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최지혁은 할 말이 없었다.
“…….”
아직 유라를 되돌려 놓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그런데 엘드리치가 나타나다니.
아무리 회귀 전과 상황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5년, 아니 적어도 1년은 지난 후에야 나타날 줄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 그 소원권을 네가 또 독점해서 네 인간 성좌이자 여자친구님을 원래 세상으로 되돌려 놓겠다고?”
“어차피 그 소원권으로 세상을 구한다든가, 뭐 그딴 거대한 소원은 못 비는 거 알잖아? 네 성좌도 두 눈으로 봐서 알 거 아니야. 그깟 S급 보스 따위가 강해봤자, 멸망한 세계를 등지고 지구로 향한 침략자라는 거.”
“…….”
“그런 힘이 있었다면, 진즉 제 세상을 구원했겠지.”
최지혁의 말에 지성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야,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새끼야, 하, 진짜 정신 나간 새끼. 그러니까 어쩌자고……. 와, 나 돌겠네.”
“…….”
알고 있다. 정신 나간 새끼인 거.
“야, 아무리 최초의 멸망 전에 친인척 다 죽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쩌자고 성좌를…….”
눈앞의 지성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내가 처음에는 너 진짜 좆같았는데, X발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하나만 양보해줘. 그러면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최지혁의 말에 지성준이 어이없다는 듯 하, 웃었다.
“네가 노예 새끼냐?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그리고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내가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네 말을 어떻게 믿냐?”
“…….”
“하, 됐다. 그나저나 너, 그 여자한테 말은 했냐? 네가 이 빌어먹을 세상으로 그 여자 끌고 왔다고?”
“…….”
“네 인성에 당연히 아직 말 안 하셨겠지. 그러니까 나한테 거의 세상의 끝까지 보고 온 거 비밀로 해달라고 하신 거고.”
유라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속도를 보아서는 회귀 전보다 지금이 더 위험했다.
비록, 한국은 어떻게 잘 굴러가고 있다고 해도 거대한 힘 앞에서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 인정할게. 회귀하고 나서는 나도, 너도 제정신 아니었어. 심지어 내 회귀가 너보다 훨씬 늦게 풀렸으니 더 제정신 아니었지. 하필이면 내 회귀 시점이 빌어먹을 성좌와 계약한 바로 직후였으니까.”
최지혁은 고개를 푹 숙였다.
계속 유라의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X발, 엿 같긴 하지만 네가 나 몇 번 살려준 것도 있고.”
“…….”
지성준의 말대로 최지혁은 지성준을 살려준 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의 성좌가 떠나고 지성준은 성좌 계약을 끊기 위해 한 번 죽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최지혁이 그의 성좌가 남겨준 아이템을 그에게 건네주지 않았다면 지성준은 죽었을 것이다.
물론 순수한 선의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지혁은 상상도 못 할 쓰레기 새끼였으므로 단지 지성준이 이후 던전 공략에 필요했기 때문에 아주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뿐이었다.
“얼굴 안 펴냐? 도와주겠다잖아, 지금. 그 빌어먹을 향로로 네 여친 보내.”
울 자격 없는 거 안다. 그런데 울고 싶었다.
계획대로라면, 24시간 안에, 그는 유라를 보내야만 했다.
지금 그녀가 간다면 다시는 보지 못한다.
하지만 유라는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유라는 번듯한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가진 게 많으니까.
“그 대신, 너 나랑 약속 좀 하자. 그 여자 보내고 나면, 이 빌어먹을 세상 좀 구하자고.”
눈앞에 있는 지성준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우리 누나가 남기고 간 예서, 불쌍해 죽겠거든? X발, 나는 뒤져도 걔는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이딴 세상에서 부모도 없이…….”
“……그렇게 할게.”
유라가 없어도 살 수 있다. 그냥 쥐 죽은 듯이 살면 된다.
전과 다를 게 없는 삶으로 돌아가는 거다.
간단했다.
힘들 것 같지만, 할 수 있다. 어쨌든 유라는 잘 살아갈 테니까. 그것만 생각하고 버텨 보면 된다.
지금은, 유라를 돌려보낼 생각만 하면 된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은, 혼자 감당해야 했다.
***
울화통이 터졌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빨려 들어온 검은 소용돌이 끝에는 어두컴컴하고 광대한 공간이 있었다.
저 멀리에는 거대한 황금색의 정육면체 여러 개가 빛나는 고리 안에 갇혀 있었고, 내가 있는 이곳에는 꺼멓게 빛이 바랜 커다란 구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구체들 사이에는.
“…….”
빌어먹을 최지혁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일단 나는 무작정 최지혁에게로 다가갔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그냥 손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짝, 소리와 함께 최지혁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아프지도 않을 거, 최지혁의 뺨을 한 대 더 때렸다.
손바닥이 매우 아팠다.
그래서 눈앞이 좀 흐려졌다.
“나쁜 놈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최지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몰라서 물어?”
손발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가에 고여버린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망할. 울면 지는 건데!
“설명해.”
“…….”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라고! 이 나쁜 놈아!”
나는 최지혁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용서할 수 없었다.
“네가……, 네가 그렇게 가버리면 나더러 어쩌라고? 영혼을 바치라는데 왜 망설임도 없이 거기 뛰어들어! 왜!”
최지혁의 가슴팍을 있는 힘껏 밀쳤다. 분이 안 풀렸다.
나는 아프지도 않을 최지혁의 가슴을 마구 내리쳤다.
“집에 가긴 뭘 집에 가! 너, 내가 그렇게 이기적인 년으로 보였니? 그랬어?”
“무슨 소리야, 그게!”
내 말에 최지혁이 당황한 듯 내 두 손을 붙잡았다.
“이거 놔! 나쁜 새끼야. 넌 날 그딴 식으로밖에 안 본 거야. 미친놈.”
충격받은 최지혁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자격으로 충격을 받아?
“네가 그 빌어먹을 영혼 바쳐서 날 원래 세상으로 보내주면 내가 네,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갈 것 같았니?”
내 말에 최지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답해. 최지혁. 주둥이 처닫고 답답하게 굴지 말고 대답하라고!”
내가 울며불며 씩씩대며 말하자 바보처럼 앞에 서 있던 최지혁이 덜덜덜 떨면서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들었잖아. 내가 너 이 세상에 끌고 왔다고. 어차피 이 세상은 멸망할 거고, 그런 세계에서 살아남느니 편하게 뒤지는 게 나아.”
“…….”
“내가 너 가지고 논 거라고.”
저 자식, 또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리를 구라라고 쳐 뱉고 있다.
나는 그 덕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일부러 모른 척, 아닌 척 한 거지.
상식적으로 이 세계에서 날 아는 사람이 최지혁밖에 없는데.
최지혁이 아니라면 누가 날 여기까지 데려왔겠어.
“이기적인 놈.”
“…….”
“멍청한 새끼.”
내 말에 최지혁이 나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나 이기적이고 멍청한 새끼라, 네가 나만 두고 사라진 줄 알고 1년 넘게 너 끌어내리겠다고 별 지랄을 다 했어. 그리고 결과적으로 널 내 지옥으로 끌어 내린 건 나야.”
최지혁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나도 따라 들어온 마당에 내 정을 떼려고 해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네가 날 버렸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난,”
나는 최지혁의 말을 끊고 쏘아붙였다.
“그러면 나한테 키스는 왜 했는데? 왜 매번 나 구하러 왔는데? 죄책감 때문에?”
“…….”
“넌 죄책감 때문에 껴안고 키스하고 목숨까지 가져다 바치니? 최지혁 네가? 그 정도로 네가 양심 있는 인간이었어?”
내 말에 최지혁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나 양심 없는 새끼인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날 4년이나 봤으니까.”
그리고는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너같이 예쁜 애가 나 좋다고 하는데 그러면 넙죽 받아먹지 그 기회를 발로 차?”
“…….”
나는 최지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너도 지금 말해놓고 아차 싶지?”
“…….”
“너 나한테 거짓말 더럽게 못한다고 내가 몇 번 말해.”
“거짓말 아니야.”
최지혁이 진짜 나쁜 놈처럼 내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인벤토리 열고 진실의 물약 먹고 다시 지껄여봐. 거짓말 아니라며. 그럼 내가 납득해줄게.”
“…….”
내 말에 최지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던 얼굴에 순식간에 금이 가 버렸다.
“……제기랄.”
최지혁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냥…… 그냥 갔으면 좋았잖아.”
나는 가만히 최지혁을 노려보며 최지혁의 개소리를 들었다.
“집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기껏 약속했는데. 나 같은 빌어먹을 새끼는, 하나도 안 중요하니까, 다 잊고 다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왜 여기 있냐고!”
그리고는 주르륵,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이 터졌다. 저 인간이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훤히 다 보여서.
그게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또 아니라서.
나는 다시 올라오는 울음기를 꾹꾹 참으며 한 자 한 자 내뱉었다.
“네가, 정말 그게 소원이었으면 애초에 나 좋아한다고 입은 왜 털었어? 왜 네 우선순위가 항상 나였는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
“막말로 네가 날 돌려보내자고 죽어버렸으면, 내가 어떻게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갇혀서 살겠지!”
“……유라야.”
내 말에 최지혁은 정말 예상 못 했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모르는 밥팅이. 멍충이.
“너 죽는 거 싫어하는 거,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내가 어떻게 네 목숨값으로 집에를 가!”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최지혁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
그리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던 최지혁이 완전히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