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어요. 맞죠?”
“과소평가가 아니라, 그딴 거 봐서 좋을 거 없으니까…….”
“익숙해져야죠. 아까도 확! 방망이를 휘둘러 버렸어야 하는데 사람 때려본 적이 없어서 못 했잖아요. 물론 동물도 때려본 적 없긴 한데…….”
“내 등짝은 잘만 때리, 악!”
최지혁이 헛소리를 하길래 나는 있는 힘껏 최지혁의 팔뚝을 때려주었다.
“그래서 아파?”
“아니.”
“그리고 이거랑 그거랑 같아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상제가 갇혀 있는 방문을 덜컥 열었다.
“흥, 너 같은 천사보다 충성심은 내가 더 있을걸?”
“네가 감히 충성심을 논한다?”
“왜, 내 말이 틀려? 어쩔 수 없이 마스터한테 충성하고 있는 거 아니야?”
“네가 알 바 아니다. 악마.”
“오, 아주 내가 알 바 맞고요, 천사양반~. 나는 마스터한테 충성하기로 결심……. 어라. 마스터, 안녕!”
역시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나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기절해 있는 상제에게 다가가려다가 최지혁에게 가로막혔다.
“어딜 막 가는데?”
“깨워야 할 거 아니에요.”
“저걸 왜 네가 깨워.”
최지혁은 나를 향해 눈을 부릅뜨더니 결국 제가 상제에게로 다가가 발로 얼굴을 툭툭 찼다.
와, 기분 나쁘겠다. 싶었다.
“일어나, 새끼야.”
“허억!”
다행히 상제는 곧장 눈을 떴다.
“감히 인간 주제에……!”
뻑! 최지혁은 가차 없이 상제를 축구공처럼 차버렸다.
거참, 좀 많이 폭력적이긴 했다.
나도 최지혁처럼 할 수 있을까?
음, 생각만 해도 심장이 조마조마해지는 걸 보니 나는 역시 폭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았다.
“네 아내는 이미 내 것…… 커헉!”
뻑!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
“네가 아무리 발악한다 해도 저 여인은, 내, 컥!”
상제는 그렇게 한 10분은 처맞고 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최지혁은 만신창이가 되어 고개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상제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뒤로 확 꺾었다.
그리고 나름 친절하게 물었다.
“설명해.”
“……무엇을 말이냐.”
“채유라가 왜 네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존재지?”
나는 대충 아이템 목록을 뒤지며 최지혁에게 물었다.
“말 안 할 것 같으면 약이라도 먹일까요? 서치하면 나올 것 같은데.”
“먼저 말하게 놔둬. 약은 나중에 먹이고. 거짓말이라도 하면 더 고통스럽게 죽여줘야겠…….”
최지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말을 내뱉다가 아차 싶었는지 내 눈치를 봤다.
그에 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평소처럼 해요. 이미 익숙한데, 뭐. 기억 안 나요? 왜, 1년 전인가? S급 던전 들어가서 히든 보스 조지겠다고 거기 있는 주민들 협박해서,”
“알았으니까 그만 상기시켜줘도 돼, 채유라.”
“오케이~.”
나는 최지혁에게 찡긋 웃어주며 대답했고, 상제는 그런 나를 보고 소름 돋는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야, 저 반응. 기분 나쁜걸?
“빨리 말해. 시간 없어.”
최지혁이 검 끝으로 상제의 정수리를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되게 기분 나쁠 것 같았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네게 그걸 왜 말해야 하지? 여자는 내 것이다. 유일한 이 세계의 구원이다!”
조금 소름이 돋았다. 내가 구원이라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공포감이 조성되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왜 네 구원이냐고. 설명하라니까?”
내 말에 상제가 애틋하게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 세계는 오염되고 있다. 정리되고 있, 커헉!”
그때였다. 상제의 목에 붉은색 사슬이 걸렸고, 나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리온? 저게 무슨…….”
나는 반사적으로 리온을 쳐다보았고, 리온은 태연하게 어깨만 으쓱였다.
분명 리온의 목에 걸려 있던 것과 똑같았다.
상제의 혀에 기이한 문자들이 새겨졌고, 그 문자들은 그의 목을 꽉 조르기 시작했다.
“커허억!”
“오염? 정리? 그게 무슨 소리야. 그보다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내 물음에 상제가 캑캑대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그대의 영혼……커헉!”
나는 곰곰이 고민했다.
그리고 최지혁에게 말했다.
“쟤도 서번트로 들일,”
“미쳤어?”
“아니욥.”
나도 말하면서 살짝 무리수인 건 알았다.
게다가 쟤는 딱히 서번트로 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최지혁의 등 뒤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예, 아니오로 대답해. 알겠어?”
내 말에 상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야차 같은 얼굴로 내게 말했다.
“감히 내게 명령이라니, 네 남편을 죽여버리고 널 내가 갖겠, 커헉!”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보든가.”
최지혁이 미친 사람처럼 낄낄낄 웃었다.
이쯤 되면 화난 것도 아니고 그냥 빡친 것 같았다.
“최지혁. 그만 때리고 빨리 질문이나 생각해 봐요.”
“한 대만 더.”
“오케이.”
***
나는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차원 관리자에 대해 안다고?”
“……그렇다.”
“그 존재들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거야?”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내가 여기 있으면 그 존재들을 막을 수 있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럼 멸망은?”
“적어도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생기지.”
결국은 아이템을 썼다. 상제는 절대 우리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대충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제는 내가 있으면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하지만 왜?
내가 뭐라고? 내가 성좌이기 때문에?
나는 우선 리온과 에르켈을 돌려보냈다.
일단 이에 대해 그 둘이 아는 건 조금 꺼려졌기 때문이다.
“내 존재가 뭔지 알아?”
내 물음에 상제가 멍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성좌.”
얼씨구? 구체적인 얘기만 아니면 제약이 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성좌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알아? 내가 알기로는 신이라는데. 그럼 너도 성좌 아니야?”
내 말에 상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깜짝 놀라 최지혁의 옷자락을 잡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게 뭔 소리예요?”
“몰라, 일단 잠깐만 기다려봐. 생각 좀 해보게.”
최지혁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만약 네 세계가 멸망하면 어쩔 생각이지? 화신체라도 찾아 다른 세상에 강림할 예정인가?”
최지혁의 말에 상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고 최지혁은 도대체 그게 무슨 제스처냐는 듯 내 손가락을 제 손으로 확 잡아버렸다.
그리고 곱게 내려주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아니, 나는 나 말하는 거냐고 물어본 건데요?”
“너겠어? 넌 신 아니라면서. 너 신이야?”
“아, 그러네? 그래서 나보고 특별하다는 건가?”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던전 안 보스몹이 성좌라고?
보스 몬스터가 어떻게 성좌가 될 수 있지?
“너 성좌라고?”
내 말에 상제가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되겠지. 세상이 멸망, 컥,”
아니, 그런데 웃긴 게 할 말 거의 다 하고 끝맺음만 못 맺게 제약을 거는 것 같았다.
이럴 거면 제약은 왜 거는 거야?
“그러니까 대충 해석하자면 세상이 멸망 뭐. 멸망한 후에 성좌가 되는 건가?”
상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골이 좀 서늘해졌다.
“……최지혁. 이해했어요?”
“제기랄.”
최지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지금…… 멸망한 세계의 신들이 성좌인데, 그게 던전 안의 신들이라는 얘기야?”
“그렇다고 치기에는 리온의 세상에 있는 생명체들은 다 죽었다고 그랬잖아요.”
내 말에 최지혁은 착잡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세계 신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잖아.”
“리온한테 물어볼까요?”
“……아니, 일단 숨겨. 안 돼.”
최지혁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거짓말 별로인데…….”
“너 거짓말 잘하잖아.”
“아니, 단발성 구라랑 장기적 거짓말은 다르죠.”
최지혁은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무튼 알았어요. 일단 숨기는 편이 좋겠어요. 나도 솔직히 슬슬 내가 뭔 존재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좀 규격 외 존재인 건 알겠거든요?”
단순하게 생각해도 나는 이상했다.
내가 던전에 들어갔다 하면 클리어 조건이 비틀리고 원래는 알아낼 수 없었던 정보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난 뭘까요?”
나는 진지하게 최지혁에게 물었다.
그에 최지혁은 그걸 왜 나한테 묻냐는 듯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뭐긴 뭐야. 채유라라며.”
“……그건 당연한 얘기고, 여기서 내 존재의 의미가 뭐냐 이거죠.”
“부처야? 존재의 의미는 왜 찾는데?”
나는 팔짱을 끼고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왜 시비지?
저거 시비 맞지?
당장 뭐라고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참았다.
왜냐면 최지혁은 날 위해서 여기 굳이 남아줬으니까.
아, 다시 그 생각을 하니까 좀 마음이 착잡해졌다.
“됐고, 가설이나 세워봐요. 첫째. 일단 던전 안 멸망한 세계의 신들이 성좌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기에는 나는 멸망하지 않은 세계의 일반인이에요. 그렇죠?”
“그건 네가 특이 케이스니까.”
최지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는 특이 케이스이다. 성좌들은 죄다 신이다.
나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해롱거리는 상제에게 물었다.
“……내가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거 맞아?”
“그렇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네 세계, 커헉!”
내가 아니라 내 세계라고?
최지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매우 심각해졌다.
“여기까지 해.”
그리고 내 눈을 제 손으로 덮어버렸다.
“잠깐만, 최지혁, 지금 뭐 하는,”
내가 손 쓸 새도 없었다.
푹, 털썩.
익숙한 소리가 들리고 숨소리 하나가 사라졌다.
미친, 최지혁. 지금 그냥 죽여버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