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6
분위기가 싸했다. 당연했다.
우선 불행 중 다행으로 한국 측에서는 내게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를 한국에 붙잡고 있는 게 이득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지성준이 어이없다는 듯 하하하 웃으며 최지혁에게 말했다.
“일단 시키는 대로만 해 주면 피해는 안 끼치겠다. 이게 우리 입장이고.”
지성준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너희들한테 거절할 권리 따위는 없는 거 알지?”
그에 최지혁이 피식 웃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히려 그쪽에서 빌어야 하지 않나. 제발 한국에 머물러 달라고.”
나는 일단 최지혁의 뒤에서 가만히 생각이라는 걸 해 보았다.
아무튼 내가 멸망을 막을 단서라는 사실이 엘드리치에 의해 퍼진 이상 나는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멸망을 막으려 할 테고, 그 유일한 단서인 나를 섣불리 죽이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감금 정도는 하지 않을까?
“야.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지성준이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딜하자.”
그에 최지혁의 표정이 완전히 구겨졌다.
“빌어먹을 내 성좌만 떼줘. 그러면 한국 측에서 보호관찰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힘 써볼게. 어차피 지금 정보 알 사람은 다 알 만큼 새어나가고 있는데 납치당하는 건 한순간 아닌가.”
최지혁은 어이없다는 듯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 네가 대통령이냐? 뭔 수로 보호관찰을 확실히 하는데? 네 직급도 제대로 못 지키는 주제에 지키긴 뭘 지켜.”
지성준은 최지혁의 대답에 똑같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넌 뭘 할 수 있는데? 강해졌다고 자신만만한가 본데, 그래봤자 다굴엔 장사 없는 거 모르냐? 네가 24시간 네 여친님이랑 붙어있을 거냐?”
최지혁이 흘끗 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지성준에게 뭐라뭐라 속삭였다.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뭐라고 했기에 지성준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지.
“……알단 다굴하는 새끼들 처리 방법은 안 궁금하고 너넨 어떻게 할 건데?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어?”
최지혁의 뾰족한 방법이라면 바로 나를 집에 보내버리는 거였다.
그 전까지만 어떻게 나를 안전히 사수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환장하겠다.
“진짜로 24시간 붙어있으면 되죠. 나는 완전 가능한데. 안 그래, 최지혁?”
나는 최지혁의 팔을 감싸 안은 채로 지성준에게 말했다.
그에 지성준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성좌님. 뭘 24시간 붙어 있어, 둘 다!”
지성준의 말에 최지혁이 시뻘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시끄럽고, 한국에서 보호해 주는 거 확실해?”
그에 지성준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일단 한국에서 너희들 인지도도 있고, 평판도 있으니까 보호조치는 어렵지 않을 거야. 다만.”
지성준의 뒷말은 안 들어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한껏 불안해진 마음으로 안고 있던 최지혁의 팔을 더 꽉 안았다.
“다른 나라가 정신이 회까닥 돌아서 쳐들어온다면 말이 달라지지.”
그에 최지혁이 나를 감싸 안아주었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강대국들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우리가 저지할 수 있을까?”
지성준이 엿 같다는 듯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최선의 선택은 한국에 남는 거야. 윗대가리들이 등신이 아닌 이상 멸망을 막을 유일한 단서를 홀랑 넘겨주지는 않겠지. 그래도 명분이 살아있는데.”
지성준의 말에 최지혁이 대답했다.
“그럼 그 잘나신 윗대가리들이랑 얘기나 해보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지금 설마 대통령이랑 한판 붙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최지혁이 내 불안한 눈빛을 슬쩍 보고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안 싸워. 말로 해결할 거야.”
그에 옆에 있던 지성준이 뜨악한 얼굴로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최지혁에게 물었다.
“진짜?”
“……네가 하지 말라는 거 안 해.”
곧이어 지성준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웩, 우웨에에엑! 최지혁 이 정신 나간 놈아! 내 앞에서 뭐 하는 짓인데!”
솔직히 말해서 지성준과 최지혁이 무슨 관계인지 잘 모르겠다.
저러는 걸 보니 친했던 것 같은데 왜 첫 만남 때 죽이려고…….
아,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엘드리치와 관련되어 있겠지.
지성준도 엘드리치에 대해 알고 있었고, 같이 회귀한 걸 보면 안 봐도 4D였다.
최지혁이 또 뒤통수 쳤으니까 죽이네 마네, 네가 개자식이네 아니네 했겠지?
뭐, 그래도 지금은 다시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다행인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최지혁의 험악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말했다.
“지성준 씨 성좌 떼줄게요. 그 대신 나 보호해 준다는 말 지켜요.”
그리고 최지혁이 안 보는 동안 입 모양으로 빠르게 지성준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 되면 나랑 둘이 얘기 좀 할래요?’
***
최지혁 몰래 뭔가를 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최지혁은 예민했고, 생각보다 면밀했으며, 진짜로 내게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최지혁의 행동과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를 노리고 있는 조직들이 한둘이 아니니 24시간 붙어있는 게 최선이긴 하지.
게다가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도 동의한 상태이고.
어제도 중국 쪽 헌터들 몇 명이 병원으로 잠입했다고 들었다.
약속한 대로 한국 측 헌터들이 이들을 처리했다.
“오랜만입니다. 채유라 양.”
나는 최지혁의 옆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대통령이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올 줄이야.
내가 정말 멸망을 막을 존재가 맞긴 한 것 같았다.
“지성준 게이트 관리청장의 말대로 대한민국 측에서는 채유라 양을 보호할 계획입니다.”
옆에 있는 최지혁의 표정이 살벌했다.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말로 하기는 개뿔, 주먹 나갈 것 같았다.
“채유라 양이 만든 가짜 신분도 이미 진짜 정보로 더 확실히 해결해 놓은 상태입니다.”
“…….”
심장이 덜컹했다. 신분 문제는 도경 아저씨가 확실히 해 뒀다고 해도 작정하고 파고들면 안 들킬 수가 없었다.
그럼 이 사람들은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어찌 되었건 유라 양은 대한민국 국민이니 나라에서 보호할 명분이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대통령의 말에 최지혁이 비웃듯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그까짓 명분. 어차피 다른 강대국들이 힘으로 밀고 들어오면 포기할 거 아닙니까.”
최지혁의 말에 대통령이 바로 받아쳤다.
“아직 확실한 정보가 없는데 섣부르게 전쟁까지 일으키며 유라 양을 차지할 만큼 멍청한 나라는 없습니다. 최지혁 헌터.”
그에 최지혁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래서 미국 정보국 측에서 그렇게 현란하게 움직입니까?”
최지혁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미국 정보국이 갑자기 왜 나와? 전쟁이랑 정보국이 무슨 상관인데?
“……지성준 헌터와 꽤 친밀한가 봅니다.”
대통령의 말에 최지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정말 지성준 헌터가 내게 정보를 퍼줬다고 생각한다면 실망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뱉었다.
“지금까지 왜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했을 것 같습니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권력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쓱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내가 시켜서 얌전히 있었다는 거야?
“…….”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맞는 말 같았다.
아니 잠깐만. 진짜잖아?
S급 던전 들어가자고도 내가 말했고, 언론플레이에 놀아나자는 것도 내가 그랬다.
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정부가 멀쩡히 살아있는 나라가 얼마 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은 S급 헌터들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가 많지 않습니까.”
“……최지혁 헌터, 그 발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이 싸늘한 표정으로 최지혁에게 말했다.
그리고 최지혁 또한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감당 못 할 게 어디 있습니까.”
순간 병실 안이 덜덜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대통령의 옆에 있던 헌터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벌벌벌 떠는 걸 보니 뭔가 한 모양이었다.
말릴까 했지만 일단 가만히 놔뒀다.
가끔은 협박이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하는 법이었으니까.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허.”
“채유라 양은 제가 보호합니다. 어떤 일이 있건 연구, 감금, 조사는 일절 거부합니다.”
최지혁이 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줄 때 고분고분 알아서, 잘, 행동하시죠.”
저렇게 협박해도 되나 싶었지만 과거 일을 떠올려 보면 안 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최지혁은 내 생각보다 강하다.
지금은 아직 최지혁이 완전히 힘을 쓴 걸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아마 예전만큼 힘을 회복하지 않았을까?
괜찮겠지? 또 센 척하는 거 아니겠지?
괜히 침울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최지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집단 대 개인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싸움에서 최지혁이 이겨봤자 얻는 게 뭐지?
최지혁의 말대로 내가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나는 최지혁을 멸망하는 세계에 남겨둘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최지혁은…….
나는 내 손을 잡은 최지혁의 손을 세게 쥐어 보았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현명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