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45)

아무튼 라탄은 효과적으로 소환되었다.

물론 아주 약간의 잡음은 있었지만.

라탄은 소환되기가 무섭게 망연자실한 얼굴로 혀를 콱! 깨물었다.

“…….”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해는 들어먹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탄의 혀는 아주 멀쩡했으니까 말이다.

최지혁은 미리 사 온 쇠사슬로 라탄을 아주 꽁꽁 묶었다.

그리고 특유의 사나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는 거 다 불어.”

“……아, 안 돼! 아아아아악!”

라탄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야. 조용히 해.”

아무래도 멸망할 게 뻔한 본인의 세계를 두고 내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좌절감이 동시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누군 쟤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내가 저런 놈 사정 고려해주게 생겼어?’

나는 혹시나 몰라서 최지혁의 셔츠를 내리며 그의 목을 쓱 훑었다. 괜히 목에 돋아나 있던 흉측한 비늘 생각이 나서 자꾸 확인해 보게 된다.

와중에 최지혁이 또 크게 움찔거리긴 했으나 이건 일상이었으므로 가볍게 무시했다.

“괜찮아?”

“……뭐가.”

“뭐긴 뭐야. 네 목!”

내 말에 최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늘 떨어진 지 한참 됐는데 그건 왜 또.”

“혹시 또 모르니까.”

긴장이 풀린 건지 어쩐 건지 최지혁이 내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쓱 쓸어 넘겼다.

그러다가 아차, 싶다는 듯 다시 근엄한 표정으로 라탄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내 머리카락은 또 꼭 쥐고 있었다.

머리끄덩이 잡아당기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가 싶었다.

아니, 손 놔두고 도대체 어딜 잡는 거야?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친절하게 내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최지혁의 손을 내 허리에 올려 주었다.

그러니 또 최지혁은 파닥거리며 놀라서 호다닥 내 허리에 올라온 손을 빼버렸다.

“뭔데?”

“뭐가.”

“이걸 거기 왜 가져다놔!”

최지혁은 제 손을 가리키며 내게 따지듯 물었다.

“싫어?”

“그건 아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거의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하려다가 말 돌리는 거 다 봤다.

“그리고 네 손이 이거예요?”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러니까, 이 자식 심문이 먼저라고!”

횡설수설 난리 났다. 나는 입을 쭉 내밀고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며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영 모르겠다는 눈치인 라탄을 쳐다보았다.

저놈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진짜 정보만 캐내고 돌려보낼 생각이다.

물어볼 것도 미리 써놨다.

“최지혁. 핸드폰.”

“……내 건 갑자기 왜.”

“네 핸드폰에다가 질문 목록 써놨는데.”

“그걸 왜 내 핸드폰에……?”

최지혁은 당황한 듯 제 핸드폰을 쥐고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방금도 너 혼자 심문한다고 떼쓰셨잖아요. 혹시 몰라서 미리 적어놨지.”

“……내가 언제 떼를 썼는데!”

“잔말 말고 빨리 내놔요.”

최지혁은 결국 내게 핸드폰을 쥐여주며 혼자 또 꽁해진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궁시렁거렸다.

“존대…….”

열이 확 받았다. 왜 이렇게 존대에 집착해?

“아오, 그걸 어떻게 한순간에 확 놔! 넌 그게 쉽게 되니?”

순간 화가 나서 확! 쏘아 붙였다가, 최지혁의 뚱한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얘는 반말이 디폴트지.

“일단 알았으니까 투정 그만 부려요.”

“내가 언제.”

“아오, 쫌!”

나는 대충 최지혁의 주둥이를 몇 번 때려주고 다시 심문에 집중했다.

“자, 이제 입 열어.”

내 명령에 라탄은 다시 새빨개진 눈으로 부들거리며 나를 향해 욕을 시전하려 했지만 곧 깔끔히 무산되었다.

놈이 딱, 입을 떼기가 무섭게 최지혁이 열 받은 얼굴로 놈의 목을 턱, 잡아버렸기 때문이다.

“어디서 함부로 혀를 놀려.”

나는 대충 진정하라는 의미로 최지혁의 뺨을 꼬집어 주며 말했다.

“…….”

“일단 1번. 도대체 던전에서 신수가 나는 왜 공격을 안 했고, 왜 너는 나를 꼬드기려고 했나?”

최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질문을 던지는 나를 보고 놈의 목을 틀어쥔 손을 느슨히 하며 헛바람을 내뱉었다.

뺨을 꼬집힌 게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놓고 또 얼굴이 시뻘게진 채 내게서 슬금슬금 멀어지길래 최지혁의 팔을 들고 내 어깨에 얹어 주었다.

“……신수가, 반응했다.”

라탄의 말에 최지혁이 열 받은 얼굴로 말했다.

“존대 안 해?”

누가 보면 깡패인 줄 알겠다. 하지만 저 자식이 최지혁의 말을 들을 의무는 없었기 때문에 귓등으로도 안 듣고 말을 이었다.

“널, 세계에 붙들어 놓는다면 기회가 올 거라고…….”

놈의 말에 최지혁이 부들대기 시작했다.

슬쩍 표정을 보니까 초점이 나갔다. 그때 상제를 죽이러 왔을 때랑 비슷한 얼굴이라 이대로라면 조금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최지혁의 볼에 쪽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음, 원상 복귀 됐군.

솔직히 말해서 최지혁을 놀려 먹는 건 좀 재밌었다.

반응이 아주 원하는 대로 휙휙 바뀌어.

“무슨 기회?”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기회.”

나는 최지혁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어봤다.

“뭔 소리예요? 나 멸망 막을 수 있어? 나 먼치킨이야?”

내 물음에 최지혁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네 성좌라면서.”

“……보통은 화신인 내가 아니라 성좌인 네가 알아야…….”

“우리가 보통 관계예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더 잘 알아야지.”

내가 톡 쏘아 말하자 최지혁이 마른세수를 열심히 하더니 시뻘게진 귓바퀴를 잡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나를 보고 있던 최지혁이 슥 고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라탄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들어갔던 게이트에서 유라를 탐냈던 것도 채유라가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라서인가?”

내 어깨에 얹어 놓은 최지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그걸 너한테 얘기할,”

“최지혁 말에 바른대로 대답해.”

내 명령에 라탄은 바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나도 모르지만 기회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신수가 말했다고 하지 않았나?”

“말 그딴 식으로,”

최지혁이 뭐라고 험한 말을 하려다가 멈칫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스윽 내 귀를 막고는 뭐라뭐라 왈왈댔다.

아마 욕인 것 같다. 라탄의 표정이 점점 아득해져 가기 시작했다.

최지혁은 협박이 다 끝났는지 내 귀에서 손을 떼고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라고. 채유라를 붙잡아서 어쩔 생각이었는데.”

화를 많이 참는 것처럼 보였다.

“……원래 계획은, 주인을, 유혹하여, 반려로 만든 후…….”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저번에 상제도 나더러 부인 어쩌고 하더니.

“최지혁. 표정 풀어요.”

“…….”

나는 일단 또 난리난리를 치려는 최지혁을 붙들어 놓은 후 질문 2를 읽었다.

“2번. 넌 왜 금제가 걸리다 말지? 리온은 특정 정보는 발설 못 하던데.”

내 말에 라탄이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금제를 건 주체가 누군지는 알고?”

“……멸망을 관리하는 자들이겠지요.”

설마 차원 관리자라는 그 존재인가?

계속 물으려던 나는 최지혁을 힐끔 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얘는 왜 아직도 라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담.

“저기요, 최지혁 씨? 우리 반려 주제에서는 벗어나야죠? 그만 노려봐요.”

최지혁은 그제야 주먹을 꽉 쥐고 물었다.

“그 차원 관리자인가 뭔가 하는 거 말이냐?”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팔뚝이 돌덩이가 됐다.

좀 신기해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다가 최지혁이 지금 뭐 하냐는 눈빛으로 나를 보길래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나는 다시 진지하고 근엄한 자세로 라탄을 노려보았다.

“……차원, 관리자?”

라탄은 차원 관리자라는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다.

아마 이 사실은 에르켈이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에르켈에게는 아직 물어볼 수 없었다.

금제 문제도 있었고, 에르켈이 아직 나에게 마음을 다 열지 않았으니까.

그냥 느껴졌다.

물론 나를 지키고 내 말을 잘 듣기는 하지만, 정말 동료처럼 끈끈한 관계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묘하게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물어보기 더 그랬다.

최지혁은 짜증 난다는 듯 제 앞을 가린 머리를 쓱 쓸어 올렸다.

“이 새끼 아는 게 뭐야?”

“아오, 좀 기다려 봐요.”

“…….”

나는 최지혁을 내 뒤로 보낸 후 3번 질문을 꺼냈다.

“헌터들은 왜 죽이다 만 거지? 왜 굳이 그 신수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던 건데?”

“……외부인들의…… 영혼을 아우트론에게 먹인 후, 코어를 사용해…… 게이트를 완전히 열려고 했습니다.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오, 침략할 계획이었다는 걸 완전 당당하게 말하네. 양심도 없다, 참.”

머리가 아팠다.

나는 최지혁의 팔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그럼 다른 던전도 다 그런 개념 아니에요? 게이트 터지면 다 이쪽으로 넘어오잖아요.”

내 말에 최지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 입술을 쳐다보았다.

“아니야?”

“…….”

왜 또 이런담. 내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최지혁도 똑같이 인상을 팍 구겼다.

“저기요, 최지혁 씨.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해요. 말을.”

내 말에 최지혁이 정곡을 찔린 듯 움찔거렸다.

“왜 또 최지혁 씨인데…….”

얼씨구? 내가 진짜 미치겠다. 얘가 왜 이런담.

“알았어. 알았어. 반말하면 될 거 아니야. 진짜 이상한 거에 꽂힌단 말이야.”

나는 최지혁의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다시 본론에 집중했다.

“자, 그럼 성좌에 대해서는 뭐 아는 거 없어?”

“……성좌?”

“네가 아는 건 뭐니?”

내 물음에 라탄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뿐.”

“자, 그럼 소원대로 네 세상으로 보내줄게. 안녕.”

나는 망설임 없이 계약 해지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파스스 소리와 함께 라탄이 눈을 꾹 감았고, 바닥에는 최지혁이 묶어 놓은 밧줄만 툭, 하고 떨어졌다.

“침략하러 온 주제에 말이 많아.”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최지혁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자.”

“…….”

최지혁의 표정이 이상했다.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또. 뭐.”

“……그냥 ……보냈어?”

“그럼 어떻게 보내야 하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최지혁을 살피니 팔에 소름이 돋아있었다.

뭐야, 뭔데?

“아무것도 아니야.”

최지혁이 뻘쭘하게 스윽 고개를 돌리며 시치미를 뗐다.

저 인간이 진짜 나랑 싸우자는 건가?

“당장 말 안 해?”

내가 쏘아붙이자 그제야 최지혁은 우물쭈물하며 겨우 말했다.

“네 성격대로라면 불쌍하다고 거둬줄 줄 알았…….”

“저 자식 때문에 네가 그 지경이 됐는데 거둬주긴 뭘 거둬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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