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45)

기분 나쁜 기운이 발바닥 밑에서부터 샘솟고 있는 느낌이었다.

산의 공기는 쾨쾨하기 그지없었다.

쾅! 쾅! 거센 거인들의 발길질이 자꾸 길을 가로막았고, 설상가상으로 지성준의 통신장치로는 안 좋은 소식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침공이 시작되었단다.

아직 강원도까지만 넘어온 수준이라고 하지만 피해는 이미 막심한 것 같다.

지성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피해를 줄이려면 최대한 빨리 그 엘드리치인지 뭔지를 잡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지혁과 지성준이 엘드리치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영 찝찝했지만.

그래도 공략법을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 중이다.

“찾았어.”

지성준이 말했다. 그리고 최지혁은 말이 없어졌다.

그냥 묵묵하게 검을 빼 들고 전투태세를 갖출 뿐.

“저기.”

지성준의 길쭉한 손가락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의 말대로 거대한 황금 새장을 들고 있는 새하얀 거인이 서 있었다.

섬뜩했다.

왜냐면, 지성준이 엘드리치를 가리키기가 무섭게, 우리를 향해 발을 내리찍던 거인들이 일제히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어린 자들이 다시 한번 발걸음했구나.”

콘서트장에서 처음 소리가 펑! 터지는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가 산을 웅웅 울렸다.

그에 지성준과 최지혁이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그리고 옆에 꽤 얌전하게 있던 에그로스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흐음, 심상치 않은데.”

에그로스는 성큼성큼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방긋 웃으며 최지혁을 가리켰다.

“뭔가 숨기는 게 있어 보이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이상한 기류는 나뿐만이 아닌 모두가 느끼고 있을 터였다.

누가 봐도 최지혁과 지성준은 수상했으니까.

잠깐 공간에 침묵이 돌았고, 그 침묵을 깬 건 다름이 아닌 지성준이었다.

“야, X발 엿같게 하지 말고 닥치고 있으랬지.”

좀 당황한 것 같아 보였다.

“나라에서 이동 포털 키트 지원해 줬어. 바로 지원군 부를 거니까 그렇게 알아, 다들.”

최지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냥 불안한 얼굴로 땅만 쳐다보았다.

쟤가 정말 왜 저럴까.

“뭐 해? 안 올라가…… 제기랄. 저 새끼가 내려오네.”

반사적으로 엘드리치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성준의 말대로였다.

엘드리치는 정말 우리가 있는 곳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넓은 곳으로 이동해!”

***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많은 인원으로 싸우는 건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라에서 지원한 포털에서는 예정대로 헌터들이 열을 맞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엘드리치의 황금 새장이 마구 흔들렸다.

쨍그르르.

이상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황금색 빛이 쏟아지더니 곧 포털을 타고 이곳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던 헌터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법사들은 다들 디버프 깨!”

하지만 상대는 S급 보스 몬스터. 지성준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최지혁에게 중얼거렸다.

“전이랑 달라.”

“알고 있어.”

뭐라고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게 틀림없었다.

“에르켈, 광범위 방어막 시전해. 그리고 리온, 보스 몬스터한테 공포 스킬 걸어.”

“마스터, 지혁지혁하고 얘기 안 해 봐도 되나? 수상하다.”

에르켈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리온은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얘기해.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리온이 손을 뻗어 제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검붉은 빛이 엘드리치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너희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다시 커다란 목소리가 땅을 울렸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서 거대한 톱니바퀴 같은 것이 덜컹덜컹 돌아가고 있었다.

“나의 향로는 이미 사용되었다.”

그리고 소환된 사람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우리만 빼고.

이상했다.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다.

의도적인 공격이었다.

아니, 공격도 아니다. 우린 다치지 않았으니까.

“X발. 뭐야, 저거. 뭔데!”

지성준이 성질을 냈고, 그에 에그로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고 했어.”

그리고는 지성준에게 성큼 다가가더니 가느다란 손으로 지성준의 턱을 콱, 잡으며 얼굴을 들이민 채로 말했다.

“너, 시간을 돌아왔구나?”

“…….”

심장이 불안감으로 쿵, 쿵, 쿵 뛰기 시작했다.

나는 최지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최지혁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내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고 싶다면 갈고 닦은 강력한 영혼을 바쳐라.”

엘드리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확히 우리 앞으로 시커먼 블랙홀처럼 생긴 소용돌이가 바닥에 깔렸다.

당황스러웠다.

기껏 보스몹을 해치우러 온 사람들은 엘드리치의 디버프로 인해 여전히 움직이지 못했고, 폭격 소리로 시끄럽기 그지없던 주변은 어느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있었다.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엘드리치는 우리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또 한 번의 기회.

그리고 자연히 시간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거대한 톱니바퀴.

“최지혁.”

“…….”

나는 나지막이 최지혁을 불렀다.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이상하게도 이 기분 나쁜 정적 속에서 최지혁이 자꾸 내게 하던 말이 생각이 났다.

“돌아갈 수 있게……. 노력해 볼게.”

“……네가 집에 가고 싶다고 했으니까.”

“아니야. 너 집에 가.”

나는 가만히 시선을 떨구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최지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 가만히 있어.”

처음으로, 직감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

심장이 불안감으로 쿵쾅거렸다.

최지혁이 내게 자꾸 숨기고 있던 무언가와, 지성준에게 묘하게 약점이라도 잡힌 듯 굴던 태도.

그리고 틈날 때마다 나더러 용서해달라던 것까지.

절로 욕이 나왔다.

“이미 한 번의 기회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런 내 심정도 모르고 저 새장을 들고 있는 빌어먹을 거인은 계속 입을 놀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웅웅웅.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 기회를 얻고 싶다면 강력한 영혼을 바쳐라.”

지성준이 불안한 눈빛으로 최지혁을 쳐다보았고,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최지혁은 누가 봐도 아주 이상한 상태였다.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내 손을 뿌리칠 것만 같았다.

“채유라.”

그때였다. 최지혁이 입을 열고 내 이름을 불렀다.

“너에게 있어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해.”

할 말이 없어졌다. 그냥,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빠르게 최지혁의 팔을 꽉 붙잡았다.

“어서.”

최지혁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무작정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유라야.”

최지혁이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약속했어. 내가. 너도 가고 싶다고 했고.”

“최지혁.”

“집에 가자. 유라야.”

최지혁은 나와 다르게 힘이 세다.

아마 지금쯤이면 지성준만큼, 아니지, 내가 아이템도 줬으니까 지성준보다 더 셀지도 몰랐다.

“미안해. 유라야.”

최지혁이 나를 뿌리쳤다.

“지성준.”

“미친 새끼…….”

그때였다.

지성준이 표정을 와락 구기며 내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최지혁은 그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새카만 구덩이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놔.”

“내가 저 자식이랑 약속한 게 있어서 못 놓겠는데.”

“놔! 최지혁, 너 미쳤어? 당장 안 와? 야!”

숨이 막혔다. 턱, 턱 막혔다.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지?

“시간을 초월한 각성자여. 너의 영혼을 바치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최지혁은 미친놈이었다. 제 영혼을 바쳐서 나를 집으로 보낼 생각인가? 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거 놓으라고! 최지혁 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기만 해봐!”

대체 지성준은 왜 나를 붙잡고 있는 건데?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얘가 날 붙잡아?

“지성준, 이거 안 놔? 놔!”

“미친 최지혁, 뒤질 거면 빨리 뒤져!”

최지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내가 최지혁을 몰라? 잘 알고 있다.

최지혁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무서워한다고.

그런데 목숨을 바치긴 뭘 바쳐.

“최지혁. 정신 차려, 미친놈아. 빨리 안 와! 너 그대로 가면 나 너 평생 미워할 거야. 그러니까 빨리 와.”

내 말에 최지혁이 나를 쓱 돌아봤다.

그리고 최지혁은 다 포기한 사람처럼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미안.”

“미안한 줄 알면 빨리…….”

“이 세상에, 널 데려온 거. 그거 나야.”

순식간이었다.

최지혁은 그대로 새카만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최지혁이 방금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고 갔든 상관없었다.

“리온, 에르켈. 지성준 이 인간 나한테서 떼놔.”

“……알겠다, 주군.”

“마스터……?”

에르켈이 지성준을 향해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미친, 장난해, 지금?”

지성준은 나를 안고 땅을 굴렀고, 리온이 빠르게 지성준의 팔다리를 묶어 버렸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나는 지성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야야야야, 최지혁 여자친, 아니 최지혁 성좌 너 어디 가!”

최지혁이 빨려 들어간 검은 블랙홀이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딱딱하게 굳어있는 준우를 향해 말했다.

“준우야. 미안. 내가 빨리 갔다 올게.”

“유, 유라야, 너 어디 가!”

“최지혁 넌 뒤졌어.”

나는 곧장 그 검은 블랙홀을 향해 달려갔다.

구덩이 안으로 떨어질 때까지 내가 무슨 정신이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았다.

정신 나간 최지혁을 가만히 두면 안 된다.

응징할 거다.

최지혁 이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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