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기인가 보오.”
시야가 멀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최지혁은 버텼다. 놈들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했다.
“하……. 이미 영혼이 그 세계로 넘어가 버렸으니. 분명 그쪽에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올 텐데…….”
놈들은 최지혁의 행성을 가리키며 곤란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데려와야 하오. 같은 세계선도 아니고 멸망 직전의 폐기 세계선이오. 균형이 깨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않소.”
“잘 알다마다. 균형이 깨지면 우리도 곧 이 꼴이 날 수도. 하지만 그쪽의 요구는 안 봐도 뻔하지 않습니까. 같은 세계선 안의 평행차원이라니요. 관리자들이 허가할 거라 보십니까?”
세계선? 평행차원?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놈들이 뿜는 에너지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살갗이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지성준의 성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이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최지혁은 더 필사적으로 유라를 제 에너지로 감싸 안았다.
“일단 요구는 해 봐야 하지 않겠소. 뭐, 그것도 아니면 관리자들을 상대로…….”
“상대로……?”
“꼼수라도 부리든가.”
이제 저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울고 싶었다.
엘드리치에게 영혼을 바친 결과가 바로 이건가?
그들은 유라를 데리러온 게 틀림이 없었다.
그와 똑같이 생긴 세상. 그리고 그의 성좌이자, 간절히 원하는 존재인…… 유라의 세상에서 온 존재들.
최지혁은 유라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무리 유라가 괜찮다고 해도 괜찮을 수 없었다.
다 최지혁, 그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지금이라도 은신 아이템을 집어 던지고 그들에게 유라를 내보일까?
아니, 그랬다가는 유라가 순식간에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 무력한 그 자신이 싫었다.
더 강해지고 싶었다.
‘그 욕심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강해지긴 뭘 강해져.’
하지만, 그래도, 무력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또 상황을 이렇게까지 만든 주제에 뭐라도 할 용기가 없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최지혁은 결심했다. 유라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유라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말고는 없었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저놈들은 유라를 찾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가 유라를 넘겨주는 대가로 기억을 지워달라고 빌면 괜찮지 않을까?
이딴 거지 같은 세상 따위는 잊고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하지만 그때였다.
철컥. 시계태엽이 그와 유라의 허리를 감쌌다.
최지혁이 반항을 하기도 전에 몸이 휙, 하고 어딘가로 낚아채졌다.
“오, 이런.”
순식간에 유라와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이 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최지혁은 유라의 세계의 존재들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하지만 눈이 멀어버리거나, 전신이 타 버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구경은 다 하였느냐.”
그의 앞에 꽤 익숙한 얼굴의 엘드리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기회는 무사히 얻은 것 같군. 이제부터는 운명에 달려있다.”
유라는 그의 품에서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숨만 색색 쉬는 걸 보니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유라를 강준우에게 데려가든가 병원에 데려가든가 적어도 이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었다.
“뭐라는 거야. 내 영혼을 바친다면 소원 들어주겠다며. 내가, 영혼 바친다잖아 왜, 왜!”
최지혁은 핏발 선 눈으로 엘드리치에게 외쳤다.
주변은 여전히 새카만 우주 같았다.
‘저 자식을 죽이면 빠져나갈 수 있을까?’
최지혁은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엘드리치의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왜, 무슨 의도로 그가 엘드리치가 연 문으로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문을 닫지 않았는지.
하필이면 왜 차원관리자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또, 왜 그를 다시 그 빌어먹을 곳에서 꺼냈는지.
마지막으로 이곳은 어디인지.
엘드리치는 최지혁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꽤 쓸만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겪은 일들은 나의 가장 원대한 계획이니.”
“뭔 개소리야.”
엘드리치의 새하얀 손이 척, 유라를 가리켰고, 최지혁은 온몸으로 유라를 끌어안았다.
“나는 끝없는 회귀의 고리를 끊고 자유가 될 것이다. 너의 세상을 구원하라. 선택받은 자여.”
“…….”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품에 안긴 유라를 쳐다보았다.
머리가 이상하게 잘 굴러가기 시작했다.
던전 안의 존재들이 유라를 차지하려 했던 이유.
유라의 세상의 존재들이 유라를 찾는 이유.
엘드리치가 그를 살려둔 이유.
“으, 아파……. 머리 아파.”
그의 품 안에서 유라가 끙끙대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파…….”
애가 탔다.
던전 안의 존재들의 말처럼 유라는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유라에게 선택받은 존재이고.
“운명을 받아들여라.”
휙. 엘드리치가 손을 휘젓자, 최지혁은 초토화가 된 벌판에 뚝, 떨어졌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복잡한 문제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병원, 병원으로 가야 했다.
***
“봐, 마스터 안 죽었다고 했지? 마스터가 죽으면 나도 뒤진다니까?”
리온은 의기양양하게 당황한 준우를 향해 말했다.
“유라야. 일단 지금은 그냥 몸살이야. 수액 맞고 조금만 쉬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응…….”
“힐은 일반인이 맞으면 회복이 더뎌지니까 조금만 참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최지혁은 상당히 곤란한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시간이 1년이나 지나버렸으니까.
“잠깐만 둘만 있게 해줄래.”
최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준우에게 말했고, 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온과 에르켈을 끌고 나갔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생각을 포기하고 싶었다.
1년이라니 말이 돼? 나는 헛바람만 계속 내뱉었다.
말도 안 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유라야.”
“응?”
최지혁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지성준한테 연락이 왔는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너, 집에 가면…… 안 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살짝 벌리고 최지혁을 바라보았다.
얘가 왜 또 저러지.
“빌어먹을…….”
최지혁이 곤란하다는 듯 거칠게 제 얼굴을 쓸었다.
“왜, 또 뭐가 문제인데. 응? 말해 봐.”
“……게이트가 열리는 횟수나 빈도는 현저하게 줄어들었어. 그런데.”
나는 빤히 최지혁을 바라보았다. 그에 최지혁이 똑같이 나를 마주 보더니 곧 내 손을 잡고 제 볼에 가져다 댔다.
“제기랄…….”
“욕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내 말에 최지혁이 주머니에서 제 핸드폰을 꺼내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 “이 세계는 정리 중이다. 살고 싶다면 기회를 넘보아라.”
- “단서는 세계선이 교차하는 곳 안으로 들어갔으니.”
- “스스로를 구원하라, 우매한 인간들이여.”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최지혁이 괜히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은 최지혁과 나 둘뿐이었고, 엘드리치가 말하는 기회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일단 비밀 유지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보기 좋게 실패했고.”
최지혁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뻔하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찬찬히 생각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내가 세상을 구원할 단서라는 걸 알아버렸다.
그런 이상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예정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이야 강준우가 편의를 봐 줘서 몰래 숨어있다고 해도, 곧 들킬 게 뻔하고.”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건 틀림이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람들은 네가 그 단서인지, 아니면 내가 그 단서인지 아직 모른다는 거야.”
최지혁이 내게 바짝 다가와 애원하듯 말했다.
“유라야.”
“……왜, 또 무슨 말 하려고. 최지혁, 안 돼.”
내 말에 최지혁이 애가 탄다는 듯 내 손을 붙잡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유라야, 제발. 여기 있어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너 돌아가는 방법 내가 알아. 그러니까…….”
나는 가만히 최지혁을 바라보았다.
왜 자꾸 돌려보내려 하는지 모르겠다. 표정은 괴로워 보이는 거 뻔히 티 나는데.
물론 최지혁 말대로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다.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당연히 돌아갈 거다.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유라야. 집에 가자. 응?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럼 정말로 내가 멸망을 막을 수 있는 단서라는 거잖아.”
“유라야.”
나도 지금 내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거 알고 있었다.
“그럼 내가 여기서 그냥 집에 가버리면 넌 어떻게 되는데?”
“나 이제 강해. 살아남을 수 있어. 끝까지 살아남으면 되는 거잖아.”
최지혁이 억지로 웃었다.
“나는 어떻게 돌려보낼 건데? 그리고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내가 널 몰라?”
내가 쏘아붙이자 최지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곧 내 손을 놓고 죄인처럼 말했다.
“곧, 찾으러 올 거야. 갈 수 있어. 거짓말 아니야.”
“그러면. 너는. 내가 네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단서라며. 그리고 애초에 던전에서 나온 몬스터 말을 어떻게 믿는데? 설명해 봐, 최지혁.”
내 말에 최지혁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널, 어떻게 이 세계로 불러들였는지 안 궁금해?”
안타깝지만 최지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드리치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시계태엽들, 그리고 최지혁의 회귀.
소원.
“난, 나는 다 상관없어. 유라야. 그러니까 제발,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