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화 (125/145)

“내가, 내가 미안해, 유라야.”

최지혁의 시뻘겋게 충혈된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내가, 이기적인 새끼고, 멍청한 새끼라, 이딴 식으로밖에 못 해서 미안해.”

최지혁은 차마 내게 손도 뻗지 못하고 덜덜덜 떨기만 했다.

“나도, 잘못된 거 알아. 그런데, 내가……. 그냥 나는…….”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로 내 바짓가랑이를 꽉 쥐었다.

“너랑, 너랑 있는 게 너무 행복해서.”

서러워 보였다. 내가 미처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최지혁의 목소리와 표정, 몸짓에서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너랑 같이 있는 이 순간이 너무 갖고 싶어서.”

“…….”

“그런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들키는 순간, 이 모든 게 끝날 걸 너무 잘 아니까.”

최지혁은 내 앞에서 완벽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런 모습의 최지혁은 나도 처음 봤다.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나는 못되고 못난 새끼니까, 이딴 방법 말고는 생각이 안 났어. 네 반짝거리는 삶에 비해 내 삶은 초라해서, 그거라도 바쳐서 네가 행복해지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네가 나를 용서할 리 없으니까. 좋아할 리 없으니까.”

속이 아팠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최지혁이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래서 욕심내면 안 되는 거 나도 너무 잘 아는데, 유라야, 그게……그게.”

“…….”

“그게 내 생각처럼 안 돼.”

최지혁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나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유라야…….”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너무 간절해 보여서.

“나, 너랑 있고 싶어. 너랑 계속 있고 싶어. 염치없는 거 알아, 나도. 그런데, 그런데…….”

나는 그냥 최지혁을 안아주기로 했다.

어차피 최지혁은 더럽게 커서 내가 안긴 꼴이 되었지만.

아무튼 나는 최지혁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최지혁은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잠깐 굳어있다가 곧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유라야.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그리고 울었다. 나는 최지혁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의사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것도 알았다.

“왜,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해, 최지혁.”

나는 최지혁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여태까지 거짓말하고 안절부절못한 건 짜증 나.”

“…….”

“그리고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죽을 뻔한 거. 네 잘못 맞아.”

최지혁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껴안고 있는 팔의 힘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나 너 원망 안 해.”

“……뭐?”

뭘 또 모르는 척, 놀라는 척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최지혁에게 말했다.

“어차피 그때 네가 날 안 불렀으면 나 죽었을걸? 그리고 내가 전에 괜찮다고 했잖아.”

“…….”

나는 최지혁을 살짝 밀어내고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잡았다.

“아무튼. 나 너 때문에 화나고 짜증 나니까 지금부터 나를 업고 다니도록 해.”

“…….”

내 말에 최지혁이 눈물을 뚝 그쳤다. 너무 황당한 제안이라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네 말대로 체력이 약해서 이 넓은 데 돌아다니다가는 지쳐 쓰러질 테니까 빨리 업으라고. 안아도 돼.”

“……유라……야?”

최지혁은 여전히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에 울어서 힘드니까 빨리 업어. 여기서 안 나갈 거야?”

***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유라는 그의 등에 업힌 채로 짜증 난다는 이유로 그의 귀를 깨물었다.

어차피 뺨을 때려도, 등을 때려도 그가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여린 부분을 노린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대놓고…….

최지혁은 정신을 차리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유라는 그를 원망하고 돌아갔어야 했다.

그런데, 유라는 그의 등에 업혀있다.

심지어 지금은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기 시작했다.

왜?

왜 아무렇지도 않지?

뭐가 문제인 거지? 꿈인가?

맞다. 영혼을 바치라 했으니, 지금쯤 엘드리치의 환영 속에 갇혔을 수도 있었다.

유라는 원래대로, 그녀의 세상에 돌아갔을까?

“미친, 최지혁! 큰일 났어!”

그때였다. 유라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등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유라의 얼굴이 드물게,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핸드폰이 이상해.”

“……뭐?”

“핸드폰 이상하다고!”

유라가 핸드폰을 그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정말 유라의 말대로 이상한 것 같았다.

배터리가 닳아 있었다.

“아이템 상점도 안 열려.”

최지혁은 유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진짜 꿈인가?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예뻤다.

그의 상상력은 뛰어나지 못해서, 꿈속의 유라가 이렇게 생기 넘치고 예쁠 리가 없었다.

“야. 정신 안 차려? 핸드폰 보라니까 왜 내 얼굴을 보고 앉아 있어!”

유라가 그의 귓바퀴를 잡아당겼다.

“왁! 유, 유라야!”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 부리지 마……가 아니라. 지금 심각하다고! 우리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

꿈이 아닌 것 같았다. 환영이 아니다. 최지혁은 다시 한번 확신하기 위해 유라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따뜻했다.

주변은 황량하기 그지없는데, 유라의 주변으로만 활기가 돋는 것 같았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괴감이 몰려왔다.

또다.

또, 유라를 나락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위험한 곳에, 그 때문에 유라가 끌려 들어왔다.

아직 영혼이 엘드리치에게 간 것 같지는 않으니 그의 소원이 유효할까?

위험한 곳은 아니겠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기억에 이런 장소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소원 향로를 쓸 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다.

“최지혁. 듣고 있어? 정신 차려. 너 왜 그래!”

유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뺨을 잡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지혁은 어쩔 수 없이 한마디를 툭, 던질 수밖에 없었다.

“유라야. 나 억지로 용서 안 해도 돼.”

그리고 그의 뺨이 무자비하게 꼬집혔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다.

“너 계속 그딴 식으로 나와.”

“…….”

최지혁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유라는 그런 그의 뺨을 꾹 누르며 말했다.

“그래. 너도 사람이면 양심에 찔리는 게 정상이지. 네 심정 알긴 알겠는데, 네가 용서해달랬잖아. 그래서 해준다잖아. 뭐가 문제야?”

“유라야…….”

도대체 그에게 유라가 왜 저런 식으로 나오는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말 하려면 내 손이라도 놓고 얘기하든가. 세상 간절한 사람처럼 꽉 잡아 놓고 뭐?”

유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보고 헛바람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강조하듯 말했다.

“지금 네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어. 미안해가 아니라, 괜찮아. 우리 같이 여기서 빠져나가자.”

최지혁은 이번에도 염치없이 유라를 껴안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살기는 안 느껴져.”

유라가 좋아하는 최대한 현실적인 답변을 해야 했다.

“나갈 수 있어.”

그의 품에 안겨있는 유라가 고개를 들고 최지혁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책임질게.”

“안 돼. 또 책임진다 하고 불구덩이라도 뛰어들면 어쩌려고?”

유라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그리고 최지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날 위해서라고 해도 목숨까지 바치지는 마. 알겠지?”

만약에, 다시 유라를 돌려보낼 기회가 생긴다면.

보낼 수 있을까?

“최지혁. 대답.”

“……응.”

아무렇지 않게, 괜찮은 척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유라의 발목이라도 잡고 제발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빌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빈다고 해서 유라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혹시라도 유라가 다시 한번 돌아갈 기회를 얻어버리면.

착한 유라는 그를 버리지 못할 거다.

알고 있었다.

유라는 그를 버리지 못한다.

지금도 그냥 발로 뻥 차버리고 꺼지라고 하면 모든 게 끝나는데, 그렇게 못 하고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으니까.

마음을 드러내는 게 아니었다. 찰나의 욕심에 휘둘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지혁은 유라가 미치도록 절실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유라의 애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지혁은 유라를 더 꽉 껴안았다.

아무리 유라가 그더러 목숨까지 바치지는 말라 했지만, 이미 각오는 되어있다.

유라가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가 그녀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은 목숨밖에 없었으니까.

그거라도 줄 수 있으면 상관없다.

“여기서 나가자, 유라야.”

유라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그의 옆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다 불행해졌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안 태어났어도 내가 이렇게 살 이유는 없었어!’

‘지혁아,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잠깐 흥분했다.’

그러니까, 유라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빌어먹을 애새끼들. 쓸모가 없어, 쓸모가!’

‘지혁아. 아빠 기억나지? 우리 아들 다 커서 티비에도 나오고 훌륭해졌네. 그런데 아빠가 말이다, 최근에 빚을 좀 져서…….’

시끄러운 기억들이 다시 울컥울컥 올라왔다.

그래서 최지혁은 유라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신으로 퍼졌다.

그리고 유라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응.”

혼자가 될 준비는 지금부터 하면 된다.

혼자여도 괜찮다.

유라만, 유라만 안전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다 필요 없다.

유라만큼은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최지혁은 그의 인생 최초로 나름 건전한 목표를 잡았다.

유라가 행복할 상황만 만드는 거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유라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 대로.

그렇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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