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인당수 별거 없네.”
생각보다 제물로 납치된 것치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이리 오시오.’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 화려한 동양식 궁 하나 띡 있고 끝이었다.
“뭐 어쩌라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나보고 제 발로 찾아와라 이건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확성기에다 대고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그에 내 머리 위에 있던 리온이 경악한 듯 소리쳤다.
“마스터 정신상태 미국 갔냐?”
“악마, 언행에 조심해라. 감히 주군께,”
“고지식 천사. 마스터는 계급제 사회인이 아니다!”
“결투신청인가?”
“둘 다 조용히 해.”
뭔가 주변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앞에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고, 곧 그 사이로 온통 검은색의 비단옷을 입은 남자가 드러났다.
머리도 되게 길었는데,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미남이었다.
물론 조금 위태로워 보이고 매우 위험해 보이는 미남 말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인간이 보스몹임을 직감했다.
큰일 났다.
어떻게 죽이지?
난 아직 사람 죽여본 적 없는데. 아니지, 저 인간은 사람이 아니려나?
“인간 여자.”
남자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왜, 외계인.”
어디서 인간 여자, 인간 여자 하며 반말 찍찍이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놈을 노려보았다.
“……예상대로 당돌하군.”
“너도 예상대로 싸가지를 스틱스 강에 빠트리고 왔구나?”
나는 슬쩍 발을 뒤로 빼고 핸드폰을 들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외형이 변경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업그레이드되었으니까 쟤가 공격해도 뭔가 방법은 있을 거다.
핸드폰 모서리로 대가리를 찍어버린다든가, 아니면 고간을 확.
“우선 내 공간에 온걸 환영하지.”
“오, 나는 별로 환영받고 싶지 않은데.”
“……나는 상 제국의 주신이다.”
음, 안 물어봤다. 나는 대충 시큰둥하게 놈을 쳐다보았다.
날 바로 죽이지 않는 걸 보니, 날 죽일 생각은 아직 없는 건가?
나는 눈을 또르륵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있던 놈이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금세 내 뒤로 와 나를 확 껴안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를 이곳까지 불러오는 데 꽤나 애를 먹었어.”
이 변태가 어디를 만져!
나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놈이 워낙 강해 꼼짝도 못 했다.
놈은 내 턱을 손가락으로 쓰윽 훑으며 말을 이었다.
“망할 내 하수인들이 덜떨어져 내 직접 널 내 거처로 데려왔지.”
놈은 다시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는 내 앞에 나타나 내 턱을 쥐고 비릿하게 웃었다.
“하, 나는 참으로 괜찮은 신이야. 내, 어린 백성들을 위해 이리 큰 결심을 하여 그대를 이곳으로 불렀으니 말이야.”
이놈이 미쳤나. 나는 고민했다. 이대로 고간을 확 차버려? 비녀로 찍어 버려? 핸드폰으로 대가리 깨?
“……이곳의 절대자들은 전부 멸망에 잠식되었지.”
나는 손에 주었던 힘을 뺐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나 또한 점점 잠식되어 이성을 잃어갈 때쯤 그대를 보았다.”
놈이 잘생긴 눈을 반으로 접어 사르르 웃었다.
“그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맞지?”
놈의 질문에 나는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조심 뒤로 물러났다.
“아닌데? 지극히 평범한데? 그리고 징그러우니까 손 좀 떼지?”
“……하하하하!”
놈은 웃기다는 듯 제 미간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는 미친놈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내게 말했다.
“그대의 의견은 사실 필요가 없어.”
그리고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자 사방에서 돌기둥이 솟아오르며 내가 뒤로 물러날 공간을 차단해 버렸다.
탁. 놈의 양팔이 나를 가둬버렸다.
에르켈하고 리온에게 지금 나서라고 할까? 만약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놈이 정보를 푸는 것 같으니까 살살 구슬려서 알 수 있는 정보를 다 빼버릴까?
“나는 그대가 특별한 것을 알고 있지. 본능적으로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난 그대가 필요해. 아주 절실하게.”
놈의 얼굴이 내게로 바짝 다가왔다.
“인간들은 기이한 방법으로 서로의 연을 묶고는 하지. 그리하여, 나도 꽤 친절한 방법으로 그대를 내 것으로 만들 예정이야. 그대는 특별하니까 말이야.”
놈의 오른손 엄지가 내 입술을 쓱 쓸었다.
그리고는 턱을 사선으로 기울이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미쳤다. 조금 큰일 난 것 같았다.
이 끈적한 분위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난 유부녀요!”
나는 황급히 내 입술을 가리며 놈에게 말했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스, 슬하에 아이가 둘이나 있소!”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군. 속세의 일은 잊어라. 나는 그대가 매우 필요해. 필요하다면 네 자식들과 남편을 죽여줄 수도 있다.”
음, 어차피 없어서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여 봐! 나는 절개를 지키겠, 엄마야!”
놈은 나를 번쩍 들어 올렸고,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화려하기 그지없는 침실이었다.
‘마스터, 죽일까?’
‘주군. 지혁지혁 없이도 상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였다.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설미 이게 말로만 듣던 텔레파시……!
일단 새로운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하 웃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단 물어볼 게 좀 있었다.
아직 죽이기에는 이르고, 도대체 내가 왜 특별하다는 건지부터 좀 알아봐야겠다.
“신의 아내가 되어라.”
“와하하하하! 돌겠네.”
아뿔싸. 너무 어이가 없어서 대놓고 웃어버렸다.
진짜 심청이와 용왕님이야, 뭐야.
“정, 나랑 결혼하고 싶으면 티파니 앤 써니 웨딩링 보증서와 함께 가져오시든가. 아니면 난 이 결혼 안 해.”
“……내 아내가 된다면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텐데?”
“오, 나는 천하가 아니라 티파니 앤 써니 웨딩링 진품과 아크로 원자파크 70억짜리 아파트가 갖고 싶은데?”
“……금가락지와 황궁이면 되나?”
“쯧. 신인데 쪼잔하게 금밖에 없어? 잡신 아니야? 금은 나도 사지. 그리고 놀고먹겠다는데 왜 일을 줘. 황궁 가면 일해야 하지 않나?”
내 말에 놈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욕심이 지나치군.”
그에 나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 내가 왜 특별한지 알려주면 뭐, 웨딩링 정도는 금으로 퉁칠 수 있지.”
“…….”
“자고로 결혼이란 애정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왜 특별한데? 왜 내가 필요한데? 네가 날 아내로 맞고 싶은 이유가 뭔데? 내가 그 정도는 알아야 당신한테 쥐꼬리만 한 애정이라도 생길 것 같아서.”
나는 헛소리 못 하게 질문들로 꽉꽉 채워서 몰아붙였다.
그에 놈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듯싶더니 내게 다시 바싹 다가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특별하지. 그대는 내 멸망을 막을 수 있으니 말이야.”
저게 무슨 개소리람. 내가 멸망을 뭔 수로 막아?
어이가 없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 타락한 신이라는 놈은 변태처럼 웃으며 내 옷자락을 쥐었다.
음, 드디어 저놈의 아름다운 대가리를 깰 타이밍이 온 것인가?
“그러니 내가 그대를 놓아줄 리 없지.”
놈이 내 손목을 잡고 제 입술을 꾹 눌렀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늘부로 그대는 내…….”
하지만 그때였다.
“…….”
허공에서 피 칠갑을 한 최지혁이 정적인 표정으로 나타나 내 앞에 엎어져 있던 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벽으로 던졌다.
“커헉!”
그리고 벽이 무너졌다. 최지혁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듯 검으로 놈의 목을 찔렀다.
“너, 너는!”
신이라 그런지 잔기침만 몇 번 하고 금세 최지혁의 공격을 피했다.
“이곳에 어떻게 온 거지?”
“…….”
놈의 말에 최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주변에 있는 것들을 냅다 집어 던졌다.
진짜 화난 것 같았다.
최지혁이 저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공격만 하는 건 처음 봤다.
놈은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최지혁을 붙잡으려 했으나, 최지혁은 재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놈의 멱살을 틀어잡고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무자비하게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냅다 갈겼다.
쾅! 쾅! 차마 사람 때리는 소리라 하기 힘든 굉음이 울려 퍼졌다.
최지혁은 제 피인지 남의 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뒤집어쓴 채로 귀신보다 더 귀신같이 굴었다.
만약 저 타락한 상제놈이 헛소리만 안 했으면 그 상태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커헉! 설마, 네가 여자의 남편……!”
“……뭐?”
최지혁은 드물게 당황했고, 나는 냅다 소리쳤다. 이대로라면 내 구라가 들킨다!
“여, 여보!”
“…….”
나는 살짝 넋이 나간 최지혁을 보고 급박하게 말했다.
“뭐 해요! 잡아야지, 보스! 리온! 에르켈!”
내 외침에 리온과 에르켈이 튀어나와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그대로 상제에게 달려들었다.
“……감히, 날 속였겠다!”
“어머, 내 아이들이 좀 왕성하죠? 리온, 묶고. 에르켈, 봉인해.”
“오케이, 마스터!”
“알았다, 주군.”
나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폈다.
최지혁은 여전히 당황스러운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결심했다.
“내 신기술 테스트 좀 해야겠는데?”
핸드폰을 두어 번 흔들자 핸드폰이 근사한 야구 배트 모양으로 바뀌었다.
오, 이렇게 쓰는 거구나? 내가 상상한 무기의 모양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너무너무 신기했다.
“하, 사람 때려보는 거 처음인데 괜찮겠죠? 어떡하지?”
“웁! 우우웁!”
아뿔싸. 리온이 놈의 입까지 막아버렸다.
뭐, 차라리 저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아내 뭐 어쩌고 어째? 그리고 감히 어딜 만져, 이 미친놈아!”
나는 눈을 꼭 감고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어차피 인간도 아닌데 이 정도 폭력은 괜찮았다.
괜찮지?
“……채유라. 내놔.”
그때였다. 최지혁이 부들거리는 내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가며 내 눈을 왼손으로 가렸다.
곧, 귓가에 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