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뾰족하고, 피부가 파란 색인 것 빼고는 완전히 인간의 모양새이다.
아, 손톱도 우리보다 훨씬 날카로운 것 같긴 했다.
“으으으…….”
청아한 목소리였다. 놈은 정신을 차렸는지 비틀거리면서 애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대충 최지혁과 비슷해 보였다.
“당신은…….”
남자인 것 같았다. 남자는 제 흰 머리칼을 쓱 쓸어올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마에는 아주 조그만 산호처럼 생긴 뿔이 하나 돋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미려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던전 안에서 만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 경계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저번 귀신 숲에서 봤던 인간들도 내가 명계로 빨려 들어가니까 금방 배신하고 등 돌리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단 조금 친절한 억양으로 물었다.
“왜 여기 쓰러져 계시죠?”
“죄송, 죄송하지만, 물 좀…….”
남자는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게 간절하게 말했다.
그에 최지혁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제 인벤토리에 있는 물병을 던져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조금 위압적인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일종의 경고 같았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말라는.
“아, 감사합니다.”
남자는 우리가 내민 물을 황급하게 마시며 입가를 손등으로 쓱 닦았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혹시 이쪽은 의원인가요……?”
나는 남자의 질문을 대충 넘겼다.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정신 차려서 다행이에요.”
“아……. 이런, 생명의 은인분들께 소개가 늦었습니다.”
남자는 황급하게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곧이어 은은한 빛이 남자의 피부에 감돌았고, 남자는 화사하게 웃으며 한쪽 다리를 굽혀 공주님에게 입 맞추는 기사처럼 내 손을 잡고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생명의 은인을 뵙습니다. 저는 트레탄의 황태자이자, 신수의 탑의 마지막 관리인, 라탄이라 합니다.”
최지혁은 황급하게 놈에게 잡힌 내 손을 빼내고는 제 옷에 슥슥 닦았다.
그리고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최지혁의 말에 본인을 라탄이라 소개한 남자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신수의 탑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성한 도시에서 낯선 그대들이 제 목숨을 구했으니. 저로서는 이 모든 것이 신수의 안배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이군요.”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수?”
내 물음에 라탄은 너무 친절하게,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신수 아우트론을 모시는 탑입니다.”
“잠깐, 아우트론은 지금 저 밖의…….”
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고, 그에 라탄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지금의 신수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행성에 드리운 멸망을 막기 위해 에너지를 과도하게 쓴 까닭이죠.”
최지혁은 재빠르게 나와 준우를 제 뒤로 보냈다.
뭔가 느낌이 요상했다. 라탄은 시종일관 나를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최지혁도 있고, 준우도 있는데 오로지 내게만 말을 걸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택받으신 분들.”
그때였다. 라탄의 황금색 눈동자가 흘끗, 공중에 떠 있는 카메라를 보았다.
곧, 날카로운 시선이 에르켈과 리온에게도 향했다.
“특이하신 분들이군요. 하하.”
찝찝했다. 매우 찝찝했다.
- ‘최지혁, 준우야.’
- ‘마스터, 불안하게 지혁지혁은 왜 부르냐.’
- ‘주군이 말하지 않나. 닥쳐라, 악마.’
- ‘…….’
그냥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번 귀신 숲에서 빌어먹을 신인지 뭔지가 내게 관심을 표하며 들러붙으려던 게 영 강렬한 기억이었나 보다.
- ‘반박하지 말고 들어. 나는 애 셋 있는 유부녀고 둘 중에 아무나 내 남편 역할 좀 해봐.’
- ‘…….’
준우가 강하게 최지혁의 등을 내 쪽으로 밀쳤다.
아, 최지혁은 좀 곤란한데.
에라이,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만약의 만약을 위해서 유부녀 코스프레가 필요할 것 같았다.
저 샛노란 눈깔에서 명백히 흑심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트레탄의 황태자이자 이곳의 마지막 관리자라고 했다.
나는 일단 최지혁의 팔에 팔짱을 꼈다.
- ‘최지혁. 얼타지 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굴어요. 쟤 지금 나한테 뭐 있는 것 같으니까.’
실제로 내가 최지혁의 팔에 팔짱을 끼기가 무섭게 놈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 ‘유라야, 설마 또 네가 목표인 건 아니지?’
- ‘모르겠어. 일단 지켜봐야 알겠지만, 너도 조심해.’
- ‘응,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을게.’
우리가 경계하는 게 티가 났나 보다. 라탄은 최대한 젠틀한 척 우리에게 말했다.
“선택받으신 분들께서는 이미 바다 위의 인간들과 비정상적인 신수를 보셨겠지요? 그렇기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인트로니아를 깨우고 이곳까지 찾아오신 거 아니겠습니까?”
인트로니아? 설마 그 고래 말하는 건가?
“저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라탄은 슬프다는 듯이 축 처진 눈으로 내게 말했다.
“이해합니다. 보다시피 바깥의 신수와 저주받은 인간들은…… 꽤나 보기 흉측한 장면이죠.”
그리고는 우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바깥의 선원들은 비록 저주받은 몸이지만, 이 세계의 영웅입니다. 그들의 영혼으로 이 세계가 겨우 버티고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놈은 애도하듯이 왼손을 가슴에 얹고 눈을 잠시 감았다 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신수의 꿈을 통해 보았습니다. 우리 행성에 도래한 구원자들을 말이죠.”
라탄이 다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최지혁은 곧장 내 허리에 손을 얹고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잠깐, 당신 정체부터 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겠어요? 밖에 있던 괴물로 변한 선원들이랑 당신 외관은 좀 다르게 생긴 것 같은데.”
준우가 물었다. 그에 라탄은 표정을 싹 지우고 묵묵히 준우를 쳐다보았다.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꼭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봤다는 뉘앙스 같았다.
나는 빠르게 준우의 손목을 끌고 내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대신 이야기했다.
“다짜고짜 구원자라니요? 당신,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나요?”
내 물음에 라탄은 금방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계에서 온 구원자분들 아닙니까. 물론 수많은 구원자분들 중 몇몇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성물을 탐내다 신수의 기운에 노출된 것 같지만요.”
“신수의 기운에 노출됐다는 게 무슨 소린데요.”
라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우트론은 세상의 희생, 선의, 절망, 사랑을 에너지로 삼는 신수입니다.”
나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명백하게 전혀 서로 어우러지지 않는 단어였다.
“희생은 또 다른 에너지를 낳고, 그 에너지로 이 세계의 생명체들이 살아가죠.”
“뭔 개소리야. 똑바로 설명해.”
최지혁이 말했다.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내뱉는 라탄에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아우트론은 이 세계에 남은 최후의 신수입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안쪽으로 들어가 저희들끼리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구원자님.”
라탄이 사르르 웃으며 내게 물었고, 나는 준우와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아, 물론 안으로 가는 길이 조금 험난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곳보다는 나을 겁니다. 슬슬 에너지 방출 대기시간이 다 찼으니까요.”
라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구 쪽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런, 시작되었군요.”
그리고 굵은 레이저 빔 같은 것이 쇠창살처럼 거세게 바닥을 찍었다.
치이익! 물기가 타 들어가는 소리가 텅 빈 도시를 울렸고, 라탄은 조금 초조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에너지에 휘말릴 겁니다. 코어로 이동하시죠.”
일단 뛰었다. 휩쓸리면 진짜 죽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 ‘유라야, 저거 믿어도 되는 거야?’
- ‘아니! 찝찝해! 완전 찝찝해!’
- ‘그럼 어떡해! 따라가야 하는 거야?’
준우의 물음에 최지혁이 대답했다.
- ‘안 따라가면 어쩔 건데. 뭐 방법 있어? 제기랄. 난 빌어먹을 레이저 빔 못 막아.’
***
꼭 고대 유적 같았다.
작동 안 한 지 오래된 기계 같은 것들이 주변에 늘어져 있었고, 이 넓은 곳에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조심하세요. 아우트론의 에너지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크.”
라탄이 고개를 숙였고, 라탄의 머리 위로 총탄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아, 희생자의 비늘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제기랄, 그걸 어떻게 신경 안 써!”
“오우오우, 그래. 지혁지혁,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리온이 발끈하는 최지혁에게 박수를 보냈고, 최지혁은 최대한 참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나름 차분하게 물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네 목적이나 말해. 우리를 그 빌어먹을 코어로 끌고 가서 어떻게 하려고?”
“……아.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저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남겨진 트레탄의 최후의 관리인입니다.”
라탄은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손을 짚더니 무언가 줄 같은 걸 끄집어 올렸다.
“나름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단 말이죠?”
“기이이이이이익-!”
그러자 해초 밑으로 우렁이처럼 매달려 있는 짐볼만 한 생명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런데 개수작이라니요.”
뭔가 잘못 건드린 느낌이었다.
매우, 매우 불길했다.
“그래도, 통찰력은 좋네요.”
라탄은 기지개를 펴며 활짝 웃었다.
“코어입니다.”
순식간이었다.
라탄이 바닥에서 꺼낸 해초가 나를 제외한 전원의 사지를 묶어 버렸다.
“구경은 여기서 끝이에요.”
그리고 허공에 있는 카메라 또한, 놈의 손에 처참하게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