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색이 뭔데, 민트색이! 더워 죽겠는데 이건 왜 입어야 하는데?”
최지혁은 열심히 내게 찡찡댔다.
이쯤 되면 내 군소리를 즐기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매번 저럴 수가 없었다.
“유라야. 이건 나도 싫어…….”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지혁에게는 민트색 재킷을 입혔고 준우는 민트색 로고가 들어가 있는 가벼운 반팔티를 입혔다.
아니, 민트색 스키니진을 입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불만이 많지?
“싫으면 벗든가. 둘 다 벗겨줘요?”
내가 최지혁의 옷을 콱 잡아버리자 최지혁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어버버거렸다.
그리고는 급기야 제 가슴을 엑스자로 가렸다.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왜, 왜 벗겨! 왜!”
“누군 입고 싶어서 입는 줄 아나. 그리고 민트 아니고 펄 아쿠아 그린이거든!”
하필이면 정당 대표 색도 펄 아쿠아 그린이었다. 아이돌이야?
참고로 여당 색은 메탈릭그레이다. 환장한다.
내가 살아생전에 정당 색을 저런 식으로 정하는 건 처음 봤다.
나는 씩씩대며 내 상하의를 가리켰다.
“나는 위아래 옷에 핸드백, 액세서리까지 싹 다 맞췄는데 옷 입는 데 5분도 안 걸리는 인간들이 어디서 투정이야. 빨리 안 갈아입어!”
“…….”
“…….”
내가 놈들을 노려보자 최지혁과 강준우는 쪼르르 방으로 달려가 얌전히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TV를 노려보았다.
사실 이걸 왜 해야 하나 싶긴 했다.
이건 뭐 대놓고 광고하기도 아니고.
우리한테 들어온 요구는 이게 다였다.
상록애국당 상징색 착용하고 길거리 돌아다니다가 사진 찍히기.
상징색 착용하고 인터뷰 프로그램 나가기…….
최지혁이 싫어할 만하다.
최지혁은 회귀 전에 절대 예능 안 나가고 방송프로그램 안 나가고 유튜브도 안 했다.
“다 입었어요?”
내 말에 최지혁과 준우가 방에서 쭈뼛쭈뼛 기어 나왔다.
“쪽팔리게…….”
“자꾸 투덜댈래요? 싫으면 나랑 준우만 갔다 오고. 준우야, 가자!”
내가 준우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 최지혁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 뒤꽁무니를 빠르게 쫓아왔다.
“누가 안 간대?”
“그럼 좀 그냥 오든가. 꼭 한 소리를 듣고 가.”
***
‘베일에 싸인 가온, 단체 외출에 올 펄아쿠아그린. 사실상 첫 행보. 안영표 후보 지지선언인가?’
└‘ㅋ 대선 얼마 안 남았는데 완전 대 놓고네. 제정신?’
└‘어차피 각성자커뮤에서 백날 욕해봤자 민간인한테는 그사세임. 이미 영표씨 않영표 되는 중. 선동질 성공했쥬?’
└‘또 뭐하려고;;;;;; 난 이제 쟤들 좀 무서움;;;;;; 솔직히 우리나라 굵직굵직한 게이트 쟤들이 거의 다 들어가지 않음?’
└‘쟤네 힐러 한국대 출신이라 높으신 분들께서 어화둥둥 해주시나 보지 ^^ 역시 인생은 연줄!’
└‘ㅋㅋㅋㅋㅋㅋㅋ드라마 그만 보시고; 그래봤자 한국대 의사 나부랭이임.’
ㄴ‘ㅋ빡갈통임? 아직 ㄱㅈㅇ의사 아님’
어그로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예능만 돌면 우리 임무는 끝이다.
물론 각성자 커뮤니티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쟤네들이 우리를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민간인들은 우리 편인데 쟤들도 머리가 달려있다면 우리한테 함부로 못 한다.
최지혁이 패드에 대문짝만 하게 떠 있는 제 합성 사진을 보더니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캡틴…… 코리아, 뭐야. 이거 내리라 그래.”
최지혁은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지혁이 제일 눈에 띄게 생겼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는 최지혁이 다 받았다.
“왜요, 형 웃긴데.”
“……죽고 싶냐?”
“우리도 코스튬 주문제작 할까, 유라야? 바이퍼 길드 보니까 코스튬 있던데.”
최지혁은 차마 준우를 때리지는 못하고 어깨에 힘을 빡 준 채로 이만 부득부득 갈았다.
“헛소리 작작 하라고.”
“그나저나 저희 내일 진짜 공중파 나가요?”
준우의 말에 앞에 있던 도경 아저씨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 아이템도 내가 바꿔 와, 잡일도 내가 해, 방송스케줄도 내가 잡나? 사람 더 뽑으면 안 되나, 유라 양?”
도경 아저씨의 말에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없어서.”
“구인 공고를 내! 공고를!”
“무슨 분야로요?”
“이제 돈도 많아졌고, 사회에서 이목도 집중되었으니까, 니들은 거의 준연예인이란 말이지?”
도경 아저씨가 고민되는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래! 까짓 거 내가 알아보지, 뭐. 그래, 내가 다 하면 돼. 그래. 힘내지, 뭐.”
뭔가 체념한 듯한 얼굴이었다. 도경 아저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그리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봐, 내가 좀 꼰대스럽긴 하지만 이 얘기는 꼭 하고 넘어가자. 이제 사기 조심해야 한다. 알겠어?”
도경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뭐 절박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데, 솔직히 나도 과거에는 니들 조금이라도 벗겨 먹으려 했잖냐. 그런데 지금부터는 수도 없는 또라이들이 니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벗겨 먹으려 할 거라고. 나이도 어리잖냐.”
뭔가 착잡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저씨. 괜찮아요. 최지혁 성격 알잖아요.”
“그래그래, 지혁 군 성격 잘 알지. 어디서 호구는 안 잡힐 것 같다만…….”
아저씨는 노안이 왔는지 핸드폰을 대충 멀리 떨어트려서 문자메시지를 읊었다.
“자, 프로그램명 상상풀가동, 내일 오전 9시 촬영. 엠씨 유상석, 좌안호. 그리고 게스트 썬.”
아저씨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썬이라고? 설마 내가 아는 어비스월드 썬?
“게스트 있단 얘기는 안 했잖아.”
최지혁이 도경 아저씨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거나 말거나 나는 단 한 가지 사실에 흥분해 있었다.
썬이라니! 세상에, 3군 아이돌인 줄 알았는데. 섭외가 어떻게 된 거지?
“아, 그쪽 피디들이 좀 발로 뛰었나 봐? 유라 양 썬 좋아한다는 거 알던데?”
“헐, 어떻게요?”
“커뮤니티에 유라 양 앨범 사는 거 떠도는 모양이던데.”
정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준우를 쳐다보았고, 준우는 친절하게 서치까지 해서 내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에 내 옆에 있던 최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새끼 나오면 안 가.”
“거참, 어차피 갈 거면서 말이 많어.”
“…….”
결국 도경 아저씨에게 팩트로 후드려 맞고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앨범, 얼어 뒤질 앨범…….”
“왜요. 내 취미 생활에 불만 있어?”
“…….”
나는 최지혁의 입을 더 효과적으로 다물린 뒤 잔뜩 들뜬 마음을 안고 말했다.
“다들 내일 6시까지 일어나요. 당장 웃돈 얹어서 청담 유명한 샵에 예약 걸어 놓을 거니까.”
“…….”
최지혁은 당황한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준우는 충분히 예상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야. 옷은 저번에 산 거 입으면 되는 거지?”
“응. 그거 입고, 시계 얘기한 거 차고, 또……. 질문지 한 번 더 보고…….”
나는 최지혁을 흘끔 쳐다보았다. 말은 안 하긴 하지만 굉장히 기분이 더러워 보였다.
저걸 또 어떻게 구슬릴까 고민이 되었다.
“그깟 멸치 뭐가 좋다고…….”
애초에 왜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썬이 멸치는 아닌데…….
물론 최지혁보다 키가 5센티미터 작고 어깨도 최지혁보다 좀 좁지만 그건 최지혁이 비정상인 거다.
“인품이 좋잖아요.”
내 말에 최지혁이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내가 다큐를 봤거든요? 썬이 완전 시골에서 올라와서, 가수 하겠다고 오디션 프로그램도 나갔대요. 그런데 계속 낙방하고 그러니까,”
최지혁은 내 얘기를 한참 듣더니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튼 포기하지 않는 자세 너무 멋있지 않아요?”
그리고 사무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집에 가.”
“응? 벌써요? 그래요, 오늘 일찍 가서 쉬어야지.”
내 말에 최지혁이 흠칫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뭔가 원하던 반응이 이게 아니었던 모양인데.
내 알 바야?
“저희 먼저 들어가 볼게요. 준우야, 내일 아침에 보자!”
“그래~! 형, 잘 가고 유라야, 내일 봐~!”
“빠이~!”
나는 빠르게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라탔고, 최지혁은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최지혁에게 물었다.
“질문지 미리 다 읽었어요?”
“읽었어.”
“대답도 다 외웠어요?”
“외웠으니까 그만 물어봐.”
최지혁은 여전히 뾰루퉁한 얼굴로 액셀을 밟았다.
큰일 났다.
본인은 최대한 안 그런 척하는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나도 모를 수가 없었다.
“난 썬이 좋아요.”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에 최지혁이 바로 반응했다. 매우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액셀을 밟았다.
“물론 TV에 나오는 모습이랑 실제 모습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 말해도 최지혁의 표정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제발 본인의 감정을 알아차려 달라고 내게 호소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썬은 그냥 최애고. 나는 어비스월드 멤버들 다 좋아요.”
“……어쩌라고.”
최지혁이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볼 때 대놓고 싫은 티 내지 말라구요.”
“내가 언제 싫대?”
“표정에 다 보이는데.”
내 말에 최지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최대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였다.
큰일이었다.
신경 쓰였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하겠냐고.
최지혁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