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거 나도 그냥 리온 확 불러버려?”
최지혁에게 딱히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좀 떨떠름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일부러 평상복을 입고 던전에 들어간 거다.
내가 사준 방어구를 꼈다가 찢어지거나 내구도가 상하면 백 퍼센트 내게 들킬 테니까.
나는 최지혁의 셔츠를 봉투에 담아 놨다. 나중에 수거함에다가 가져다 버려야지.
옷이나 더 주문해야겠다.
앞으로 또 많이 찢어 먹겠지, 뭐.
“아…….”
나는 마른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신경 끄려고 했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될 리가 없었다.
언제부터 나 몰래 던전을 돈 거야?
내가 쉬기 시작한 지는 이제 막 5일째이다.
그리고 최지혁 성격상, 한참 능력치를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을 때는 하루에 던전을 보통은 2탕, 심하면 4탕까지 뛰었다.
여태까지 멀쩡하게 집에 들어온 걸 보니 주제에 또 융통성은 있어서 준우와 입을 맞춘 것 같았다.
“이걸 죽여, 말어?”
그냥 화가 나기보다는 복장이 터졌다. 그래서 나는 성격대로 나가기로 했다.
쟤가 막 나가면 나도 막 나가지, 뭐.
나는 핸드폰을 타타탓 눌렀다. 딱 한 번 신호음이 울리고 곧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유라?”
“언제 와요.”
최지혁은 내가 전화한 게 신기한 모양인지 조금 놀란 듯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지금 현관문 앞인데.”
“아, 그래요?”
나는 전화를 뚝 끊고 비닐봉지에 쑤셔둔 최지혁의 셔츠를 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철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리고 최지혁의 얼굴이 드러났다.
“…….”
“어? 뭐 사 왔네? 손에 든 거 뭐예요?”
그리고 최지혁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내가 손에 든 제 셔츠를 봐서 제 발 저리는 것 같았다.
“너, 그거…….”
나는 최지혁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최지혁이 사온 봉투를 가져가 살폈다.
“헐, 대박. 차돌박이 사 왔네? 양송이도 사 왔어요?”
나는 피에 젖은 셔츠를 대충 식탁 위에 펼쳐놓고 최지혁의 손에 든 봉투를 앗아갔다.
“…….”
물론 최지혁은 사색이 돼서 현관에서 신발도 못 벗고 그냥 얼었다.
“뭐 해요?”
너무 대충 펴놨나? 나는 팔짱을 끼고 식탁을 쳐다보다가 걸레짝이 된 셔츠를 다시 정성껏 펼쳐놓았다.
그러자 최지혁이 휘청거리며 내 쪽으로 달려와 기껏 펴놓은 셔츠를 홱 낚아채서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걸 왜 버려요. 세탁소에 맡기게 내놔요. 그거 비싼 건데.”
“…….”
“아, 피가 너무 많이 묻어서 세탁 안 되려나?”
말문이 막혔나 보다. 눈이 땡그래져서 어떻게든 쓰레기통을 제 몸으로 가리려고 안달이 났다.
이렇게 찔려 할 거면 애초에 찔릴 짓은 왜 했담.
정말 알 수가 없다.
“안 내놔요?”
최지혁이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는 입을 뻐끔거렸다.
마땅한 변명거리라도 찾는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최지혁이 내게 변명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최지혁의 가족도 아닌데 최지혁이 미친 짓 한다고 화내고 뜯어말릴 자격은 없지.
암암. 그렇고말고.
성좌와 화신의 관계로 놓고 봐도 똑같았다.
물론 진짜 성좌라는 것 들은 본인이 키우던 화신이 죽겠다고 난리 피우면 곤란하겠지.
그런데 나는 최지혁을 이용할 목적으로 함께하고 있지는 않았다.
“채유라, 그러니까, 이건 내 게 아니라.”
“최지혁 씨 거 아니면 남의 거예요? 큰일 났네. 경찰서 별론데. 뭐, 처리는 확실히 했어요?”
내 말에 최지혁이 다시 입을 꾹 닫았다. 뭐라고 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을 거면 앉죠?”
“…….”
최지혁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화……났어?”
얼탱이가 훅 하고 나갔다. 지금 저건 또 무슨 질문이야?
내가 최지혁을 째려보자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곧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채유라. 난 다른 의미는 없고, 그냥, S급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누가 뭐라고 했어요?”
“…….”
최지혁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 입을 다시 꾹 다물었다. 그에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최지혁의 팔을 덥석 잡았다.
“……!”
갑작스러운 접촉에 최지혁은 화들짝 놀랐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최지혁의 긴 팔 소매를 확 걷어 올렸다.
물론 중간에 근육 때문에 안 올라긴 했는데 여차저차 낑낑대며 걷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개판이었다. 급하게 치료한 흔적은 있었는데, 다 아물지는 않은 그런…….
진짜 미치겠네?
“선택해요. 1번, 대화로 푼다. 2번, 그냥 이 상태로 신경 끄고 비즈니스 관계로 지낸다.”
당연히 내 말에 최지혁은 대답을 못 했다.
“내가 지금 헷갈려서 그래요. 내가 어디까지 그쪽한테 관여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괜히 선 넘나 싶고. 그러니까 그쪽이 딱 잘라 말하라고.”
“……채유라, 그게 무슨 말인데.”
최지혁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에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내가 그쪽한테 뭐라고 최지혁 씨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어요. 안 그래요?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최지혁은 입술을 꾹 깨물고 조금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상황에 본인이 화를 왜 내나 싶긴 한데 일단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다 이대로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날밤 새울 것 같아서 그냥 내가 말하기로 했다.
“1번이면 잔말 말고 상태창 띄워 봐요. 2번이면 나는 그냥 방에 들어갈래요.”
최지혁은 내 말에 부들거리며 결국 상태창을 뿅 띄웠다.
대충 최지혁의 등급을 살펴보니 벌써 A급이다.
이 말뜻은 무엇이냐.
안 봐도 뻔하지. 결국 나 몰래 던전 오지게 돌았다는 얘기다.
“진지하게 물어볼게요. 들키면 내가 뭐라 할 거 몰랐어요?”
“……아니.”
“아는 사람이 왜 그랬어요?”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최지혁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게 화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최지혁도 불안했겠지. 당장 제네바 S급 때문에 유럽이 초토화가 됐다. 게다가 빌어먹을 차원 관리자 문제도 있었고.
충분히 이해했다.
“왜 미리 말 안 했어요?”
나는 멀뚱히 서 있는 최지혁을 의자에 앉히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냥 계속 말 안 할 작정인 건지, 아니면 정말 할 말이 없어서 입 다물고 있는 건지.
아무리 내가 최지혁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슬슬 짜증은 났다.
왜냐면 나는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모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본인은 나더러 아직 위험하니까 리온 소환하지 말라며. 그런데 정작 그 소리 한 사람은 던전에 들어가서 피떡 되어서 오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예요?”
내 말에 최지혁이 발끈하며 대답했다.
“피떡이라니.”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 말의 포인트가 그거예요?”
“…….”
“나는 최지혁 네가 하지 말래서 안 했어요. 나 걱정하는 눈치니까 나도 눈치껏 네 말 들어줬다고. 그런데?”
최지혁이 내 시선을 피했다.
“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게이트 들어갔다 나왔네. 등급도 엄청 오른 걸 보니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하라는 대로 힐러는 데려갔어.”
어이가 없었다. 지금 저게 변명이야?
“아, 그러면 준우는 알았는데 나만 몰랐다? 나한테만 얘기를 안 했다? 왜 그랬을까? 나 왕따 시켜요?”
“…….”
또 입 닫는다. 환장하겠다. 화를 안 내려고 했는데 속이 미약하게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아니? 끓어올랐다.
“왜, 나만 신경 써요? 나는 네 심정 생각해서 리온 부르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네 기분 맞춰 줬어요. 네가 걱정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넌 내 생각 안 해요? 이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신뢰 문제,”
그때였다. 최지혁이 내 말을 끊고 발끈하며 소리쳤다.
“내가 약해서 네가 그렇게 됐는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
나는 갑자기 씩씩대는 최지혁에 놀라서 입을 꾹 다물었다. 쟤가 이번에는 또 뭐라는 거야?
“그 빌어먹을 서번트인지 뭔지한테 붙잡혔을 때 아무것도 못 했고, 그 개 같은 차원 관리자인지 뭔지가 쫓아왔을 때도 도망만 갔어. 그런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
“너한테 말했으면. 달라지는 게 있어? 그 빌어먹을 효율! 나도 알아. 내가 덜떨어진 새끼라 네가 있어야, 던전 수월하게 깨는 거 나도 안다고! 그런데, 네가 던전에 들어가면? 거기서 또 기절이라도 하면? 잘못되면?”
최지혁이 답답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등신이라 널 못 지킨다고. 내가! 능력이 딸려서 그게 안 된다고! 그래서, 그래서…….”
최지혁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영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최지혁이 날 뭘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런데,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그래야겠다 싶었다.
왜냐면 나는 집에 돌아가고 싶으니까.
만약, 여기서 내가 최지혁의 생각을 알아 버린다면, 내 상황이 상당히 곤란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버렸다.
“…….”
딱, 여기까지가 좋았다. 그냥저냥 애매한 관계 말이다.
아무리 내가 그 화신 성좌 시스템에 거부감이 든다고 해도, 최지혁과 나는 성좌와 화신 관계다.
그러니까, 최지혁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날 감싸고도는 건 당연한 거다.
당연한…… 거겠지?
“……그러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이지 왜 본인을 깎아내리고 난리야. 네가 왜 등신이에요?”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포션을 구매했다.
그리고 최지혁의 자리에 살포시 올려놨다.
“흉 져요.”
“…….”
“뭐 해요? 빨리 안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