봤냐. 다른 서번트들 취급. 인간 취급 해주는 인간들이 어디 있냐. 인간 취급이면 최상급 취급이다. 비둘기.”

“…….”

에르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당연히 나는 저 소리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내가 없는 동안 다른 소환사 클래스 헌터라도 만난 걸까?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말고 과일이나 드세요.”

나는 준우가 넣어주고 간 과일을 먹으며 생각했다. 공원을 갈 거면 얘들을 데리고 가야 안전할 거다.

그런데 또 데리고 가자니 정신 사나워질 것 같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

“그런데 준우준우는 왜 과일만 주고 가냐?”

리온의 말에 최지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우리랑 더 깊이 엮이면 걔네 가족들한테도 피해 가니까.”

최지혁의 말대로 우리랑 계속 접촉했다가 누구 하나 인질로 잡히는 순간 큰일 나는 거다.

괜히 또 침울해졌다.

망할 인간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병원에 셀프 감금되어 있어야 하는 건데?

물론 그 인간들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멸망? 당연히 막아야 했다.

그런데 이왕이면 그 멸망을 저지하는 주체가 본인들 나라면 얼마나 안심이 될 거야.

“괜찮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애써 웃으며 최지혁에게 말했다.

“나라도 그랬을걸? 그리고 준우는 이미 우리 많이 도와줬잖아. 괜히 걱정되네.”

내 말에 최지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생각 하는지 이번에는 잘 모르겠다.

“지혁지혁, 땅굴 그만 파. 마스터 화나면 무섭다고!”

리온이 냅다 최지혁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그에 최지혁이 조금 따끔한지 표정을 험악하게 구겼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주군도 이미 알고 있으니 별말 없지 않은가.”

그런 최지혁에게 에르켈이 한마디 던졌고, 가만히 보고 있던 에그로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흐음. 여기 분위기가 원래 이렇구나?”

최지혁은 여전히 험악한 얼굴로 에그로스를 노려보았다. 헛소리 하지 말라는 의미 같았다.

“뭐, 그럴 만도 하지. 무려 다른 세계선의 존재 같은데. 상대도 못 하는 건 당연해. 너네들도 다 알고 있지 않아?”

나는 반사적으로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그건 최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도대체 뭔 소리야?

“뭘 놀라고 그래, 주인님? 원래부터 나를 서번트로 삼은 목적이 이거 아니었어?”

에그로스는 깔깔깔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 둘은 아직 신계가 멀쩡히 살아있으니 아무 말 못 할 테지만, 나는 이미 멸망한 세계의 권위 높은 신이라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지.”

그리고는 내게 바짝 다가와 방긋 웃었다.

“금제가 없거든.”

최지혁은 반사적으로 에그로스를 내게서 떨어트려 놨다.

그에 에그로스는 짜증 난다는 듯 최지혁을 향해 말했다.

“얘, 아무리 네 성좌가 물몸이라고 해도 그건 과보호야.”

에그로스의 말에 뒤에 있던 리온이 포도를 씹으며 덧붙였다.

“에엥, 아닐걸. 그래도 지혁지혁이 마스터 과보호 안 했으면 벌써 팔다리 하나쯤은 날라갔다.”

얼탱이가 없었다. 아니 얘가 오랜만에 봤다고 불만이 쌓였나. 나를 왜 공격해?

물론 인정을 아예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몬스터는커녕 일반인한테 맞아도 뻗을 테니까.

“시끄러.”

내 말에 최지혁이 흘끗 나를 돌아봤다. 찔리는 모양이었다.

아니 얘는 도대체 찔릴 게 뭐가 있다고 저러는 거야?

“뭐, 이젠 다른 성좌들까지 난리가 나겠네.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존재라니. 심지어 조금 있으면 돌아가겠네?”

에그로스의 말에 최지혁이 발끈하며 그대로 손을 뻗었다.

“너 뭐야.”

하지만 에그로스는 멱살을 잡히고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차원 관리국에 갔다 온 거 아니었어? 그 엘드리치라는 놈, 보아하니 뭘 꾸미고 있던데. 네놈 나라랑 협정을 맺었다지? 세계를 구원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대가로 거주권을 제공하라고. 참 누구들과는 달리 머리가 좋아. 이미 본인들이 살 곳까지 싹 밀어버렸네.”

신은 다르다 이건가? 리온과 에르켈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마스터. 돌아간다니?”

리온이 물었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마스터, 또 어디 가?”

최지혁은 잡고 있던 에그로스의 멱살을 팽개치고 리온에게 말했다.

“네가 알 바 아니야.”

최지혁에 의해 사정없이 내팽개쳐진 에그로스는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 웃겨라. 쫄지 마. 네 마스터가 사라져도 우리 존재는 사라지지 않아. 왜냐면 네 마스터는 무려 정리예고가 전혀 없는 세계선의 존재니까 말이지. 그거 말고는 없어. 안 그래?”

나는 입만 쩍 벌리고 에그로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저게 다 뭔 소리람.

“곧 우리 주인님의 대단하신 우수 세계선의 신들께서 찾으러 오시겠네. 우리 화신님 서러워서 어떡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상대도 안 될 텐데. 안타까워라.”

에그로스는 통쾌하다는 듯 최지혁을 표독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감히 내가 화신으로 삼으려니 개수작을 부리며 내빼? 얼굴이 봐줄 만해 거두려 했더니.”

와중에 최지혁은 저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서 주먹까지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에르켈에게 대충 처리하라 손짓했다.

여기서 이성적인 건 에르켈뿐이었으니 말이다.

에르켈은 망설이지 않고 냅다 에그로스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닥쳐라, 세 번째.”

“이, 빌어먹을 천사 주제에 감히 신의 머리를!”

“천사는 빌어먹지 않는다. 공양을 받는 입장이지.”

“…….”

머리가 슬슬 아파 왔다. 아무래도 얘들을 대동하고 공원에 가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짓 같았다.

“리온, 에르켈. 쟤 데리고 지성준한테 가 있어.”

“알겠다, 마스터. 역소환은 이제 안 하나?”

“저번에 검사해 봤는데, 괜찮은 것 같아.”

나는 반사적으로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역시 ‘검사’ 얘기가 나오니 최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국 정부는 규격 외 존재인 내게 실험을 하고 싶어 하는 입장이었고, 최지혁은 당연히 반대했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있었다.

좀 겁이 나서.

하지만 보호를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어느 정도 요구는 들어줘야 했고, 결국 건강검진 정도로 합의가 끝났었다.

그 협상 과정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뭐, 아무튼 나는 일반인과 별다를 게 없다는 게 밝혀졌고.

추가로 서번트 소환에 대한 문제나 헌터들과 내 신체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조금 알아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내가 부르면 재깍재깍 달려오고. 알겠지?”

“알겠다, 주군.”

***

심장이 공포로 두근거렸다. 괜히 나오자고 했나?

최지혁은 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상대는 인간이야.”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헐, 최지혁이랑 채유라 아니야?”

“실물로 처음 봐.”

“진짜 둘이 사귀나 봐.”

예상과는 조금 다른 수군거림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 민간인들한테까지는 내가 멸망을 막을 단서니 뭐니 하는 정보가 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밖은 평화로웠다.

“게이트가 열리는 횟수가 줄어든 게 맞긴 한가 봐.”

“응.”

그래도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병원에서 먹고 싶은 거 다 먹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병원에서 나는 냄새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커피 사 올까?”

“어. 잠깐만.”

최지혁은 바빠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쪽 사람들 제외하고 따로 미행이 붙었는지 살피는 모양이었다.

역시 괜히 나왔나 싶었다. 오히려 더 피곤해진 거 아닌가.

“가자. 이 근처에 맛있는 데 있대.”

“응.”

나는 물끄러미 최지혁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최지혁은 내가 제 얼굴을 보는지 마는지 눈치도 못 챘다.

평소라면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얼굴이 시뻘게졌을 텐데.

이쯤 되니까 다 내 잘못 같았다. 괜히 최지혁을 따라 거기 갔다 와서 표적이나 되고…….

아니지? 내가 안 따라갔으면?

어우, 상상만 해도 끔찍하므로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음, 나는 항상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그게 맞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나 쌀국수 먹고 싶어.”

“응.”

“네 의견은 없어? 빨리 말해.”

내 말에 최지혁이 잠깐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고민하란다고 해서 고민 중인 모양이었다.

로봇이냐고.

“……월남쌈……?”

고민한 결과가 그거냐고 뭐라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얘를 어쩜 좋아.

“진짜?”

“응.”

“가슴에 손을 얹고?”

“……난, 그냥 네가 좋으면…….”

또 쭈글쭈글해져셔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휴, 내가 너무 좋은가 보지, 뭐.

“그럼 그거 먹자. 그거 먹고 음료수 마시고 한강 한 바퀴 돌고 케이크도 먹자!”

나는 최지혁의 팔짱을 끼고 그에게 찰싹 붙은 채로 최대한 밝게 말했다.

그러자 최지혁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뭘 자꾸 참아. 좋으면 그냥 웃어.”

“……응.”

쟨 날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괜히 더 걱정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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