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45)

내 계획은 완벽하게 이행되었다.

“진아야, 인사해.”

어차피 앞으로 던전은 함께 돌아야 했기 때문에 준우의 집을 아예 옮겨버렸다.

“안녕하세요……!”

“안녕! 나는 채유라라고 해! 너희 오빠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되게 이쁘게 생겼다. 공부도 엄청 잘한다며?”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조금?”

나는 준우의 여동생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최지혁은 별로 인사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내가 대신 해주었다.

“여기 있는 오빠는 최지혁이야. 음, 좀 무뚝뚝한데 그냥 그러려니 해. 보기보다 되게 착해!”

“……야.”

“왜요. 뭐요. 내가 틀려요?”

최지혁은 내 말에 그냥 말하기를 포기했다.

칭찬해 줘도 난리야.

나는 최대한 상냥한 얼굴로 준우 어머니께 말했다.

“이쪽은 박도경 아저씨라고, 저희 자금 부분 맡아줄 분이에요. 그리고 도경 아저씨, 처음 보죠? 이쪽은 강준우라고 하고, 저희 쪽 힐러예요.”

한정식 집에서 단체로 밥을 먹기로 했다.

물론 최지혁은 쓸데없이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했지만 이건 쓸데없는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한테 밥 한 끼가 얼마나 중요한데!

아무튼 우리는 조용히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미리 챙겨온 사업계획서를 나누어 주었다.

준우네 가족이나 도경 아저씨네 가족분들까지 드릴 이유는 없었지만 원래 창립 멤버끼리는 가족들도 다 한 번씩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아, 맞다. 혜성이 안녕. 저번에도 봤던 것 같은데 기억나니?”

“안녕하세요오…….”

나도 우리 아빠 회사 아저씨네 가족들이랑 밥 한 번씩 다 먹어봤는걸?

“다름이 아니라, 미리 말씀드린 대로 저희가 정확히 뭐 하는 회사인지 설명드리려고 식사 자리 마련해 봤어요.”

일단 나는 최지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이쪽이 대표고요.”

내 말에 준우가 눈을 크게 뜨고 내게 물었다.

“응? 네가 아니라?”

“응. 헌터 등급은 최지혁이 제일 높잖아. 어차피 이미 우리한테 대중들 관심이 집중된 상태고, 대표는 제일 센 사람이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물론 가시적인 대표이긴 하지만. 안 그래요?”

내 물음에 최지혁이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지혁이 얼굴이 사납게 생겨서 이쪽이 대표면 아무나 안 건들 거야.”

“오, 맞네, 맞아!”

내 말에 도경 아저씨가 박수를 치며 격하게 동의했다.

사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어차피 이 세계 사람이 아닌데 내가 대표 자리에 앉으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만약에 돌아가는 방법을 찾으면? 그리고 그 순간이 아직 멸망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면?

나는 돌아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남들한테 피해만 준다.

그래서 이게 맞았다.

물론 최지혁한테는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왠지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마 저희가 국가 헌터 조직 이후, 처음으로 공식 출범하는 헌터 단체일 거예요.”

나는 최지혁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에 최지혁이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미 미디어에 노출된 상태고, 솔직히 말해서 당장 현존하는 국내 헌터들 중에 이름이 제일 많이 알려졌습니다.”

“…….”

“뭐…… 마음에는 안 들지만 헌터나 각성자 단체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면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저희 쪽에서는 출범하자마자 정부와 손을 잡을 생각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기업이죠. 소규모 공기업.”

나는 최지혁의 설명에 덧붙여 말했다.

“게이트 관리청이랑 협업이에요. 저희가 먼저 첫발을 끊어 놓으면 다른 길드 조직도 개별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내 말에 준우 어머니가 살짝 놀란 눈으로 우리에게 물었다.

“그러면…… 나라랑 같이 일한다는 거지?”

그에 준우가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엄마,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른 나라 같은 경우에는 출범한 길드들이 다 사조직이거든요? 그럼 나중에 길드가 힘이 세지면 나라에서 통제를 못 하니까 본인들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게 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러다가 나라한테 이용만 당하는 건 아닌가 걱정되네. 물론 다수를 위해서라면 그게 맞지만…….”

준우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그에 최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일이 커질 것 같기는 하지만, 이야기는 미리 해 놨습니다. 게이트 관리청 쪽에서 일하는 지인이 있어서.”

최지혁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가늘어졌다.

“걔 말로는 게이트 관리청 대가……리가 아니라 머리를 본인이 맡겠다는데. 뭐, 저희 쪽이랑은 별로 상관없는 얘기고 저희는 게이트만 돌면 됩니다.”

최지혁은 나름 예의 바르게 말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분명 지성준이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생략을 너무 많이 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리나라 최초 S급 헌터 아시죠?”

“……지성준이요?”

진아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쪽하고 이야기 다 끝내 놨어요. 저희 쪽에서 처음으로 관리청 소속 헌터 길드를 만들고 유명세 좀 타고 그 사람 밀어주기로요. 정확히 말하면 정치 좀…… 하자는 거죠?”

내 말에 도경 아저씨가 좀 아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회의원이라도 하게, 유라 양……?”

“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정확히는 지성준 씨가 포섭해 놓은 정치인들이 있대요. 이번에 대선도 있고 하니까 그쪽 정당에 힘 좀 실어주고…….”

“…….”

“아무튼 국가에 이용당할 확률은 적어요. 그러다가 저희가 다른 나라로 튀어 버리면 오히려 손해인 거 뻔히 아는데 안 그럴 거예요.”

다들 표정이 아득해졌다. 여기서 멀쩡한 건 미리 얘기를 끝내놓은 준우와 최지혁밖에 없었다.

“저희는 그냥 저희 할 일 하면 돼요. 그냥 미리 알아두시고 혹시라도 사람 찾아와서 막 차 한잔하자고 하면 저희한테 전화하신다 하면 돼요. 아니면 게이트 특별 관리청 전화번호 있거든요?”

나는 대충 종이에 번호를 적어주며 말을 이었다.

“이쪽으로 전화하시면 사람들 나올 거예요.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는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

강준우가 최지혁에게 물었다.

“유라, 되게 특이하지 않아요?”

지금 채유라는 강준우의 동생과 놀겠다며 저를 버려두고 가버렸다. 그래서 최지혁은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뭐가.”

“아니 신기하잖아요.”

“뭐가 신기한데.”

“……음. 예. 안 신기해요, 형. 그냥 유라 되게 똑똑하다고 하려고 그랬……. 하하하, 덥다, 하하.”

최지혁은 삐딱하게 앉아서 강준우를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요 근래 게이트를 돈다고 신세를 진 까닭에 단둘이 있기가 매우 불쾌했다.

“그런데 형, 유라한테는 안 들켰어요? 저번에 들어간 던전에서 많이 다쳤었잖아요.”

최지혁은 눈치 없이 물어오는 강준우의 질문에 마른세수를 하며 답했다.

“들키긴 뭘 안 들켜, 제기랄.”

“……오.”

순간 열불이 확 터졌다.

나름 노력했다. 제 딴에는 채유라를 지키고자 그랬다.

빨리 예전의 힘을 되찾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더 당당한 모습으로 채유라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 이만큼 강해졌다고. 그러니까 안심하라고. 내가 지켜줄 수 있으니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결국 몰래 게이트를 들어갔다가 온 사실을 들켰고, 한 소리 들었다.

가끔 내비치는 살짝 체념한 표정을 지을 때는 정말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최지혁은 이렇다 할 대단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채유라에게 그는 여전히 걱정되는 존재였다.

챙김을 받아야 하고, 채유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에이, 그래도 사이좋아 보이던데요? 유라가 생각보다 화 안 냈나 봐요?”

“……야, 집에 안 가냐?”

“유라 들어오면 진아 챙겨서 가야죠. 애 혼자 집에 어떻게 보내요.”

“…….”

마음에 안 든다.

도대체 채유라는 쟤가 뭐라고 제 옆에 붙여 놓으려고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해하려면 할 수 있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강준우는 채유라의 말대로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멍청하다면 멍청하고 똑똑하다면 똑똑한, 그냥저냥…… 마음에 안 드는 놈.

“근데, 형. 저 그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뭐.”

“형 유라랑 사귀는 거 진짜 아니에요?”

“…….”

최지혁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 죄, 죄송해요. 아니구나. 아…….”

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죽일까?’

그가 그런 살벌한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준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또 입을 나불댔다.

“……그럼 썸?”

“그게 왜 궁금한데?”

“아, 그냥 분위기가 좀 애매해서 제가 생각하는 거 맞으면 눈치껏 행동하려고 했죠.”

강준우의 말에 최지혁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당치도 않은 개소리였다.

“썸도 아니면 짝사랑…….”

“싸우자고?”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저는 지는 싸움은 안 하는 주의라.”

“그러면 닥치고 커피나 마셔.”

“넵.”

최지혁은 살짝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서야 깨달은 것도 웃겼다.

채유라가 집에 간다고 할 때마다 발끈하면서 뭘 숨기겠다고.

그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근데 진짜 형 유라 안 좋아하,”

“닥치라니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강준우는 헤실거리며 중얼거렸고, 최지혁은 홀로 분노를 삭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 할 말이 없었다.

흑심을 안 품었다고 하기엔 거짓말이었다.

“음……. 형, 근데 이거 비밀이죠?”

강준우의 말에 갑자기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만약에 제멋대로 그가 채유라를 좋아한다고 떠들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되면…….

“……채유라한테 뭐라고 지껄이기만 해봐.”

지혁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그에 강준우는 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강준우가 나불거려봤자 거짓말이라고 둘러대면 안 되냐고?

‘그게 맞는데 뭐가 거짓말이 아니야. 빌어먹을.’

채유라는 끝까지 알면 안 된다.

그가 그녀에게서 뭘 바라고 있는지.

만약 채유라가 알아버린다면…….

채유라는 모르고 있는 모양인데, 최지혁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채유라는 생각보다 냉정했다.

어차피 기회가 되면 바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특유의 친절함 속에 묘한 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채유라가 그어놓은 선에 제일 가까이 있는 게 그 자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채유라는 유독 그에게 관대했다. 그러니까, 딱, 정말 딱 한 발자국만 더 다가서면 완전히,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잘못하면 그 선을 감히 넘어오려 했다는 이유로 뼈도 못 추리고 밀려나 버릴 수도 있었다.

“제기랄…….”

염치도 없었다.

애초에 그가 무슨 주제로 감히 채유라에게 뭔가를 바란단 말인가.

아무 죄도 없는 채유라를 지옥으로 직접 떨어트린 개새끼 주제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