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45)

최지혁은 엄청 진중한 타입처럼 화면에 나왔다.

왜냐면 쓸데없는 말은 안 했기 때문이다.

“각성자……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헌터는 말 그대로 어떤 일을 하시는 건지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 세계의 유명한 방송인이 최지혁에게 질문했고, 최지혁은 나름 성실하게 대답했다.

“당장 발생하는 게이트에 들어가 안에 있는 위험요소들을 모두 제거합니다. 그리고 게이트 클리어 알림이 뜨면 나옵니다.”

최지혁의 말에 옆에 있던 부진행자가 열심히 감탄하며 오디오를 채워 나갔다.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조금 쑥스러운 질문이지만 가온 헌터님들이 저희 프로그램에 나오시게 된 계기, 뭐 그런 게 있을까요? 하하!”

물론 지성준 쪽과 말이 다 끝난 상태에서 가장 파급력이 센 프로그램을 고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리 짠 대로 호호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사실, 그간 인터뷰 요청이 굉장히 많았는데, 아시다시피 저희가 아직까지는 조금 폐쇄적이잖아요.”

“네네, 그렇죠, 그렇죠. 이게, 세상에 큰 위협이 된 만큼 당연히 섣부른 인터뷰는 조심해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진행자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저희가 이 프로그램의 정말 열렬한 시청자거든요. 그래서 고르고 골라서 이렇게 나오게 됐습니다.”

“아유, 정말요? 거, 부끄러워서. 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진행자님 두 분 정말정말 뵙고 싶었어요.”

음, 아무리 봐도 나는 거짓말에 조금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인터뷰는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진지한 얘기도 하고, 앞으로 게이트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이런 이야기도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적당히 던전 안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꺼내며 눈물도 흘렸다.

물론 최지혁은 울지 않았고, 준우와 나만 열심히 울었다.

이거 하려고 일주일 내내 우는 연습을 했다.

물론, 최지혁은 또 안 했다.

최지혁은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내가 울릴 거다.

원래 최지혁 같은 컨셉은 절대 안 울 것같이 생겨서 막 결정적일 때 딱! 울어주면 아주 여론이 바글바글!

“참, 저희 쪽으로 아주 특별한 게스트 한 분이 오셨는데요.”

“채유라 헌터님이 아주 좋아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신 분입니다.”

대충 배경음악이 깔린다는 사인과 함께 썬이 들어왔다. 나는 매우 놀란 척을 해보았다.

“안녕하세요! 어비스월드 인 더 빌딩! 어비스월드의 썬입니다. 반갑습니다!”

썬은 친절했다. 내 예상처럼 괜찮은 사람이었다.

몇 분간의 대화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일단 느낌은 그랬다.

최지혁은 진짜 진짜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환장하겠네. 여기서도 표정에 티가 났다.

최지혁을 모르는 사람들이야 저게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알았다.

***

썬이랑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은근히 대화 주제가 잘 맞았다.

“아, 저희도 상황이 조금 어려워져서……. 아무래도 시국이 이러니까 아이돌 시장도 죽고…….”

썬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아무래도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아이돌이고 인기도 많지 않다 보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사실 저희 회사에서도 이미 정리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서 솔직한 마음으로…… 그냥 저희 좋아해주시니까 미리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좀 충격적이었다. 썬도 말하고 나서 괜히 말했나 싶은 눈치였다.

물론 내 옆에 있는 최지혁은 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썬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미 봤다, 이 자식아.

썬은 최지혁이 그를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로 주변을 살피더니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는 거 정말 염치없는 거 알지만. 유라 씨, 혹시요. 혹시…….”

최지혁은 그런 썬을 보고 조금 당황한 눈치로 말했다.

“혹시 뭐. 시간 없어. 가.”

그에 썬은 다급하게 최지혁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공고! 공고 봤습니다! 그, 가온 코퍼레이션에서, 언론, 연예 쪽 담당 찾으신다고 봤는데! 제가! 제가 그거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예?”

이게 뭔 소리람? 나는 당황해서 썬을 쳐다보았고, 썬은 후다닥 제 핸드폰을 내게 들이밀며 채용공고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여기, 이거.”

최지혁은 딱딱하게 굳어서 썬과 내 사이를 척, 하고 가로막았다.

등빨이 좋아서 내 눈앞에 있던 썬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지……웁!”

그때였다. 평소와 같이 막 말하려는 최지혁의 입을 준우가 잽싸게 틀어막고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에이, 형! 지…… 그러니까, 아! 지성준 씨! 지성준 씨는 저희 공고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썬 님, 그, 공고는 일단 방송국 복도에서 얘기하지 말고 따로 연락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지, 유라야?”

“어? 어…….”

분명 욕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준우가 다급하게 최지혁을 질질 끌었다.

“유라야, 뭐 해! 우리 사무실 가야지, 하하하!”

물론 나도 얼떨결에 끌려왔다.

준우는 나도 질질질 끌고 와 대충 차 앞좌석에 쑤셔 넣더니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최지혁에게 말했다.

“형. 화장실 가고 싶다고요? 알겠어요. 저도 가고 싶어서! 하하!”

뭔가 이상했다.

왜 저러지.

곧 시험 기간이라고 밤새우는 것 같던데. 드디어 강준우도 회까닥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잠 안 자고 공부한다고 기력 포션 남용하지 말랬는데.

아무튼 준우는 발버둥치는 최지혁을 끌고 어디론가 갔다.

와중에 최지혁도 웃기다.

힘으로 그냥 뿌리치면 될 걸 또 발발 떨면서 끌려가고 있네.

나는 창틀에 턱을 괴고 화장실 간대놓고 주차장 구석에서 대놓고 서로 뭐라뭐라 대화하는 둘을 쳐다보았다.

뭐 하자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

최지혁은 악을 쓰며 또 왁왁거렸고, 준우는 진지하게 와다다다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지혁이 삐진 얼굴로 가만히 있다가 또 고개를 끄덕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또 띠껍다는 표정으로 짝다리를 짚고 뭐라뭐라 말했다.

그에 준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또 뭐라고 했다.

그러니 또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았다가 껄렁하게 준우를 노려보더니 대충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사람이 일관적이야.

이쪽으로 걸어오는 최지혁을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실실 웃다가 빠르게 표정을 굳혔다.

‘잠깐만, 지금 나 왜 웃은 거지……?’

나는 반사적으로 양손으로 내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 진짜 왜 웃은 거야? 지금 쟤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건가?’

아, 최지혁이 귀여운 구석이 있긴 했다.

그럼그럼. 최지혁 정도면 아주아주 귀엽지!

뭐, 어차피 고등학교 때 아이돌 좋아할 때도 영상 속 오빠들 보고 귀엽다며 눈물까지 흘렸으니 미소 정도야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당연한 반응 맞겠지?

“돌겠네?”

나는 내 쪽으로 걸어오는 최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게 다 쟤가 나한테 이상하게 굴어서 이런 거다.

원래 별생각 없었단 말이야.

“아씨, 최지혁 진짜…….”

순간적으로 울고 싶어졌다.

물론 당장은 최지혁 얼굴을 보면 곤란할 것 같은 예감이 불쑥불쑥 들기는 하는데, 어차피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그날, 최지혁이 게이트에서 빠져나갈 기회를 뒤로하고 내게 왔을 때도, 지금과 똑같은 고민을 했지만 어떻게 잘 지내고 있잖아?

아니지.

잘 지내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최지혁이랑 잘 지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다, 내가!

최지혁은 제 딴에는 감정을 숨긴다고 숨기는 것 같은데.

전혀 아니었다.

최지혁은 늘 말하지만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다.

물론 누군가를 조질 때만 빼고.

그럴 때는 보다 상대를 효과적으로 조지기 위해서 얼굴에 가면도 쓰긴 하는데 그건 예외니까 일단 빼자.

아무튼 오늘도 그랬다.

썬을 보자마자 띠껍다는 표정을 대놓고 보여줬다.

아, 당연히 내가 볼 것 같으면 멀쩡한 표정을 지어보려고 애쓰긴 했지만, 이미 봤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참나.

“아, 정신 차려, 채유라. 정신!”

갑자기 우울해졌다.

만약에, 최지혁이 정말정말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치자.

그리고 만약에.

물론 나는 지금 최지혁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냥 가정이다, 가정.

진짜 만약에, 최지혁이 나한테 들이대서 내가 최지혁이 좋아졌다고 치자.

솔직히 최지혁이 작정하고 들이대면 내가 안 넘어갈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아, 물론 이건 다른 여자들도 똑같을 거다. 최지혁은 잘생겼잖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러면, 그 이후에 뭐 어쩔 건데?

답이 없었다.

좀 심각하게 김칫국이긴 하지만 아무튼 통상적으로 서로 좋아하면 사귀는 게 맞으니까.

만약 사귄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일단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무조건 돌아갈 거다.

그런데, 내가 최지혁과 사귀는 상황에서 내가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서 휙! 돌아가 버리면?

최지혁은 또 사람에게 버림받는 거다.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상대가 언젠가 다른 세계로 영영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서 연애가 되겠어?

제일 좋은 시나리오는 내가 최지혁에게 마음을 안 주고 여지도 안 주는 거다.

그러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친구들 보면 어차피 남자친구랑 사귀어 봤자 1년도 안 가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오래 가봤자 3년이었다.

맞다. 맞아.

어차피 사귀어 봤자 금방 깨질 거.

어색한 사이만 되고 별로 좋지 않다.

그럼그럼.

“제발, 신경 끄자……. 제발…….”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점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한번 깨달으니, 계속 신경 쓰이는 거다.

심지어, 최지혁처럼 생긴 사람이 날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안 설렌다?

안 설레면 사람이 아니다. 부처고, 예수님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최지혁은 항상 나한테 잘해준다.

혼자 고립될 뻔했을 때도 내게 찾아와줬고, 또 내가 기절했을 때도 3일이나 굶어가면서 내 옆에 있어줬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안 설레는데!

“으아아악! 망하……지는 않고 성공할 최지혁! 악!”

나는 다시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이제 거의 운전석 가까이로 온 최지혁을 보며 다짐, 또 다짐했다.

제발, 흔들리지 말자.

제발! 현상 유지만 하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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