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15/145)

“아주, 다 줄줄 말씀하셨구만. 안 놀라네.”

지성준은 자조적으로 피식 웃으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직 성좌 문제를 터트리기엔 시기상조야. 이미 계약할 사람들은 다 계약했을 거고, S급 게이트 때문에 이목 집중도 안 돼. 차라리 성좌 계약 해지 방법을 찾는 게 더 효과적이야.”

준우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유라야. 뭐라는 거야……?”

그에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번에 최지혁이 말해준 거 기억나지? 성좌 계약 하지 말라고 했잖아.”

준우가 흘끔 제 시스템창을 보았다.

보아하니 성좌들로 추정되는 존재들에게서 메시지 몇 개가 와 있었다.

-[성좌 ‘소 키우는 농부’가 제발 계약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성좌 ‘주사기에 마취용액 듬뿍’이 100P를 후원하였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채유라가 개수작 말고 꺼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었다.

그에 최지혁이 흘끔 나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앙다물고 쓰윽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왜.”

“집중해.”

최지혁은 뾰루퉁한 얼굴로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우의 시스템창이 아주 난리가 났다.

“아, 시끄러워졌다.”

준우는 가차 없이 시스템창을 꺼버리며 물었다.

“그러면요, 성좌 계약을 파기할 방법이 있긴 해요?”

준우의 말에 지성준이 대답했다.

“있기야 하지. 더럽게 어려워서 문제지.”

“뭔데요?”

“뒤지면 돼. 그리고 짠! 하고 부활하면 되지.”

“…….”

지성준의 말에 침묵이 찾아왔고 최지혁이 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딴 거 안 궁금하니까 딴 데로 빠지지 말고 당장 S급 게이트 때 어떻게 해야 할지나 얘기하라고.”

“하, 네 성좌는 천사다 이거야?”

“…….”

최지혁이 눈을 또르륵 굴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하긴, 내가 좀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모습이 있지. 하!하!하!

“내가, 참나, 와씨, 그래 너 잘났다.”

“어머, 최지혁 잘난 걸 이제 알았나 봐요?”

“……서러워서 살겠나. 제기랄.”

지성준은 열 받는다는 듯 헛숨을 파하 내뱉었고, 옆에 있던 준우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속삭였다.

“유라야, 저러다 형 터지겠어.”

그에 최지혁을 보니 진짜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 참나 쟤는 나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다.

“괜찮아. 최지혁 튼튼해. 안 터져.”

내가 최지혁의 등을 팡팡 쳐주자 최지혁이 어색하게 콜록거렸다.

“아무튼 S급 터지자마자 우리는 최전방 배치야.”

“무슨 S급 게이트가 열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내 물음에 지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모르지. 당장 일본 게이트만 해도 예상이랑 달랐는데.”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긴급 재난문자인 것 같았다.

“……그럼 우리나라에도 언제고 S급이 열릴 수 있다는 거 아니에요?”

준우가 불안한 듯 물었고, 지성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런데 저희가 다 최전방으로 몰려가도 돼요? 그럼 저희 가족들은 누가 지켜요?”

“국내에는 A급 헌터들 배치해 놓을 거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보다는 당장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해. 위에서 밀고 내려오는 애들 못 막으면…….”

그때였다. 지성준의 눈앞에 갑자기 시스템창 수백 개가 연달아 우르르 뜨기 시작했다.

“……제기랄.”

워낙 정신이 없을 만큼 많이 떠서 나도 모르게 지성준의 시스템창을 읽어버렸다.

-[성좌 ‘아름다운 물병’이 노합니다.]-

-[성좌 ‘아름다운 물병’이 시스템 블러 처리 기능을 파괴하고 싶어 합니다.]-

-[성좌 ‘아름다운 물병’이 화신체 지배를 시도합니다.]-

지성준의 눈이 커졌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화신체 지배? 갑자기? 순식간에 지성준의 머리 위로 이상한 빛무리가 맺혔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빳빳하게 굳었으나, 최지혁과 준우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뭐야, 저게 안 보이는 건가?

-[지배 중 3%…….]-

“어……? 어어어어?”

지성준의 눈 바로 앞의 상태창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고, 나는 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성준에게로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채유라, 왜 그래?”

최지혁이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고, 나는 너무 당황해서 지성준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이봐요. 괜찮아요? 지성준 씨! 어떡해, 최지혁. 이 인간 눈깔이 맛이 갔어!”

진짜였다. 지성준의 눈에 초점이 나갔다.

내가 흔들고 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잖아!

최지혁은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성준을 살폈다.

“제기랄, 도대체 왜 지금……!”

“형, 형, 나와봐요!”

지성준의 상태가 아무리 봐도 이상하자 준우가 다급하게 식탁 위로 올라가 지성준의 정수리를 오른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준우의 손바닥 밑에서 초록색 기운이 넘실거리는 듯싶더니, 파지직! 스파크 소리와 함께 준우가 뒤로 넘어갔다.

“강준우!”

“허억!”

“세상에, 준우야!”

다행히 최지혁이 넘어지는 준우를 받아 다치지는 않았으나 준우의 표정이 창백했다.

“……정신, 정신계 공격에 대한, 연구를, 몰래, 교수님이랑 진행해봤는데,”

준우가 덜덜덜 떨며 횡설수설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야, 강준우, 헛소리 말고 정신 차려. 강준우!”

최지혁은 준우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고, 준우는 여전히 정신없는 표정을 하고 내게 말했다.

“정신계 공격은 보통, 사념체를 불어넣어 이념을 지배하고 뉴런의 형성 체계에 영향을 끼쳐, 비과학적인 영적 존재와 맞닥뜨려…….”

준우가 계속 중얼거리자 최지혁이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야, 최지혁. 너 뭐 해!”

“기절.”

“돌았어!”

나는 최지혁의 뒷덜미를 잡고 준우에게서 떼어냈다.

환장하겠다.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지성준한테 저런 일이 생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꿰뚫어 봤어. 지성준 씨 머릿속 존재. 봤어. 내가 봤어, 유라야.”

“준우야, 일단 지성준은 둘째 치고 네 상태부터 살펴줄래? 괜찮은 거 맞니?”

내 물음에 준우는 덜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아. 나는, 나는 괜찮을걸? 아니야. 나는 괜찮아. 정신과 교수님이 말하기를, 이건 잠시 동안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강준우. 외계어 그만하고 입 다물어.”

“네, 형.”

준우는 최지혁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최지혁, 빨리 묘안 생각해 내. 빨리!”

“나, 뭐! 난 성좌 강림 이런 거 해본 적 없어서 모른다고!”

“아오, 그러니까 머리 굴려 보라고 하잖아!”

나는 급한 마음에 최지혁을 짤짤짤 흔들었고, 와중에 최지혁은 생각이라는 걸 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내놓는 답이 가관이었다.

“죽여?”

“……정신 나갔어?”

내 말에 최지혁이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저 자식이 죽었다 살아나면 끊어진다고 했잖아!”

“저 인간이 예수야? 죽었다 살아나게? 진지하게 생각 안 해? 이대로 놔둘 거야? S급 터진다는데!”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최지혁이 왁왁댔고 나는 시끄러운 최지혁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리고 지성준의 머리 위 시스템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지배 중이라는 시스템창을 치워버려야 했다.

여기서 만약에라도 지성준이 성좌에게 지배되면 우리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진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채유라, 너 뭐 하려고.”

그에 최지혁이 정색을 하며 내 손목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렸다.

나는 그런 최지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긴 뭘 해. 해결해야지! 내 핸드폰 말고 별수 있어? 방법을 찾아야 할 거 아니야.”

“성좌 강림을 어떻게 막게. 방법 없어! 부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나는 최지혁을 있는 힘껏 째려봤다.

“시도도 안 해보고 없긴 뭐가 없어!”

나는 핸드폰을 쥐고 식탁 위로 올라가 지성준의 머리 위를 손으로 훠이훠이 저었다.

그러자 이상한 빛무리가 살짝 흩어지긴 했으나 없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형체가 더 뚜렷해졌는데,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분명 지성준의 머리 위에 있는 것과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

“채유라, 뭐 하는데! 강준우 못 봤어? 이상한 일 생기기 전에 빨리 이리 오라고!”

최지혁이 내 허리를 붙잡고 번쩍 들어 올리더니 옴짝달싹도 못하게 나를 제 품에 꽉 안아버렸다.

그에 나는 발을 버둥거리며 말했다.

“최지혁, 너야말로 뭐 하는데!”

“괜히 가까이 갔다가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어떻게든 되겠지!”

힘은 더럽게 세다.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럼 그냥 저렇게 놔둬? 이 시국에 쟤 없으면 우리끼리 뭐 어쩌게!”

“꺼내면 되잖아! 꺼내면!”

결국 최지혁은 내 판단이 이성적이라고 느꼈는지 인벤토리에서 제 검 하나를 쑤욱 빼냈다.

“지금 저 인간 머리 위에, 빛으로 된 끈 같은 거 하나 있거든?”

“…….”

“나 저거 리온한테서도 봤어.”

나는 최지혁이 쥐고 있는 검을 빼앗아 와 내 손에 쥐고, 그 위에 최지혁의 손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고.”

“……고는 뭐가 고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