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6/145)

“나는 3일 만에 일어났는데 넌 왜 19일이나 걸리는데! 19일도 아니야, 19일 하고도 반나절이라고!”

최지혁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지금 서러웠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뭐? 10분? 빨리빨리 일어나서 괜찮다고 해줬어야지. 내가, 나는, 진짜.”

매우매우 서러웠다. 최지혁이 일어나서 다행이긴 한데, 억울하고, 그냥 울고 싶었다.

“넌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 없어, 이 나쁜 놈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동도 없고! 내 이름은 왜 그렇게 또 다정하게 부르는데?”

최지혁은 나를 껴안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설마 또 기절한 건 아니겠지?

“아, 진짜 엄마, 으어어어엉.”

“……채유라?”

아닌 것 같다. 나는 그냥 최지혁에게 올라탄 채로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엉엉 울었다.

엄마 보고 싶다.

“네가, 흑, 세상에서 제일 나빴어.”

그리고 최지혁을 꽉 껴안았다. 진짜 나쁜 놈이다. 세상에서 제일 나빴다.

잘못은 안 했지만 일단 지금은 그랬다.

최지혁이 제일 나쁜 놈이었다.

“진짜 제일 미워.”

최지혁은 내가 목 놓아 엉엉 울자 진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겨우겨우 내 뒤통수에 제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더 서럽다.

“이제 안 아픈 거 맞지? 응? 최지혁. 괜찮은 거지?”

내가 울먹이며 최지혁에게 물었다. 그러자 최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꿈 아니야?”

환장하겠다.

“아니야, 이 바보야!”

“…….”

최지혁은 충격 먹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곧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듯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뭘 이제 와서 그걸 걱정하나 싶었다.

이미 최지혁 뇌 속에 뭐가 들었는지 다 봤다.

도대체 뭔 꿈을 꿨던 거야? 속이 아주 시커메가지고.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최지혁의 어깨를 마구 내려쳤다.

어차피 이제 S급 초입이라고 병원에서 그랬다.

내 주먹 따위 아프지도 않을 거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야, 이 나쁜 놈아! 흐어어엉.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진짜 나쁜 놈아.”

“……유라야. 채유라, 그러니까 나는.”

“변명 같은 거 하지 말고 이제부터 안 다친다고 해.”

“…….”

최지혁이 답이 없어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소매로 내 눈물을 쓱쓱 닦았다. 그리고 최지혁을 다시 똑바로 봤다.

침묵이 살짝 길어지자 방금 깨어난 사람을 상대로 내가 뭘 한 건지 슬슬 자각되지 시작했다.

내가 미쳤나 보다.

“……나 싫어하지 마.”

하지만 또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는 최지혁에 이성의 끈이 다시 한번 팅! 끊어졌다.

“내가 미안해.”

최지혁은 눈가가 시뻘게진 채로 덜덜덜 떨며 말했다.

겁먹은 눈치였다.

정작 아픈 건 최지혁인데, 그런 최지혁을 보니 심장이 펄펄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쟤는, 정말. 사람이, 이상해.

“내가, 그냥, 미안해.”

그래서 앞뒤 생각 안 하고 그냥 질러 버렸다.

그냥, 확신하고 싶었다. 내 감정에 대해서.

사실 확신은 개뿔.

핑계였다.

나도 몰라. 나는 지금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다짜고짜 최지혁의 입에 내 입술을 살짝 가져다 댔다가 금방 떼 버렸다.

그리고 최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

“…….”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때였다.

순식간에 최지혁이 내 허리를 잡고 그대로 제 배에 밀착시켰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링거 줄이 움직였고, 최지혁은 내 뒤통수를 움켜쥐고 며칠 굶주린 사람처럼 입술을 집어삼켜 버렸다.

정신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그냥 울고 싶어졌다.

뜨거운 숨이 그대로 느껴졌다.

무슨 느낌이었는지 묘사하기가 애매했다.

그냥 계속 이러고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최지혁이 좋았다.

아마, 최지혁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그랬는지도 몰랐다.

나는 원래 게임이나, 창작물 같은 것에 싫증을 잘 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지혁이 나타나고 나서 나는 주변 사람들도 나서서 말릴 정도로 최지혁에게 몰두했다.

게다가 최지혁의 세계를 이해해 보겠다고 생전 처음으로 판타지 웹소설을 찾아 읽었다. 내가 좋아하던 로맨스 장르도 아닌데 자료 조사하겠다고 20작품이나 완독한 거다.

또,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엄마 몰래 최지혁한테 후원하겠다고.

진짜 미친 거였다.

“…….”

달그락, 달그락.

최지혁이 커다란 몸을 뒤척일 때마다 작은 소음들이 조용한 병실 안을 울렸다.

명치가 꽉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최지혁은 내 뺨을 잡고 나를 거의 병실 침대에 눕히다시피 밀어붙였다.

그리고 나는 그냥 눈을 감고 최지혁의 손을 꼭 잡았다.

20살 때부터 최지혁을 알았으니까 지금까지 따지면 거의 4년 하고도 반이었다.

발끝이 오므라들고, 배 아래쪽에 나비 같은 게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아, 유라야…….”

최지혁은 내 목에 제 입술을 찍어 누르며 계속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손을 파들파들 떨며 내 얼굴을 찬찬히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감이 안 오는 것 같았다.

뭐, 꿈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최지혁이 깨어난 데 의의를 두고 싶었다.

최지혁은 무사하다. 다른 사람처럼 죽지도 않았고, 보스에게 당한 헌터들 중 처음으로 정신을 회복한 사람일 거다.

그래서 그런지 그냥, 갑자기 조금 대견해졌다.

원래 최지혁은 정신계 공격에 너무 취약해서 내가 화면 밖에서 미친 듯이 깨워 줬었는데.

이번에는 혼자서도 잘 일어났다.

나는 최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욕한 거 사과할게요.”

최지혁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자 목젖이 꿀렁이는 게 보였다.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나는 계속 최지혁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며 이야기해줬다.

“혼자서 잘 일어났어. 잘했어요.”

그러자 절대 안 울 것 같은 최지혁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최지혁은 쪽팔린다는 듯이 제 눈을 벅벅 문질렀고, 나는 급하게 최지혁의 팔을 잡고 말했다.

“눈 빨개졌잖아. 힘은 또 무식하게 세요.”

“…….”

최지혁이 내게 손을 붙들린 채로 어깨를 잘게 떨었다.

최지혁은 울먹거리며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꾹꾹 참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냥 기다려 주었다.

최지혁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그냥 내 입술 근처에 다시 한번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내 눈치를 봤다.

최지혁은 내 표정을 살피며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다시 내 입술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제야 겨우 한마디 했다.

“한 번만……. 더 해도 돼?”

이미 했으면서 왜 이제야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나는 최지혁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조금 몽롱해진 기분으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최지혁.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

“나 왜 좋아해요?”

내 물음에 최지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널 안 좋아하는 게 더 이상…….”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큰일 났다. 쟤 바보 된 거 아니겠지?

나는 진짜 진지하게 최지혁의 뺨을 붙잡고 놈의 안색을 살폈다.

외관상으로는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대놓고 정색을 하며 최지혁에게 물었다.

“그럼 나랑 키스는 왜 했는데, 최지혁.”

“……아. 제기랄.”

최지혁이 망했다는 얼굴로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곧 최지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슬슬 상황 파악이 되는 모양이었다.

좀 귀여웠다.

등치는 산만 해 가지고.

“나 좋아하는 거 맞죠?”

내가 최지혁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하니 최지혁이 파다닥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이불을 대충 끌어당겨 제 하체를 가렸다.

왜 저래?

“……의사 선생님 부를까요?”

내 걱정이 가득 담긴 말에 최지혁이 소리를 빽 지르며 말했다.

“안 돼!”

“…….”

“됐어. 그냥 있어.”

그리고는 나를 다시 꽉 끌어안았다.

자세가 뭔가 괴상했지만 일단 안긴 안았다.

되게 엉거주춤하게 안았다.

그리고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최지혁.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오늘 회사 사람들 병문안 온대요. 그 전에 정신 들어서 너무 다행이다.”

나는 대충 최지혁의 머리칼을 정리시켜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갔다 오면서 의사 선생님 불러올 테니까 10분만 기다리고 있어요. 알았지?”

최지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만 했고, 그런 최지혁이 괜히 귀여워서 볼에 살짝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니까 죽으려고 했다.

음, 뭔가 반응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최지혁, 대답.”

“응.”

***

최지혁은 거의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다 정상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형!”

준우는 냅다 최지혁에게 안겼다. 최지혁은 더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준우에게 말했다.

“강준우. 좋은 말로 할 때 꺼져라.”

“아, 왜요! 형 걱정 진짜 많이 했는데, 일어나서, 흐어어어엉.”

최지혁은 기어코 울음이 터진 준우를 대충 토닥여주며 뭔가 오버랩이 됐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안 뒤져.”

“뒤질 뻔했잖아요!”

“안 뒤졌잖아.”

“그래도!”

나는 준우가 울게 놔뒀다. 나도 겁나 울었으니까 쟤도 겁나 울 거다, 아마. 거의 오열이다, 오열.

도경 아저씨는 소식을 듣고 병실에 오자마자 같이 온 아주머니와 함께 정말 다행이라며 최지혁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고, 진짜 내가 이제 와서 말하지만 최 헌터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

“……감사합니다.”

도경 아저씨는 최지혁의 대답에 딱딱하게 굳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놀란 듯이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세상에, 유라 양. 지혁 군 머리 또 다쳤나? 감사? 내가 뭐 잘못 들었나?”

“철들었나 봐요.”

“아이고, 다행이네, 다행이야.”

최지혁은 쏟아지는 병문안에 거의 정신을 못 차렸다.

이영 변호사님은 최지혁과 별로 안 친했기 때문에 예의상 최지혁에게 일어나서 다행이라 해 주고 내게는 진심으로 너무 다행이라고 해주셨다.

사실 최지혁이 쓰러져 있는 동안 이영 변호사님이 도움이 많이 되어 주셨다.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걱정도 되게 많이 해 주셨다.

내 걱정 말이다.

사실 몰랐는데, 이영 변호사님도 내 또래 여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강남 사태 때…….

나는 대충 웃으며 정말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지혁지혁 너 때문에 마스터 탈진하는 줄 알았다!”

“악마, 과장이 심하다.”

“이게 무슨 과장이냐, 천사!”

“주군은 밥 잘 먹었다.”

“밥이랑 탈진이랑은 다르지!”

순식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최지혁은 그냥 허탈하게 몇 번 웃다가 이내 뒷목을 잡고 쓰러지며 말했다.

“아, 머리.”

나는 저게 꾀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면 최지혁의 연기는 정말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크흠, 자, 축하 파티는 나중에 하고, 형 쉬어요. 저희 나가 볼게요.”

준우는 의대생의 본분을 잊지 않고 환자가 정신적인 안정을 취하도록 주변을 정리했고, 나도 최지혁더러 쉬라고 준우와 함께 나가려고 했다.

음, 적어도 최지혁이 앞에서 대놓고 내 옷자락만 안 잡았으면 오늘 하루는 조금 조용하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넌 어디 가는데.”

도경 아저씨 부인분이 입을 가리며 나지막이 한마디 뱉으셨다.

“……어머나.”

좀, 망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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