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45)

***

“미친놈아, 새벽에 왜 부르는데? 드디어 나랑 한판 뜨려고 작정했냐?”

최지혁은 껄렁한 자세로 그에게 다가오는 지성준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용건은 이미 말했는데 왜 딴소리지?”

“공직자를 새벽에 쳐 부르는 새끼가 어디 있어.”

“꼬우면 나오질 말든가.”

“……크흠! 그래서 뭐 대단한 얘기를 하시려고 공주님까지 재워두고 등장하셨대? 그것도 이렇게 몰래?”

최지혁은 지성준의 건방진 언행에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읊조렸다.

“말 똑바로 해라.”

그에 지성준은 전혀 개의치 않고 껄렁한 태도로 장난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왜, 귀신 숲에 같이 들어간 헌터들한테 들으니까 공주님이라 부르던데? 내가 걔들 관리 감독 중이라 잘 알잖냐.”

“…….”

“참, 방송은 봤냐? 네 공주님 살벌하던데? 아, 병실에 누워있어서 못 봤으려나.”

최지혁은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지성준이 빈정대는 게 열이 받았으나, 지금은 그가 지성준에게 부탁하는 처지이기에 최대한 참았다.

“와, 표정 봐라. 한마디 더 했다가는 너 나 죽이겠다?”

최지혁은 여태까지 던전을 돌아 모은 포인트로 겨우 구매한 아이템 하나를 던졌다.

‘피의 서약서.’

지성준은 최지혁이 내민 아이템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뭔데?”

“정보 공유.”

“야. 말 똑바로 안 하냐? 단어만 띡 말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짜증이 났다. 하필이면 같이 회귀한 게 지성준이라니. 차라리 홀로 회귀했으면 이렇게 전전긍긍할 일도 없었다.

“널 청장 자리에 앉힌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오, 그게 뭔 쌉소리냐.”

“…….”

“영웅 소리 신경도 안 쓰던 새끼가 체면 차릴 사람 바로 옆에 있으니까 권력이라도 갖고 싶은가 봐? 네가 청장 하고 싶어졌냐? 왜 시비야.”

지성준이 이를 악물고 도전하듯 최지혁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전 같았으면 싸움은 피했겠지만 지금은 그도 S급 초입에 들어간 상태라 승산이…….

최지혁은 빠르게 화를 갈무리했다.

싸우면 안 된다.

“그딴 쓸데없는 정치 놀이에 내가 왜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내가 네 자리 뺏을까 봐 쫄려?”

“하! 쫄려? 뭐? 쫄린다고? 헛소리하지 마. 네가 멋있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가 보지, 네 공주님한테. 솔직히 말해서 네가 왕자님 성격은 아니잖아?”

“…….”

“왜, 내가 틀려?”

최지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지성준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한 번만 더 채유라 얘기 꺼내기만 해 봐.”

“하하하하하! 미친 새끼. 공주님 소리에 부정은 안 하네. 정신 나갔냐?”

지성준이 그의 목을 틀어쥔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는 씩씩대며 말했다.

“본론이나 말해, 새끼야.”

최지혁은 당장이라도 이 빌어먹을 협력 관계를 발로 뻥 차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유라한테 진짜 뻥 차일까 봐 참았다.

그리고 진정에 진정을 거듭해서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회귀 전이랑 상황이 달라졌어.”

“…….”

“분명 아직 최초의 멸망이 터진 지 1년도 안 됐는데, 게이트 난이도랑 개수가 2년 차랑 비슷해졌다고.”

지성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이미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지성준도 요즘 바빠진 거고.

“네가 이 세계를 구원할 작정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필요할 텐데.”

“……네가 무슨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그걸 순순히 말할 것 같아?”

최지혁은 들고 있는 아이템을 지성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하나만 약속하면 전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도록 하지.”

“뭔 개수작인데?”

최지혁은 살벌한 얼굴로 지성준에게 말했다.

“우리가 왜 회귀했는지, 세상의 어디까지 보고 왔는지, 채유라한테 절대, 아무 얘기도 하지 마.”

“…….”

지성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최지혁을 향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 뭐냐.”

“어려운 거 아닐 텐데.”

그리고 한참 동안 빤히 최지혁을 쳐다보고 있다가 이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거 생각보다 더 미친놈 아니야?”

그리고는 표정을 싹 굳히고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최지혁에게 말했다.

“야, 네 연애놀음이나 도와주려고 내가 쓸모없는 할배들 개새끼 노릇 하는 줄 아냐?”

연애놀음?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연애는 개뿔, 유라가 몸에 손만 대도 벌벌벌 떠는 주제에 무슨 놀음.

최지혁은 결국 입이 펑 터져 버렸다.

“네가 그래서 여태까지 한 게 뭔데? S급 게이트 들어갔다 나온 것도 나고 굵직굵직한 게이트 다녀온 것도 난데 네가 그딴 소리 할 자격이나 있냐?”

“내가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냐? 내가 빠지면 윗대가리들이,”

“윗대가리 핑계 그만 대, 개새끼야. 그래서 너 내가 쓰러져 있을 때 뭐 했는데, 채유라 혼자……!”

“내가 네 여친까지 챙겨줘야 한다, 뭐 이 말이냐? 그럼 쳐 당하지를 말든가. 보란 듯이 당해놓고 왜 내 탓으로 돌려?”

지성준은 덩달아 열 받았다는 얼굴로 최지혁의 가슴팍을 밀치며 말했다.

“야, 네 공주님이 네 눈에는 무슨 얌전한 요정님으로 보이나 본데, 너 없을 때 네 공주님이 뭐 했는지 아냐? 나보고 기사 내리라고 협박하지를 않나, 여론전으로 나락에 떨어지고 싶지 않으면 뭐? 헛짓하지 말고 널 깨우는 데 전력을 다해라?”

최지혁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유라가 지성준을 협박이라도 했다 이 소리인가?

“끼리끼리 만난다더니 남녀가 쌍으로, 아오, 빡쳐! 너넨 내가 민원센터로 보이냐?”

지성준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최지혁에게 말했다.

“야, 됐어.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너 네 여친한테 뭐 숨기고 있나 본데, 로맨스 영화도 안 봤냐? 구라 까면 지옥행인 건 내가 아니라 너야.”

“할 건지 말 건지나 말해.”

“도대체 무슨 대단한 정보 공유를 하시려고.”

“말해.”

“……약 처먹었나. 왜 이렇게 저돌적이야?”

지성준은 코를 찡긋거리며 최지혁을 이리저리 살폈다.

“야, 너 의사가 별말 안 하냐?”

“닥치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아오! 하면 되잖아, 하면!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지랄이야, 지랄은.”

지성준이 최지혁이 내민 아이템을 들고 엄지를 씹었다.

그리고는 제 피를 아이템에 뚝 떨어트리고는 최지혁 쪽으로 홱, 던지며 말했다.

“그래서 공유할 게 뭔데?”

“성좌들의 정체. 그리고 차원 관리자.”

“…….”

***

나는 최지혁이 능동적인 인간인 줄로만 알았다.

왜냐면 여태까지 제 마음대로 행동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최지혁은 굉장한 수동적인 인간이었다.

왜냐고?

도무지 제 의견을 표출을 안 한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겨우겨우 원하는 걸 말한 결과가 ‘존댓말 시렁.’ 꼴랑 이게 다였다.

사실, 최지혁은 부득부득 본인이 회귀를 하여, 신체 나이가 24살이니 젊은이라고 계속 우겨왔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회귀 전 나이와 합산해야 맞는 것 같은데…….

또 따지고 보면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정신연령은 24살 그 언저리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모로 애매한 부분이 많아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존대가 그렇게 쉽사리 무 썰 듯 뚝딱 고쳐지지는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되게 서러워해서 겨우 말을 놨다.

“응.”

최지혁은 내가 그의 허리를 껴안자 그제야 움찔! 하면서 내게 붙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날 병원에서는 무슨 나더러 집에 보내준다느니 어쩐다느니 되게 믿음직스럽게 말해놓고는. 집에 오니까 돌도 아니고 이게 뭐야.

“아, 쫌! 도망가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니까?”

“…….”

사실, 최지혁이 내게 꼭 집에 보내주겠다고 결심하듯 다시 한번 말했을 때, 안타깝지만 나는 집에 돌아가는 걸 반쯤 포기했다.

이유는, 계속 던전에 들어간다고 해도 별로 뾰족한 수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또, 제일 중요한 건 이거였다.

최지혁은 던전 안에서 죽을 뻔했다. 어떻게 잘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무튼 죽을 뻔했다.

만약, 계속 내가 집에 돌아가는 방법을 찾고 싶다면…… S급 던전에 들어가는 건 필수였다.

일단 고위 헌터 계층과의 정보교류는 필수였고, 또 여태까지 얻은 정보들 또한 던전에서 나왔다.

성좌니, 차원관리자니, 멸망이니 뭐 이런 거 말이다.

정보를 더 얻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최지혁을 그런 S급 던전에 싸우라고 들여보내야 하는데, 상식적인 인간이면 그걸 어떻게 해.

사실, 엄마랑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

하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나 좋자고 최지혁을 어떻게 사지로 모냐고.

최지혁은, 비록 성격은 글러 먹었어도 귀신 숲 던전에서, 게이트가 닫힌 상황에도 날 구하겠다고 바로 달려온 사람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우트론에게 당해 온전하지도 않은 정신으로 날 지켜주겠다며 검을 빼 들었다.

게다가, 지금도.

제가 죽을 뻔했는데도, 어떻게든 집에 꼭 돌려보내주겠다고 말하는 인간한테.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집에 보내달라고 해.

집에 못 돌아간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고개만 까딱거리지 말구. 응? 나랑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

최지혁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떠날 사람으로 여겨져서 저러는 걸까?

“최지혁.”

“……응.”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

내 물음에 최지혁이 긍정이라도 하는 듯 나를 꽉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나는 최지혁의 뺨을 붙잡고 나를 똑바로 보게 했다.

“내가 불편해?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하라니까? 자꾸 내 말에 동의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내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겨우 어르고 달래니까 겨우겨우 내 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하는 말이 이거다.

“……네가 허락한 거야.”

도대체 자꾸 뭘 허락했다는 거야?

나는 대충 최지혁의 헛소리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니 곧바로 내 뺨에 입술이 닿았다.

코앞에는 부끄러워하는 최지혁의 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잘생겼다.

사람들은 이 얼굴을 왜 재수 없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순진해.

나는 마음껏 최지혁의 부드럽고 까만 머리칼을 헝클였다.

그리고 실실 웃었다.

최지혁은 전에도 말했다시피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뭐야. 뭐 대단한 거 할 줄 알았는데 시시하게.”

“…….”

내가 손가락으로 최지혁의 볼을 쿡 찌르자 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빳빳하게 얼 수밖에 없었다.

“왜 자꾸 건드리는데?”

최지혁은 조금 화난 얼굴로 잡아먹을 듯이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냥 최지혁을 향해 미소만 지었다.

몰라서 묻는 건지 궁금했다.

“참고 있는 거 안 보여?”

“왜 참는데?”

“…….”

“이상해, 최지혁.”

최지혁의 팔뚝에 돋은 핏줄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잘못하다가 잡고 있는 가죽 소파가 뜯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친절하게 이번에도 내가 먼저 다가가기로 했다.

나는 최지혁의 목을 꼭 끌어안고 몸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그냥 웃기만 했다.

“젠장…….”

드디어 최지혁의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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