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45)

핸드폰이 먹통이었다. 완전히 먹통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핸드폰이 최지혁의 세상으로 떨어지기 전 상태가 되어버렸다.

킹메이커 앱도 없어졌고, 항상 100%였던 배터리가 어느새 94%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는데, 의외로 최지혁은 괜찮아 보였다.

아니,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얘?

꼭……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아, 왜 이렇게 불안하지. 표정이 영…….”

“이상한 생각 안 해.”

최지혁은 굳이 내 말에 확답까지 해주며 나를 다시 번쩍 안아 올렸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감이 와?”

“……모르겠어.”

내 물음에 최지혁이 풀이 죽은 듯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 질문에 자신 있게 답을 못 하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넓기는 오지게 넓네. 최지혁. 인벤토리 열어봐.”

다행히 최지혁의 인벤토리는 정상 작동 했다.

진짜 다행이었다.

역시 과소비한 보람이 있었다. 온갖 쓰다 남은 잡동사니가 최지혁의 인벤토리에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나는 우선 식량부터 살폈다.

최근에 인벤토리에 넣으면 유통기한이 냉장고보다 훨씬 늘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서 온갖 반찬이 다 들어 있었다.

식수도 베란다에 놓으면 인테리어 안 예쁘다고 최지혁한테 처박아 놔서 엄청 많았다.

역시 인벤토리는 쓸모가 많단 말이야.

돈 생기자마자 바로 구매해 놓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최지혁. 나 물.”

아까 진을 쏙 빼놔서 기력이 없었다.

최지혁은 얌전히 인벤토리에서 생수를 꺼내 친절하게 손수 먹여주시기까지 했다.

딱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 잠자코 마셨다.

“도대체 저기 굴러다니는 구체들은 뭐고 저 커다란 박스 같은 건 뭘까?”

나는 최지혁의 품에 안긴 채로 건너편의 커다란 정육면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꽤 먼 곳에 여러 개가 있었는데, 표면에 기이한 문양 같은 게 새겨져 있었으며 그곳에서는 황금색과 푸른색 빛이 새어 나왔다.

내 말에 최지혁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유심히 저 멀리를 내다보았다.

“한 군데 빼고는 입구가 없어 보이는데.”

“헐, 그게 보여?”

S급이라 시력도 좋은가 보다.

멀리서도 보이는 정육면체를 감싸고 있는 고리는 끝도 없이 제자리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저건 뭐야?”

나는 고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최지혁에게 물었고, 최지혁은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였다.

“……에너지 같은데.”

“에너지?”

내가 되묻자 최지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나를 고쳐 안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가까이 가서 느껴 봐야 알아.”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최지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원래도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핸드폰이 제대로 작동을 안 하니까 진짜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을까?

여기가 도대체 어디길래? 설마 앞으로도 영영 작동을 안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꾸물거리지 말고 가까이 가보자.”

내 말에 최지혁이 불안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나가야 할 거 아니야.”

고민 중인 것 같았다. 저 안에 뭐가 있을지, 안전할지, 위험하지는 않을지, 뭐 이런 거 말이다.

최지혁은 드디어 고민이 끝났는지 내 손을 꽉 붙들며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어이가 없었다. 분명 육안으로 볼 때는 몇 시간만 걸으면 저 빌어먹을 거대 정육면체까지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도대체 구조가 어떻게 된 거야?”

이제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계속 같은 곳만 뱅글뱅글 돌고 있었으니까.

역시, 최지혁 등에 업혀서 간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최지혁. 조금만 쉬자.”

내 말에 최지혁은 근처에 있는 커다란 구체 근처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내 옆에 쭈그려 앉아 내 눈치를 봤다.

내가 쉬자고 안 했으면 10시간 넘게 계속 걸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참, 자기 죄를 잘 아는 건 좋은데 좀 답답하단 말이지.

나는 가만히 최지혁의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 또 최지혁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아주 작게 말했다.

“나 더 걸을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상큼하게 대답해 주었다.

“너 딱딱해서 불편해.”

“…….”

얼탱이가 없었다. 내 별것도 아닌 날선 농담에 또 사색이 되어서 미약하게 떨고 있는 최지혁을 보니 막, 명치가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쟤는 내가 뭐라고 저러는 걸까?

“미안…….”

“조용히 하고 얌전히 앉아.”

“……응.”

최지혁은 진짜 얌전하게 내 옆에 쭈그려 앉았다.

“편하게 앉아……가 아니라 너 진짜 죽을래?”

열이 확 받았다. 답답하게 왜 그러지, 정말?

“당장 어깨 안 펴?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뭐가 문제야.”

내가 소리를 지르자 최지혁이 고개를 떨궜다.

화내면 안 되는 거 나도 안다. 그런데 화가 나는 걸 어떡해.

왜 화가 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최지혁의 행동은 다분히 정상적이었다.

어쨌든 잘못한 게 있으니 납작 엎드려 기는 게 맞으니까.

“최지혁. 고개 들고 나 봐.”

내 말에 최지혁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냥 한숨을 푹 쉬고 덥석 최지혁을 안았다.

그리고 토닥여 주며 말했다.

“괜찮아. 응? 너 때문 아니야. 왜 풀이 또 죽어 있어.”

최지혁이 나를 마주 끌어안았다.

“물론 이번에도 원인은 네가 제공했지만 결국 그에 따른 선택은 내가 한거니까.”

나는 최지혁의 두 뺨을 잡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끔 만들었다.

“최지혁.”

“……응.”

“나는 내 선택 후회 안 해. 어차피 지나간 일인걸. 돌이킬 수 없어.”

나는 재빠르게 최지혁에 입술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리고 웃으며 최지혁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그러니까 나 욕심내도 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지혁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대로 내 입술을 삼켰다. 조금 다급해 보였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생각들이나 감정들이 내게로 흘러들어 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최지혁이 내게 매달리는 이유는 알겠다.

나도 안다. 최지혁의 옆에는 아무도 없는 거.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었다. 최지혁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나는 최지혁이 좋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좋은 걸 어떡해.

현명하지 못한 선택인 걸 알면서도 불구하고 나는 최지혁이 좋았다.

“나는…….”

최지혁이 내 입술 가까이에서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괜찮은 사람이고 싶어. 번듯하고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 허리를 감싼 최지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너한테, 흠이 되지 않게, 네 앞길에 방해되지 않게.”

나는 잠자코 최지혁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놈이 아니니까…….”

최지혁의 입술이 내 목 근처에 맴돌았다.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 다시는, 후회 하는 일 없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지켜줄.게 유라야.”

“최지혁, 숨 막혀어…….”

내 말에 최지혁이 안고 있던 팔의 힘을 겨우 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입 맞추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난 너만 행복하면 상관없어.”

최지혁이 또렷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 웃었다.

“그거면 돼.”

***

최지혁의 인벤토리에 쟁여놓은 아이템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우리는 굶어 죽지 않았을까 싶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유라야. 이리 와.”

“급할 거 없으니까 밤새우지 말고. 세 시간 있다가 깨워. 알았지?”

“여섯 시간 있다가 깨울게.”

“또 헛소리 한다.”

“……알았어. 다섯 시간.”

나는 최지혁의 어깨를 팔꿈치로 찍었다. 어제도 저런 식으로 구라까고 결국 6시간 있다가 깨우더니 또 그러네.

“……네 시간 반.”

나는 대충 뜨뜻한 최지혁의 몸에 기대 눈을 감았다.

아무리 이곳에 몬스터가 없다고 해도 예외는 언제나 있는 법이니 우리는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나는 최지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댄 채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못 빠져 나가면 어떡하지?

아직도 같은 곳을 맴돌고 있고, 저 빌어먹을 정육면체 가까이로 가는 법은 알아내지 못했다.

“최지혁. 우리 먹을 거 얼마나 남았어?”

내 물음에 최지혁이 나를 꽉 껴안으며 대답했다.

“다섯 달.”

“굶을 생각 하지 말고.”

“……두 달 반.”

쌀 20킬로짜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은?”

“한 달 반.”

핸드폰이 먹통이라 너무 답답했다.

“물이 문제네……. 여기는 무슨 자연 자원 같은 거 없나. 다 돌덩이밖에 없고 난리야. 차라리 무인도가 낫겠다.”

돈도 많이 모아서 작동만 된다면 여기서 1년이고 10년이고 호화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최지혁. 진짜 세 시간 있다가 깨워야 해.”

“자.”

“응.”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 잠을 청했다. 좀 피곤해서 정신없이 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뭔가 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라 눈을 살짝 떴다.

최지혁은 나를 안은 채로 커다란 구체 뒤에 숨어있었고, 표정을 보니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주변은 어느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로 가득했고, 나는 눈치껏 조용히 최지혁이 응시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이곳에,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얼굴이 뻥 뚫린 존재 여섯이 유유자적하게 큐브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저 존재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차원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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