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45)

나는 최지혁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최지혁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내 입에 제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차원관리자가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영영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는 입 모양으로 최지혁에게 말했다.

‘인벤토리, 인벤토리! 이불!’

그에 최지혁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제 인벤토리에서 은신 아이템을 휙 꺼내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은신 물약을 제 입에 꽂았다.

최지혁도 저놈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최지혁이 내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일단 따라가자.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제 최지혁은 S급 각성자다. 만약에 상황이 안 좋아져서 저놈들과 싸워야 할 일이 생긴다면 최지혁이 이길 수 있을까?

불안했다. 아무리 최지혁이 강해졌다고 해도, 전과 달리 내 핸드폰은 완전히 먹통이다.

나는 아무 힘도 쓸 수 없다 이 소리였다.

“유라야.”

“응. 알았어.”

최지혁은 나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놈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바닥에 놓여있는 커다란 구체들 덕분에 은신이 어렵지는 않았다.

긴장했는지 최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일단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의 선택은 맞았다.

차원관리자가 이동하는 길을 따라가자 드디어 우리가 일주일 동안 헤매던 구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딜 가는 거야, 젠장.”

최지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게 놈들은 길도 없는 평지에서 한 바퀴를 뱅글 돈다거나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돌아오거나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들어?”

“안 힘들어.”

최지혁의 말과 다르게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은신 기술까지 쓰면서 5시간을 걸으니 조금 힘에 부치는 것 같았다.

“기력 포션 먹을까?”

나는 최지혁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조용히 물었고, 최지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버틸 수 있어. 걱정 마.”

그때였다. 앞을 향해 이동하고 있던 차원관리자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최지혁은 반사적으로 내 머리통을 감싸며 내 몸을 완전히 제 몸으로 감싸버렸다.

“                ,          .”

놈들은 알 수 없는 그르렁대는 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에 최지혁의 눈이 커졌다.

“베다……? 83-C 입장 허가 요청……?”

최지혁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최지혁도 보았는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나를 더 바짝 안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르릉! 소리와 함께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최지혁을 꽉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온몸이 벌벌벌 떨렸다. 속은 계속 울렁거렸고, 시야는 뭔가 바뀌긴 한 것 같은데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파악이 안 됐다.

“유라야. 정신 차려. 채유라!”

나는 입을 꾹 막고 눈도 감았다. 진짜 토할 것 같았다.

“유라야, 내 말 들려? 응? 유라야.”

최지혁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토할 것 같으면 토해. 괜찮아.”

나는 최지혁의 품에서 일단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차츰 상태가 괜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유라야……안 돼, 유라야. 나 좀, 나 좀 봐봐. 응?”

최지혁이 내가 괜찮은지 확인해보고 싶은 듯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는 대충 힘겹게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라야, 미안해, 미안……. 미안해. 나 때문이야, 나, 나 때문에…….”

나는 나를 껴안고 덜덜덜 떨고 있는 최지혁을 손가락으로 쓰윽 밀어냈다.

안 보인다, 이놈아.

우리는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야외가 아닌 실내였다. 설마 여기가 그 정육면체 안인가?

이 주변에 건물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커다란 정육면체밖에는 없으니 맞는 것도 같다.

문제의 차원 관리자들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은 칙칙한 밖과 다르게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으로 환했다.

“속이 울렁거려…….”

“아…….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봐.”

최지혁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 등을 토닥이며 인벤토리를 살폈다.

아마 내게 포션이 통하지 않으니 상비약을 찾는 모양이었다.

“머리도…… 아파.”

“약, 약 먹을까? 삼킬 수 있어?”

“몰라.”

심각했다. 진짜 토할 것 같았다.

아니, 분명 전에도 포탈은 탄 적이 있는데 왜 이러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핸드폰도 안 되고, 몸 상태도 이상하고.

그런데 또 최지혁은 멀쩡해 보였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둘 중 하나는 멀쩡하니까?

“유라야. 입 벌려봐.”

나는 최지혁의 말대로 그의 품에 축 늘어진 채로 입을 살짝 벌렸다.

최지혁은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로 제 손으로 진통제를 순식간에 부수고는 내 입에 털어 넣었다.

당연히 나는 뱉을 뻔했고, 최지혁은 그대로 내 입에 물을 흘려 넣었다.

“으엑, 악, 써……!”

“여기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까 조금만 쉬다 가자.”

내가 쓰다고 오만상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최지혁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불안해 보였다.

음, 얘 앞에서는 엄살 부리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주변에 진짜 아무도 없어?”

내 물음에 최지혁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척 없어. 진짜로 아무도 없으니까 쉬자. 거짓말 아니야.”

우리가 있는 실내에는 각 벽면마다 하나씩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정 중앙에는 천장과 바닥을 잇는 황금색 봉에 붉은색 빛을 내는 둥근 구체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구체를 쳐다보았다.

느낌이…… 안 좋았다.

***

최지혁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유라의 상태가 평소와 달랐고, 아까 시전된 이동기 때문에 메스꺼움까지 호소하는 중이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진통제를 먹이니 상태가 나아지긴 했다.

유라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저기 가볼까?”

유라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를 안전히 지키는 것밖에 없어서 최지혁은 언제든지 공격에서 유라를 보호할 수 있도록 유라를 고쳐 안았다.

그리고는 유라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북쪽에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최지혁은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곳에는 수만, 아니 수억, 혹은 그 이상의 무수히 많은 구체들이 공중에 수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이게 뭐야.”

유라가 말했다. 최지혁은 침을 꿀꺽 삼키고 더 면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소각 완료) 덴타인 202g-1028]-

-[(3차 소각 예정) 갈리온 2934h-]-

-[(소각 진행 중) 영혼성 56b-219]-

원래라면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유라가 준 스킬 덕에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글자들 위의 구체는 이곳에 처음 도착하고 발견했던 구체들과 크기만 다를 뿐. 상당히 닮아있었다.

소각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구체들은 전부 빛이 죽어있었고,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들은…….

-[(5차 소각 예정)지구 3ab-1934]-

전에도 보았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지구.

어이가 없었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세계로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이유.

불이 들어와 있는 5차 소각 예정 행성은 그가 살고 있는 지구뿐이었다.

다른 행성들은 전부 빛이 희미했으며 이곳에서 멸망하지 않았다던 유라의 행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라는 어디서 온 거지?

유라가 다른 세상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유라가 그와 똑같은 지구에서 온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이곳에 유라의 세상은 없었다.

이곳이 도대체 어디지?

이곳의 행성들은 전부 멸망 중이었으며, 차원관리자들은 분명 이곳으로 들어왔다.

도저히 그의 상식으로는 이 곳이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덜커덩, 소리와 함께 사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라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고, 최지혁은 그대로 은신물약을 사용하며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냅다 이불을 덮어버렸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여긴가?”

“여기서 그 영혼을 어떻게 찾으시렵니까? 참고로 이미 그쪽 관할에서만 이십 명째이지요?”

“……어쩔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았소. 게다가 대부분 같은 세계선 내인지라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그리 치명적인 문제는 되지 않소.”

“이번엔 아니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서 회수하려 이렇게 세계선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 아니오.”

네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사람 형태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로만 느껴지는 강한 위압감.

최지혁은 유라의 눈과 귀를 착실하게 막았다.

유라는 평소와 같지 않다.

벌써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이제 관리자들에겐 어떻게 설명할 예정이지요?”

목소리가 울리자 뇌가 파르르르 떨리는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우리가 있는 세계선은 멸망 후보에 존재하지 않소. 우수 세계선의 균형과 관련된 일이니 문제될 것은 없는 걸로 생각되오만.”

최지혁은 본능적으로 이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점도 찾았다.

그는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알고 있었다.

지구의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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