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145)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제기랄.

채유라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앞에서 뽈뽈뽈 돌아다녔다.

“와, 머릿결 봐. 역시 돈이 최고야. 그렇죠?”

“…….”

조금 변태 같았지만 채유라의 머리가 찰랑일 때마다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아, 제품 뭐 쓰시는지 물어보고 와야겠다. 잠깐만요.”

채유라가 담당 디자이너에게로 총총총 뛰어가자 최지혁의 옆으로 강준우가 쓰윽 다가왔다.

그리고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 유라 예쁘다고 생각했죠? 형 얼굴에 다 티,”

최지혁은 반사적으로 꾹 강준우의 발을 밟아주며 말했다.

“닥쳐.”

“으악!”

강준우는 억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그를 째려보았다.

“아니, 형, 진짜 얼굴에 다 티 난다고요!”

“닥치라고.”

“유라가 성격파탄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역시 다 이유가…….”

그가 강준우를 강렬하게 째려보자, 망할 의대생은 드디어 입을 꾹 다물었다.

최지혁은 주먹을 꽉 쥐고 채유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피해버렸다.

도저히 맨정신으로 못 쳐다보겠다.

“영 불편하면 오늘은 유라 옆에 제가 앉을까요?”

강준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실실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고, 최지혁은 방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닥쳐.”

***

최지혁은 후회했다. 그냥 강준우더러 유라 옆에 앉으라고 할걸.

아니지. 그건 아니었다.

그가 채유라 옆에 앉는 게 맞았다.

빌어먹을 방송국 놈들은 채유라의 옆에 굳이 빈자리를 만들어 놓고 빌어먹을 멸치 새끼를 붙여 놨으니 말이다.

“와, 진짜 팬이에요!”

“저도 채 헌터님 팬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희 팀 좋아해 주신다고요.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솔직한 마음으로 배알이 꼴렸다. 빌어먹을 악마 새끼는 그보다 저 썬이라는 멸치 새끼가 더 잘생겼다고 했다.

‘말 좀 예쁘게 해요.’

순간 채유라가 밥 먹듯이 그에게 하는 말이 떠올랐다.

최지혁은 불만을 가득 안은 채로 생각했다.

‘어차피 속마음인데 내가 알 게 뭐야.’

채유라가 멸치를 보며 수줍게 웃어댔다. 최지혁은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 맞다. 혹시 몰라서 저희 이번에 새 앨범을 준비해왔는데…….”

“헉. 벌써 샀는데…….”

“정말요?”

빌어먹을 멸치가 웃었다. 꼴사나운 긴 머리를 배배 꼬며 채유라를 향해 부끄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최지혁은 수만 가지의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날 채유라의 모니터 화면에 그가 아닌 저 멸치가 잡혔으면 그에게 하던 것처럼 멸치에게도 똑같이 해주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채유라는 쓸데없이 다정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착잡해졌다. 여태까지 관찰해 온 결과.

채유라는 최지혁, 그와 같이 버릇없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채유라가 그에게 잘해주는 건 순전히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와서. 정이 들었기 때문에.

그거 하나였다.

“저도 가지고 왔어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해주실 수 있나요?”

“아, 네네!”

짜증 났다. 애초에 화신과 성좌의 관계가 아니었으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겨우, 그녀를 위해서 S급 근처까지 올려놨지만, 그래서 그게 뭐?

원래의 힘을 찾으면 뭐가 달라져?

그리고 그게 어떻게 채유라를 위해서인데? 스스로 생각해 놓고서도 어이가 없었다.

“혹시 원하시는 문구 없으세요?”

“음…….”

“없으시면 제가 알아서 써드려도 돼요?”

“네!”

채유라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채유라.”

그래서 대책 없이 그녀를 불렀다.

채유라는 다정하게 뒤를 돌아 최지혁을 바라보았다.

“왜요?”

“…….”

멸치의 시선 또한 그에게 꽂혔다. 최지혁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촬영 안 해?”

제기랄.

최지혁은 다정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신의 대사에 좌절했다. 눈앞의 멸치는 다정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채유라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실실 뱉어대는데 그는 아니었다.

뭔가, 더 좋은 말을 골라야 했다.

유라가, 마음에 들 만한……. 그런…….

“아, 맞다. 촬영 몇 분 남았죠?”

“20분 정도 남았어요. 아, 혹시 제가 쉬시는 데 방해되나요?”

“아니요! 아, 그게 그러니까…… 음……. 그, 어제 긴장되어서 잠을 좀 못 잤더니…….”

“아, 맞다. 방송 처음이시구나, 다들……. 사실 저도 이렇게 큰 방송 나오는 건 처음이라 들뜨고 긴장돼서……. 조금 눈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그럼 먼저 가볼 테니 쉬시고 촬영 때 봬요.”

“네네, 그때 봬요! 사인 감사해요!”

결국 문이 닫히고 그 머리 긴 멸치가 나갔다.

최지혁은 반사적으로 채유라의 표정을 살폈다.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제기랄.’

속이 탔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강준우에 사람도 아닌 서번트 새끼들에, 도대체 내가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데? 이젠 딴따라야?”

물론 최지혁 그 자신도 이딴 생각을 할 자격이 그에게 없다는 것은 아주 잘 알았다.

채유라와 그가 무슨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사이가 될 것도 아닌데.

게다가 그는…….

빌어먹을. 전부 다 엿 같았다.

애초에 채유라를 그의 세상으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데려오지 않았다면?’

최지혁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살아 숨 쉬는 그의 성좌.

그의 옆에서 그를 걱정해주고, 같이 웃고, 위로해주는…….

숨이 턱, 막혔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서 엘드리치의 소원 향로에 소원을 다시 빌 수 있다면 과연 그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비밀은, 지키면 된다.

끝까지 비밀로 하면 된다. 그가, 유라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유라가 모르면 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유라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찾기 힘든 걸로 보이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욕심을 내서, 유라는 동정심에 약하니까 그냥 물고 늘어지면 어떻게든…….

“뭐야. 무슨 생각 하는데 표정이 이렇게 험악해요?”

순간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배 속이 꿈틀거렸다.

“하하하! 유라야! 하하하! 형 얼굴이 험악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하하하하!”

그때였다. 다행히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강준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채유라를 그에게서 떼어놓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샌드위치 먹을래?”

“아니, 최지혁 눈이 평소의 그 험악함이랑은 좀 결이 달랐,”

“오, 유라야. 케이준 샌드위치야. 안에 고기 들었어.”

“헐, 진짜? 나 하나만!”

“두 개 먹어도 돼.”

“아싸.”

죄 짓는 기분이었다. 아니? 죄는 이미 지었다.

그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욕심낼 자격이 애초에 어디 있다고?

돌려보내야 했다.

채유라는, 그녀가 온 곳으로 가야 했다.

엘드리치의 향로를 다시 찾자. 그리고, 원상태로 되돌려 놓으면 된다.

비록, 그날이 되면 채유라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해도.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지혁은 최지혁의 삶을 살고, 채유라는 채유라의 삶을 살면 된다.

비록 채유라가 돌아간다면 그는 다시 지옥 속에 갇힐 것만 같지만.

언젠가, 그녀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저를 지상으로 올려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갖고, 그렇게 밑바닥에서 썩어가겠지.

‘제기랄!’

그는 구제 불능이다. 글러 먹었다.

생각하는 사고방식부터가 썩어 빠졌다.

채유라가 돌아가는 것도 싫고, 그가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원망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평생 비밀로 하고 좋아한다고 매달려라도 보게?’

아니, 그건 나쁜 거였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개새끼가…….

‘어차피 원래부터 개새끼였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때였다.

“최지혁! 뭐 고민 있어요?”

채유라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불쑥 다가왔다.

‘개자식.’

그리고 자동으로 상상이 됐다. 만약 제가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게 되면,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때문이야.’

“배 안 고파요? 샌드위치 안 먹어?”

순간적으로 과거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네가, 날 지켜줬어야지. 내가 죽는 건 너 때문이란다.’

‘널 증오해.’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얼굴에 또 다른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를 향해 모진 말을 내뱉는 유라와, 그리고…….

‘너 때문에 난 죽었어. 네가 이기적이라 내가 죽은 거라고.’

“배 안 고프냐고.”

그가, 지켜주지 못했던, 영영 잃어버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야!”

그때였다. 채유라가 그의 어깨를 꽉 잡았고,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와다다 말했다.

“사람이, 질문을 했으면 답을 해야지!”

“하하, 난 몰라.”

강준우가 귀를 막으며 슬쩍 대기실에서 사라졌고 채유라는 좀 화가 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밥 먹으라고, 밥! 안 들려? 밥!”

“…….”

채유라가 어깨를 짤짤짤 흔들었다. 최지혁은 힘없는 갈대처럼 그녀의 손길에 열심히 흔들댔다.

할 말이 없었다.

“아.”

채유라가 건네는 샌드위치를 앙 베어 무는 수밖에는.

스스로가 등신 같았다.

그녀가 제 입에 뭔가 넣어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으니까.

미소 짓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더 이상 등신처럼 보이기 싫었다.

채유라가 아무리 친절하다고 해도, 다짜고짜 아무에게나 이토록 심하게 챙겨주진 않는다.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최지혁은 유라가 입에 넣어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다 뾰루퉁한 표정인 그녀를 쳐다보며 무심한 척 말했다.

“입술, 다 지워졌어.”

그의 말에 채유라가 화들짝 놀라며 거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 몫의 샌드위치를 앙 베어 물었다.

“어차피 지워질 건데, 뭐.”

그리고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그에 최지혁은 황급히 시선을 최대한 먼 곳으로 던졌다.

심장소리가 밖으로 들릴 것만 같았다.

꼭, 처음, 누군가를 잃었을 때처럼.

그렇게 주책없이 쿵쾅쿵쾅 뛰었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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