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45)

웬만해서는 이런 감정 안 느꼈는데.

우울하다.

밥도 원래 한 공기 다 먹는데 남겼다.

진짜 심각했다.

“유라야. 혹시 어디 아파?”

준우가 물었다. 그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주며 고개를 저었다.

최지혁은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최지혁을…….

그래. 좋아한다. 좋아는 하는데 연애감정은 아니고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좋아한다.

연예인 좋아하듯이 말이다!

최지혁은 4년간 내 아이돌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진짜?”

“응, 안 아파.”

나는 내 우울함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다.

의외로 결론은 쉽게 나왔다.

여태까지 나는 현실도피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니 답이 나왔다.

상식적으로 나는 지금 내 세계에서 6개월 동안이나 떨어져 있었고, 비정상적으로 괜찮은 척 굴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 싱숭생숭한 감정의 원인은 다름 아닌 최지혁이었다.

최지혁을 향한 내 미묘한 감정이 갑자기 현실에 물을 끼얹었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 저녁 나도 모르게 핸드폰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고 말았다.

원래 어차피 보면 계속 우울할 거 뻔하니까 절대 안 보려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이 싱숭생숭하니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게 가족들 얼굴이라 정말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게 한번 보니까 계속 보게 된다.

자취할 때는 몰랐는데,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진짜…….

아무튼 어제 사진만 한참 보다가 결국 잠도 못 잤다.

“고기를 못 먹어서 그래…….”

“응? 어제 치킨 먹지 않았어?”

준우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닭은 새잖아…….”

그래. 닭은 새다.

네발짐승이 아니다.

맞다.

이게 다 고기를 못 먹어서 이렇게 우울한 거다.

다른 이유는 없는 셈 치자. 다시 잊기 위해 열심히 고기 생각을 했다.

“나 먼저 집에 갈게. 오늘 스케줄 없지?”

“어어어어! 잠깐! 유라 양. 그 공고 올린 거 면접이 내일인데, 확인 안 해도 돼? 내 마음대로 뽑아?”

도경 아저씨가 축 처진 나를 급하게 잡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네…….”

그냥 집에서 한 일주일만 쉬다 보면 정상으로 돌아오겠거니 싶었다.

어차피 일본 S급 던전까지 3주 남았으니까……. 좀 쉬어도 되겠지?

나는 축 처진 채로 최지혁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최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아, 안 돼.

처져 있으면 안 된다.

최지혁도 눈치가 있다.

아마 내가 계속 이러면 제가 또 뭐 잘못했나 지레 겁먹고 스트레스 받겠지?

“최지혁. 집 안 가요? 나 피곤한데.”

내 말에 최지혁은 급하게 일어나서 차키를 챙겼다.

그리고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열었다.

뭐야.

본인이 내 경호원이야, 뭐야.

나는 입술을 씰룩이며 최대한 밝게 인사했다.

“그럼 내일 봬요!”

그리고 최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이야기했다.

“우리 밥 먹고 들어갈까요?”

“……뭐 먹고 싶은데.”

큰일 났다.

최지혁의 분위기도 눈에 띄게 다운되어 있었다.

하루 말 안 걸었다고 저러기 있어?

마음이 매우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음……음……. 오늘은 삼겹살?”

“……삼겹살인데 나랑 둘이?”

최지혁이 조금 당황한 듯 내게 물었다.

“응? 그게 왜요?”

“…….”

그리고 아차 싶었다. 아, 요즘 들어 삼겹살은 회사 사람들이랑 주로 먹긴 했다.

“그럼 집에서 먹을까요? 나는 정육점 삼겹살도 좋은데!”

내 말에 최지혁이 움찔거렸다. 뭐야. 대화 주제가 이상한가? 삼겹살이 뭐 어때서?

“아니면 목살? 소?”

“삼겹살…… 먹어.”

“아, 맞다. 집에 먹을 거 다 떨어졌는데. 일찍 들어가는 김에 우리 장이나 보고 가죠?”

최지혁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꼭 뭔가 묻고 싶은 눈치였다.

최지혁이 내게 물을 말은 뭐, 뻔했다.

기분 괜찮아? 이 정도겠지?

그냥 물어보면 될 걸 또 한참을 망설인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내 상태에 대해 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 사실, 어제 잘못해서 사진첩 누르는 바람에 좀 우울했어요. 신경 쓰이게 했다면 미안해요.”

내 말에 최지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

그리고 내 발끝을 한참 쳐다보다가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집.”

집? 나는 뜬금없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최지혁이 잔뜩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돌아갈 수 있게……. 노력해 볼게.”

“응?”

“그러니까, 네가, 네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내가 노력해 본다고.”

최지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책임지고, 너…… 돌아갈 수 있도록…….”

나는 최지혁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내가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본인이 책임지고 노력해 보겠다고 말하는 건가?

왜?

단순히 내가 본인을 위해 핸드폰으로 뭘 만지다가 죽을 뻔해서?

아니면 내가 그냥 불쌍해서?

그것도 아니면…….

아, 최지혁 이 인간 진짜. 어떻게 말을 해도 저런 말만…….

감동 안 받았다고 하면 정말정말 거짓말이다.

안 설렜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울컥하지 않았다면 그건 더 거짓말이다.

“채유라…… 울어?”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데 길바닥에서 눈치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엄마 아빠 보고 싶다.

“안 울어요…….”

눈앞이 뿌옇다.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엄마 아빠 보고 싶다고 엉엉 목 놓아 울며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 힘들다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찡찡대고 싶었다.

기대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최지혁이면, 괜찮지 않을까?

최지혁한테 가족 얘기는 안 꺼내는 게 예의지만……. 그냥 어느 정도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지 않을까?

최지혁한테 매달리면 받아 줄 것 같았다. 나 좀 위로해 달라고. 달래 달라고 하면 최지혁은 해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기가 못내 미안해서 그냥 입만 꾹 다물고 애써 웃었다.

난 집에 가고 싶다. 기회가 생긴다면 꼭 집에 갈 거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 내가, 최지혁한테 당장 내 마음 편하겠다고 기대 버리면…….

그건, 최지혁의 마음을 이용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러면 안 된다.

최지혁의 손이 애매하게 내 턱 아래에서 머뭇거렸다.

나는 최지혁이 더 이상 곤란해하기 전에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아, 배고프다. 빨리 마트 가요. 마트.”

“…….”

“아, 맞다. 이번에 생수 품귀현상 터져서 도경 아저씨가 생수 사놓으라고 했어요. 그리고 삼겹살 먹으려면 부탄가스도 필요해요. 다 떨어졌어.”

“알아.”

최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애매하게 내게 닿아있던 제 손을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꽤 착잡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안에 있는 물티슈를 뽑아 내 눈가에 가져다 댔다.

“……울고 싶으면 그냥 참지 마.”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쓱 쓸고는 운전석에 착석했다.

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최지혁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배고프다며. 빨리 가.”

……미치겠네.

***

음, 최지혁과 마트를 오자고 한 건 좀 충동적이고 잘못된 선택인 것 같았다.

“최지혁이랑 채유라다!”

“헐, 뭐야. 왜 둘만 있어?”

“봐, 맞다니까? 둘이 사귀는 거?”

웅성웅성. 난리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렸고, 최지혁은 황급히 내 손목을 잡고 그대로 입구에서 돌아 나오려 했다.

“아, 어디 가요!”

“배달 시켜.”

“배달 파업한 거 몰라요?”

“설마 다 했겠어? 파업 안 한 업체 찾아보면 되지.”

“다 했대요. 도경 아저씨가 주변에 게이트 터졌는데도 배달원들 배달 시켜서 사상자 나오는 바람에 싹 다 파업 들어갔대요. 위험수당 올려주고 배상해달라고.”

“도대체 박도경 그 인간은 너한테 주절주절 뭘 말하고 다니는 건데?”

“아오, 도경 아저씨가 우리 신경 많이 써주는 거 몰라요? 좀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아니다. 아니에요. 우리 장 볼 것만 후딱 사서 나가요. 응?”

최지혁은 짜증 난다는 듯이 입을 쭉 내밀고 나를 뚱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웅성대는 사람들을 쓱 쳐다보았다.

그에 소음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뭐지? 싶어서 쫑쫑쫑 최지혁 쪽으로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피니, 음. 역시 주변이 조용해질 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대충 웃으며 최지혁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빨리빨리 돌고 나가요.”

“……또 헛소리할 것 같은데.”

“하면 뭐 어때요.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최지혁은 슬쩍 내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조금 쑥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됐어. 빨리 살 것만 사고 나가.”

“마트 오랜만이다.”

나는 좀 설레는 마음으로 열심히 마트를 돌아다녔다.

물론 마트에 오면 항상 그렇듯이 물건은 쓸데없이 많이 담게 되었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2시간째 빙빙 도는 중이었다.

“술 마실래요?”

“어차피 마셔봤자 안 취해.”

“그럼 음료수!”

“물어보지 말고 그냥 담아.”

“왜요. 같이 먹어야지!”

“…….”

최지혁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카트를 끌었고,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평소 사고 싶었던 것들을 다 쓸어 담기 시작했다.

최지혁은 어차피 밥 많이 먹으니까 넉넉히 사도 상관없었다.

“떡갈비 살까?”

“맘대로 해.”

최지혁의 시큰둥한 반응에 앞에서 일하시던 시식코너 아주머니께서 우리를 알아보고 너스레를 떨며 말씀하셨다.

“아유! 헌터분들 맞쥬? 그러지 말고 이거 드셔보고 가요. 신상이라, 엄청 잘 팔려!”

“앗,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머니가 넘겨주신 이쑤시개를 집어 들고 최지혁에게 말했다.

“아.”

“……아.”

최지혁은 카트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손이 없었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최지혁의 입에 아주 친절히도 떡갈비를 넣어줬다.

당연히 손이 빈 내가 먹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옆에서 찰칵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

“…….”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가 자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사진 찍는 자세 그대로 굳어 몹시 당황한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무슨…….”

그리고 최지혁이 뭐라고 짜증 내며 운을 떼기가 무섭게,

“나, 나 아니에요!”

미친 속도로 사람들 사이로 도망가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최지혁이 아까 뭘 걱정했는지 눈치챘다.

“아유, 거 젊은 남녀가 연애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 보기 좋아요~!”

우리 앞에 있던 시식코너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을 얹으셨다.

일이 좀 피곤하게 돌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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