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45)

Chapter. 13

난리도 아니었다.

“X발, X됐어. X됐다고!”

지성준은 제 머리를 싸매고 TV 화면을 보며 성을 냈다.

나는 그런 지성준을 뒤로하고 미리 가져온 포도 주스를 쥐고 지성준이 꼭꼭 숨겨둔 꼬마 공주님에게 다가갔다.

“안녕! 네가 예서니?”

“…….”

“언니는 채유라야! 이거 먹을래? 포도 주스야. 너 포도 주스 좋아해?”

우리는 일단 급한 대로 지성준의 집으로 모였다.

아무래도 지성준과는 정보를 공유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주 조카 숨겨 놓는다고 보안장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웅.”

“언니가 빨대 꽂아줄까?”

“웅……!”

TV에서는 성좌계약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하지만 성좌계약 건은 1분 정도가 끝이었다.

왜냐면, 북한뿐만이 아닌 전 세계 각지에 S급 게이트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큰일이었다.

“최지혁. 도대체 쟤들은 왜 데리고 온 건데?”

지성준은 짜증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하고 최지혁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거기, 최지혁 여자친구. 넌 왜 거기 가 있어? 도예서 너 안 자?”

나는 지성준이 그러거나 말거나 예서를 번쩍 들어 올려서 한 바퀴 비잉 돌려주었다.

“꺄하하하하. 비행기다, 비행기!”

“예서 좋아?”

“웅웅, 언니. 포도 주스 짱 맛있어!”

지성준과는 달리 조카분께서는 아주 깜찍하구만.

“야, 최지혁 여자친구. 예서 그만 괴롭혀!”

나는 고개를 돌려 지성준을 쳐다보았다.

아니 근데 저 인간이 계속 여자친구, 여자친구.

“이봐요. 내 이름은 어디다 팔아먹었어요?”

내가 날카롭게 정색하며 말하자 지성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리고 나는 개의치 않고 예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삼촌 이제 쫓아오겠다. 큰일 났다. 도망갈까?”

“꺄아아아. 삼촌 무셔!”

예서는 내게 안긴 채로 소리를 왁왁 질러대며 꺄르르 웃었고, 나는 예서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그리고 예서의 손을 잡고 열심히 지성준을 피해 도망갔다.

음, 역시 오랜만에 어린이를 보니 엔돌핀이 솟는군.

“최지혁, 패스!”

“……!”

예서를 최지혁에게 넘기자 최지혁은 빳빳하게 굳은 채로 예서를 안아 들었다.

“비행기다, 비행기!”

최지혁은 그대로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한 채 빳빳하게 서 있었고, 지성준은 표정을 와락 구기며 최지혁에게서 예서를 빼앗아갔다.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예서에게 말했다.

“야, 도예서. 너 자!”

“잠 안 와.”

“양 100마리 세.”

“강아지 세면 안 돼?”

“강아지 세!”

“아싸! 삼촌 최고!”

지성준은 예서를 방에 겨우겨우 넣고 맥 빠진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뭘 봐. 애 재우는 거 처음 봐?”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 건지 지성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준우와 최지혁의 가운데 앉아서 중얼거렸다.

“아쉽다. 예서 귀여웠는데.”

“애랑 놀러 왔냐?”

지성준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지성준을 째려보며 말했다.

“이봐요. 도대체가 그 하와이 간 예의범절은 고칠 생각이 없는 거예요? 왜 자꾸 반말이지?”

“아오, 진짜 남녀가 쌍으로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냐고!”

최지혁은 짜증 난다는 얼굴로 지성준에게 말했다.

“회의하시겠다며.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지?”

“야. 나랑 해보자는 거냐?”

“해보든…….”

최지혁은 평소처럼 대꾸하려던 걸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대답하면 내게 한 소리 듣는다는 걸 드디어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쩔 건지나 말해.”

최지혁의 말에 지성준은 테이블에 유리 글라스를 턱! 얹어 놓고 시원한 보리차를 콸콸콸 따르며 말했다.

“북한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몰라. 아직 게이트 에너지 반응만 느껴지는 정도니까. 게다가 북한에만 S급 게이트가 오픈된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터졌어. 일본 때처럼 다른 나라에서 지원 오기는 글렀어.”

준우는 긴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에 나는 준우의 등을 토닥이면서 속삭여줬다.

“너무 긴장하지 마. 괜찮을 거야.”

“응…….”

최지혁은 대충 팔짱을 끼고 지성준을 보며 이야기했다.

“강준우, 지금부터 비밀 얘기 할 거니까 다른 데 떠벌리고 다니지 마.”

“예?”

최지혁의 말에 준우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개를 갸웃거렸고, 지성준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비밀 얘기 같은 소리 하네. 단어 선정 왜 그딴 식이냐? 유치원 하냐?”

“신경 꺼.”

“아니, 근데 이 자식이.”

지성준이 발끈하며 물통을 쾅! 내려놓았다.

아니, 저건 왜 자꾸 신경질이야. 본인이 대화하자고 끌고 왔으면서.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서 좀 굳은 얼굴을 하고 지성준을 쳐다봤다.

“…….”

그러자 지성준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당연히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놈을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유, 유라야.”

“왜.”

결국 준우가 내 옷자락을 잡고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나는 져 줄 생각 없었다.

인간이 좋게 좋게 대화하러 왔는데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생각 없었다.

싸우자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대화하고 협력하기로 했으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예우를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제 일반인도 아닌 인간이?

“뭘 보냐.”

“계속 그딴 식으로 나올 거예요?”

나는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지성준에게 물었다.

“우리 협력하러 왔거든요? 그런데 어느 누가, 협력하는 사람한테 태도가 그따위야?”

“유라야. 참아, 응?”

준우가 내 팔을 붙잡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말렸지만 나는 참을 생각 없었다.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묘하게, 최지혁이 지성준에게 반발하지 못하는 느낌이었으니까.

평소였다면 바로 스킬 날아가는데.

약점이라도 잡혔나?

“왜 자꾸 최지혁한테 시비 걸어요?”

“하! 하하하하!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쟤 지금 뭐래냐?”

지성준이 어이없다는 듯이 최지혁에게 손가락질하며 성을 냈다.

“저 새끼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내가 대가리에 총 맞았냐? 왜 친절하게 굴어야 하는데?”

그에 최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성준과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럼 너는?”

내 물음에 최지혁이 당황한 듯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왜. 어차피 말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채유라.”

“최지혁 회귀한 거. 준우 너도 대충 알고 있었지?”

내 말에 준우가 좀 당황한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어…… 회귀인 줄은 몰랐는데, 대충…… 뭐가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유라야. 근데 형 이제 타임머신도 타?”

“그거까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회귀 전에 최지혁이 꼴랑 네 뒤통수 쳐서 기분 나쁘게 한 거하고 네가 나 죽이려고 했던 거하고 같냐고요.”

“…….”

지성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입 닫고 있으니까 전에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져요?”

표정을 보니 당황한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다.

“때와 장소를 가려서 행동해요. 아무 데서나 시비 털지 말고. 나는 날 죽이려고 했던 인간한테 존대까지 해주는데 그딴 식으로 나오면 내 입장이 뭐가 돼요? 나도 똑같이 굴어줄까요?”

“…….”

“나도 한 꼬장 부리는데.”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최지혁. 거기 서 있지 말고 앉아.”

“……어? 어…….”

나는 최지혁을 내 옆자리에 앉히고 누그러진 어조로 지성준에게 말했다.

“그쪽도 앉죠? 우리 이제 딴소리 그만하고 똑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구요.”

***

준우는 예상대로 놀라긴 했지만 생각했던 만큼 많이 충격받지는 않았다.

“별로 숨기려고 안 하는 것 같았는데요? 맨날 유라랑 둘이서 대놓고 제 앞에서 다 들리게 속닥댔잖아요, 형.”

“…….”

최지혁이 곤란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건 지성준도 마찬가지였다.

“야, 넌…….”

지성준은 짜증 난다는 듯 최지혁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급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 눈치 볼 바에 나 같으면 빨리 사과하고 넘어가겠다.

물론 사과로 끝날 문제는 아니지만.

하여간 융통성 없는 인간이다.

“크흠. 아무튼, 내일 오전에는 DMZ 근처로 넘어가야 해.”

“한국에는 S급 게이트가 안 열리나요?”

준우의 말에 지성준이 대답해주었다.

“아직까지 감지되는 에너지 반응 없어. 위만 사수하면 돼.”

“……그럼 중국에 터진 게이트는 어떻게 해요?”

“그건 걔들이 알아서 해야지. 걔들까지 한국으로 넘어오면…….”

지성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표정이었다.

“제기랄, 1차 대공황 올 때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 오고 지랄이야.”

지성준은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머리를 마구 헝클였고, 초조한 얼굴로 제 조카가 잠들어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상황 달라졌고, 이제 회귀 전 정보는 필요 없어.”

최지혁의 말에 지성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필요 없긴 뭐가 필요 없는데?”

그리고는 손으로 제 앞에 있는 상태창을 쓱 치우고 속삭이듯 말했다.

“성좌 문제도 해결해야 할 거 아니야. 하, 제기랄. 너도 알잖아. 성좌들이 강림하면 어떻게 되는지. 2차 대붕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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