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45)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내가 이래서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거야.’

최지혁은 이를 악물고 채유라가 사라진 자리만 노려보았다.

채유라가 사라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주변에 넘실거리던 검은 기운은 사라졌고, 게이트 출구도 열렸다.

“혀, 형. 유라, 유라가…….”

“강준우. 집에 가.”

“……형?”

“가라고.”

지혁은 걸리적거리는 강준우를 대충 게이트 밖으로 밀어 보내며 채유라가 챙겨준 녹음기를 던졌다.

“저 인간들 고소는 네가 알아서 하고.”

“형, 괜찮아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안 가냐?”

사실 게이트가 한번 닫히면 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에 조금 심정이 착잡해지긴 했으나 상관없었다.

최지혁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황제의 앞으로 다가갔다.

“말해.”

“……악의 무리가 물러났, 커헉!”

그리고 그대로 황제의 목을 졸랐다.

던전 안의 존재들 따위가 기쁨을 만끽하는 걸 두고 보기에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아니, 초조했다.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괜찮겠지?

머릿속이 단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토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폐하!”

최지혁은 황제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린 채로 말했다.

“여자가 어디로 사라진 건지 말해.”

“컥, 고, 공주는 상제님의 품으로!”

“그걸 내가 몰라? 똑바로 말하라고, 개자식아!”

그때였다.

채유라가 그에게 던지고 간 기기가 소리를 냈다.

‘7942’

멀쩡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 왜 저 숫자지?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최지혁은 들고 있던 검을 거침없이 황제의 목에 가져다 댔다.

원하는 정보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말해. 여자가 간 곳에 어떻게 가는지.”

“그, 그것은 감히 신의 영역에,”

“그딴 거 안 궁금하니까 말해.”

물론 채유라는 그가 사람을 죽이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건 회귀 전도,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인간들은 같은 인간이 아니다.

어차피 던전 안에 있는 존재들.

지구에 멸망을 가져올 존재들.

그리고, 지금 채유라가 죽게 생겼는데 그게 중요해?

“황제 폐하를 지켜라! 저 남자를 죽여라!”

“폐하!”

“죽여라!”

최지혁은 비릿하게 웃었다. 어쨌든 타락한 상제를 잠재운 것은 그의 일행이었다.

채유라가 납치당하는 바람에 상제는 물러갔다.

그렇다면 그들의 위험을 해결해 준 것은 최지혁의 일행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변색하여 죽이려 든다니.

놀랍지도 않았다. 최지혁은 아무런 표정조차 짓지 못하고 황제의 목에 검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

“……공주를 잃은 마음이 얼마나 참담한지는 알겠소, 하나.”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폐하!”

최지혁은 바닥에 축 늘어진 황제를 두고 제일 높은 직위에 있을 법한 사람을 골랐다.

“저, 저자를 잡아라!”

만약, 채유라가 있는 곳으로 갈 방법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에 빙빙 떠돌았다.

무녀, 저 무녀라면 어떻게 방법을 알지도 몰랐다.

채유라를 되찾아야 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마음은 조급해졌고, 눈앞이 살짝 희미해졌다.

“괴, 괴물이다!”

“아무나, 아무나 신계로 가는 문을 열어!”

“무녀, 무녀를 잡아라!”

조금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누군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의미 모를 문을 연 상태였고, 앞뒤 가릴 것 없이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선계로 향하는 혼돈에 휘말리면 죽어버릴 것이다, 사특한 자여! 커헉!”

온몸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그가 겪어온 게이트들에 비하면 이 정도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늘부로 그대는 내…….”

하지만, 최지혁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무녀는 제대로 된 문을 연 것 같았다.

그의 시야에는 채유라가 보였으니까.

문제는 그녀의 위에 올라탄 빌어먹을 개자식이었다.

그냥 잡아 죽여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사한 건 맞겠지? 옷이 왜 흐트러져 있지? 손목은 왜 빨개진 거지?’

죽여야겠다. 무슨 일이 있었건 상관없었다.

빌어먹을 개자식이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릴 리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들어봤자 의미 없다.

하지만 늘 그렇듯 채유라는 기이한 방법으로 강제로 최지혁의 이성을 끌어냈다.

“커헉! 설마, 네가 여자의 남편……!”

“……뭐?”

최지혁은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라는 거지? 뭐가 어떻게 된…….

“여, 여보!”

***

나는 소맷자락으로 최지혁의 얼굴을 쓱쓱 닦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마 다친 거 아니겠지? 안 다쳤겠지?

“세상에, 꼴이 이게 뭐야.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어?”

나는 최지혁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다행히 멀쩡한 것 같았다.

“준우는?”

내 말에 최지혁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왜.”

“왜라니.”

“……먼저 보냈어.”

나는 최지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보냈다니? 어디를?

“게이트 닫혔어.”

입을 꾹 다물었다. 아, 게이트가 닫혔구나.

“…….”

망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잠깐만…… 게이트가 닫혔는데 얘는 왜 내 앞에 있지?

닫혀버린 게이트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다고 들었다.

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여태까지 빠져나온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게 그거긴 하지만…….

나는 최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궁금해졌다.

진짜 얘는 왜 내 앞에 있는 거지?

준우를 보냈다고 하는 걸 보니, 빠져나가는 출구가 열린 걸 본 거다.

그런데 왜? 어째서 안 빠져나가고 여기 있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최지혁은 안절부절못하고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훑었다.

그리고 내 손목을 보고는 이를 꽉 깨물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일 없었어요.”

“…….”

“진짜. 물론 저놈한테 유부녀라고 구라를 조금 까긴 했는데 별로 큰 문제는……. 최지혁?”

순간 최지혁이 비틀거렸다. 나는 황급하게 최지혁의 팔을 잡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아.”

“뭐야. 어디 아파요? 빨리 말해요! 또 숨기지 말고.”

내가 놀라서 묻자 최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 상제는 기절한 채로 방에 가둬두었다.

안타깝게도 리온과 에르켈도 함께 갇혔다.

왜냐면 에르켈은 봉인진으로 놈을 묶어야 했고, 리온은 공포감 조성 스킬로 상제의 정신력을 계속 깎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지혁이 스킬은 쓰면 쓸수록 는다고 노가다를 시키라고도 했다.

“…….”

최지혁과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사실 나는 지금 단 한 가지 생각에 매여 있는 중이었다.

왜, 남은 거지?

왜, 나를 찾아왔지?

“…….”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바보였다. 최지혁은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지금?

설마 나 좋아하나?

아니?

겨우 좋아하는 거 가지고 던전 안에 갇힐 생각까지 하는 게 말이 돼?

이해가 안 갔다.

나라면 지금 최지혁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긴 도대체 어떻게 찾아서 온 건데?

큰일 났다.

이제 최지혁 얼굴 어떻게 보지?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나는 일단 한숨을 쉬며 천에 물을 묻혀 최지혁의 피부에 엉겨 붙은 핏자국을 일일이 지워냈다.

최지혁은 죄지은 강아지처럼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이제 어떡해요?”

내가 물었다.

그에 최지혁은 느리게 눈을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

음, 뒷일 생각 안 하고 무작정 나를 찾아오셨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도 내 생각 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아, 어떡하지.’

최지혁을 무슨 태도로 대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물론, 거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날 구하러 온 건 너무 고마웠다.

날 안 버리고 찾아왔다는 사실도 너무 고맙다.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문제였다.

나는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도대체 최지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

친구들하고 상의해볼 수도 없고, 엄마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날 위해 기꺼이 던전 안에 갇히려 하는 남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고맙다고는 해야지. 그럼그럼.

“……고마워요. 나 안 버리고 와 줘서.”

“……!”

내 말에 최지혁이 크게 당황했다.

아니, 얘는 내가 고맙다고 할 줄 몰랐나?

왜 이렇게 당황해?

“최지혁?”

“…….”

“최지혁! 고맙다니까?”

최지혁은 꼭 벙어리라도 되어 버린 사람처럼 도통 말을 안 했다.

결국 내가 어깨를 쥐고 짤짤짤 흔들자 한마디 뱉었다.

“원래 목표였던 보스 잡으면 다시 열릴 수도 있으니까, 협박하면…….”

나는 해결책을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왜 또 동문서답이람.

에휴. 내가 뭘 바라.

나는 피식 웃으며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아, 맞다. 내가 오기 전에 뭐 물어봤거든요? 내가 멸망을 막을 수 있다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아요?”

내 말에 최지혁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야 모르죠. 나더러 대뜸 내가 본인 멸망 막을 수 있으니까 아내가 되어라 어째라 하던……. 엄마야, 그거 부러져요!”

최지혁이 쥐고 있던 침대 봉을 결국 부러트려 버렸다.

“기다려. 알아내고 올 테니까.”

최지혁이 좀 화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급하게 최지혁의 옷을 붙잡았다.

“아니, 왜 너 혼자 가요? 나도 가!”

“……싫어.”

저게, 근데 본인이 초딩인 줄 아나. 뭐가 자꾸 싫대?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최지혁을 노려보자 최지혁은 결국 우물쭈물하며 내게 말했다.

“어차피 좋게 말하면 말 안 할 게 뻔하니까…….”

아, 폭력을 쓰겠다는 이야기인가?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정도 폭력에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도 갈래요.”

“뭐?”

“나도 간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