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108/145)

Chapter. 12

사실 최지혁은 아직까지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라가 그에게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도록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현실의 채유라가.

하지만 촉감이 너무 생생했다. 최지혁도 그의 상상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겨우겨우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차피, 이번 S급 던전은 예상과 달랐어. 그러니까, 회귀 전이랑 지금이랑 상황이 달라진 걸지도 몰라.’

최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된다면 후에 있을 S급 던전에서 소원 향로를 얻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만약에, 소원 향로를 얻지 못한다면 유라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그래도, 나는, 너 좋아하니까……나도 모르게…… 미안해요.”

손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진짜 거지 같은 발상이었다.

하지만, 유라가, 만약에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유라는, 정이 많으니까 그의 옆에 계속 있어줄지도 모른다.

그냥 계속 불쌍하게 굴면, 유라는…….

“와, 에어컨 틀어놨는데 최지혁 몸 엄청 뜨거워. 의사 선생님이 감기 절대 아니랬는데.”

유라는 아무래도 최지혁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좋아한다’로 퉁칠 감정이 아닌데 말이다.

정확히 최지혁은 유라가 필요했다.

뭐, 좋아하는 것도 맞긴 했다. 이성애적인 감정은 그냥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거고, 최지혁은 인간적으로 채유라를 필요로 했다.

왜냐면, 거의 그의 모든 결정적인 순간에 채유라가 있었으니까.

당연한 거였다.

회귀 전, 죽어가던 그를 살려 놓은 것도 채유라였고, 거지 같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도 그녀였다.

‘소원향로가 없으면 유라를 돌려보낼 수 없다.’

‘제기랄.’

최지혁은 계속해서 떠오르는 엿 같은 생각 탓에 이 황홀한 순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최지혁, 숨 막혀어.”

그날, 가족사진을 보며 애써 눈물을 참고 있던 유라를 보고 다짐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돌려보내 주자고.

아무리 그가 개새끼라고 해도, 유라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차피 시궁창인 그의 인생에서 유라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결국 최지혁의 인생은 시궁창이니 똑같았다.

하지만 유라는 아니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해서, 최지혁은 지금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유라가 집에 돌아가 버린다면 겨우 처음 느껴본 행복은 영영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버리는 것 아닌가?

유라는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

유라가 직접 말했다.

그를 좋아한다고.

물론 집에 가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젠장.’

엿 같았다. 나중에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유라가 울던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의 품에서 유라가 세상이 떠나가라 서럽게 울었다.

그때 분명 느끼지 않았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했던 그가 죄인이었고, 유라가 우는 이유가 최지혁 그였기 때문에, 그는 나쁜 놈이 되었다.

나가 죽어야만 했다.

왜냐고? 유라가 울었으니까.

물론 유라가 입을 맞추고 그 잡스러운 생각이 잊히긴 했지만.

“하아, 유라야.”

유라의 입술을 문채로 그냥 유라의 이름만 불러 보았다.

그러자 따뜻한 손이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미칠 것 같았다. 여러 개의 자아가 서로 충돌하는 기분이었다.

유라가 영원히 그를 안아주었으면 싶기도 하고, 여기서 우울하게 지낼 바에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싶기도 했다.

“최지혁. 내가 집에 가는 게 싫어요?”

그때였다. 유라가 열심히 비비적거리던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 조심스럽게 물었다.

“몰라.”

최지혁은 나름 솔직하게 대답했다.

진짜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 유라는 단순하게 지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그러면, 천천히 생각해 볼래요.”

유라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켜져 있던 TV 화면에서는 또 게이트가 터졌다는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순간 누가 얼굴에 찬물을 확 끼얹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죽어나가는 민간인들, 무너진 세계.

몇 남지 않은 헌터 조직들.

그리고 피부로 느껴지는 멸망, 멸망, 멸망.

-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게이트로 인해 피해가 막심한 상태입니다. 현재 정부에서는…….”

최지혁은 방금까지 그가 한 고민들을 깔끔하게 지워버렸다.

여태까지 혼란스러워 한 그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잠깐 미쳤던 게 틀림없었다.

“최지혁?”

유라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여태까지 도대체 왜 이딴 걸로 고민하고 망설였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의 세상은 멸망한다.

유라가 얼마나 특별하건 말건 상관없었다.

분명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스스로가 쓰레기같이 느껴졌다.

멸망하는 세상에서 유라를 빼내지는 못할망정 뭐? 같이 있어달라고?

‘제기랄.’

회귀 한 지 고작 몇 개월 지났다고.

유라가 그의 온 신경을 다 빼앗아 가서 전혀 자각하고 있지 못했다.

유라를 이곳에서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절로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보내야 했다.

안전한 세상으로, 원래 세상으로.

“괜찮아.”

최지혁은 있는 힘껏 유라를 껴안았다.

“채유라. 그딴 고민 하지 말고. 집에 어떻게 갈지만 생각해.”

유라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라는 다정하니까 분명 그의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다.

“그래도.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데…….”

“아니야. 너 집에 가.”

“…….”

최지혁은 유라의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분명, 유라를 돌려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떨고 있는 그 자신이 싫었다.

“네가,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해도, 내가 찾을 거야.”

그리고 더 바짝 유라를 끌어안았다.

“안전한 네 세계로 가. 그런데,”

울고 싶어졌다. 그래서 멋없게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전까지는, 나랑 있어.”

그리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네가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지?’

***

사실 최지혁과 입을 맞췄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주변 반응도 그냥 그럴 줄 알았다는 뉘앙스였다.

심지어 최지혁도 별로 달라지는 게 없었다.

오히려 더 내 눈치를 봤다.

손도 내가 먼저 잡아야 잡고, 껴안는 것조차 내가 슬금슬금 옆으로 가서 제 가슴팍에 얼굴을 박아야 진짜 겨우겨우 날 껴안는다.

진짜 웃긴 건, 또 막상 안아주고 뽀뽀해주면 거절은 절대 안 한다.

원래 연애가 다 이런 건가?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여자는 이영 변호사님밖에 없는데 회사 사람한테 개인적인 연애사를 묻는 건 좀…….

“그 새끼 심문 내가 해. 넌 들어오지 마.”

최지혁이 내게 말했다.

그에 옆에 있던 리온과 에르켈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최지혁에게 말했다.

“지혁지혁. 그 새끼, 마스터가 포섭했다. 네가 뭔 권리로 들어오라 마라 해?”

리온은 헹!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혁지혁 네가 마스터 개빡친 걸 못 봐서 모르는데 장난 아니다.”

리온의 말에 최지혁은 저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최지혁에게 슬쩍 팔짱을 꼈다.

“나도 갈래.”

그리고 최지혁은 또 딱딱하게 굳은 채로 어색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또 손은 마주 잡는다.

“어휴, 저러다 만리장성은 언제 쌓으려고 그러냐. 어휴어휴.”

“……닥쳐.”

사실 나는 리온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긴 하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내가 틀린 말 했냐?”

오랜만에 리온이 최지혁의 쿠션 공격을 받았다.

음, 나쁘지 않았다. 진짜 건강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악! 마스터는 뭔데 뿌듯한 얼굴로 구경하냐!”

“맞을 만했다, 악마.”

“아니, 왜 아무도 내 편을 안 들어주는데에에엑!”

나는 고통받는 리온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자. 알았으니 리온, 에르켈, 들어가 봐.”

“마슽,”

리온은 할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로 에르켈과 뿅 사라졌다.

그리고 최지혁은 여전히 얼어있었다.

도대체 키스는 어떻게 한 거야?

나는 입술을 댓 발 내밀고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

최지혁은 제가 뭔가 잘못했나 고민해보는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로 내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 나는 최지혁의 턱을 잡고 나를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최지혁.”

“……싫어. 그 위험한 새끼 심문을 왜 너랑 같이 해.”

“나 이미 심문했는데. 그래서 보스 피도 반 통이나 까고, 너 어떻게 깨우는지도 물어봤는데.”

“…….”

최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마 반박할 적당한 문장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5초 정도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적절한 문장을 찾지 못한 거고.

“너무 과보호하는 거 아니에요?”

최지혁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최지혁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최지혁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참지 말고 해요. 뭘 입술만 씰룩이고 있어.”

내 말에 최지혁이 손을 내 허리에 아주 살포시 얹고 열심히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또 내 눈치를 보며 개미 똥구멍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존댓말 안 하면 안 돼?”

“…….”

도대체 이 대화의 맥락에서 저 주제가 갑자기 왜 튀어나오나 싶었다.

“……왜 나한테만 거리 두는데.”

“음……. 도대체 그게 왜 거리를 두는 게 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최지혁의 심리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네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어차피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잖아.”

“어우, 양심도 없다. 회귀하니까 있던 나이 다 까먹고 아주 좋겠어요?”

최지혁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왜냐면 나는 맞는 말을 했으니까!

“알았으니까 표정 좀 풀어요. 왜, 말 놓는 거 말고 오빠라고도 불러줄까? 응? 오빠?”

나는 최지혁의 옆에서 열심히 까불었고, 순식간에 그의 몸이 뜨끈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와, 큰일 났다. 얘를 어쩜 좋지.

“와. 오빠 소리 두 번 했다가는 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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