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45)

최지혁이 문제를 해결할 때 변명은 자주 채택되지 않는 방법들 중 하나였다.

왜냐면 최지혁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으니까! 굳이 변명하면서 살 필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나 보다.

“나랑 채유라가 뭐. 네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나 본데 솔직히 말해서 난 아무것도 아니고,”

“음, 그러기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이 보였는데요. 저도 뉴스나 게이트 보도자료 많이 찾아보거든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클리어 목표가 정해지지 않았던 적은 전 세계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게다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제 시스템창에 뜬 건 명백한 오류메시지였어요.”

준우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유라야, 너무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까지 입 가벼운 스타일 아니야. 동업하자며. 나 계속 너랑 게이트 같이 들어가고 싶어.”

준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지혁은 커다란 덩치로 내 앞을 가로막고 준우를 째려보았다.

“……물론 형이랑도 같이 들어가고 싶다는 얘기였어요. 하하.”

준우는 뭔가 체념한 듯한 어투로 허허 웃더니 내게 들고 있던 책 하나를 건네며 물었다.

“근데, 리온은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거야?”

나는 준우가 건넨 책을 최지혁에게 도로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채유라, 어디 가.”

아무래도 가까이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위로한다고 위로가 되겠느냐만, 저대로 둬서는 안 된다.

나는 최지혁의 부름을 가볍게 무시해주며 핸드폰으로 ‘천재약사의 꿈나라 동산 마음안정제 A-1b’를 구매해 리온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온, 괜찮아?”

내 물음에 리온이 천사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천천히 내 쪽으로 돌리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방긋 웃었다.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마스터? 어차피 멸망은 예견되어 있었는걸?”

나는 리온의 손목을 잡고 최지혁과 준우가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이제 저런 거 그만 보게 해야겠다.

“아 해.”

“……마스터, 뭐 하냐.”

나는 리온의 입을 벌려 아이템을 친절하게 먹여 주었다.

“웩.”

“뱉지 마.”

“이게 뭐냐!”

리온은 새빨간 혀를 쭉 내빼며 열심히 웩웩 댔고, 나는 그런 리온을 자리에 앉히고 다시금 책을 뒤져 보았다.

“채유라.”

최지혁이 내게 푸른색 책 다섯 권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준우가 내 뒤편을 가리키며 덧붙여 말했다.

“유라야. 저기 책장 좀 봐.”

준우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엉망진창이 된 책장이었다. 리온은 나른한 얼굴을 하고 내 손에 있는 책 다섯 권을 통째로 앗아가며 말했다.

“천사들은 예로부터 퍼즐을 좋아했지. 귀찮게. 머리 쓰는 거 참 좋아한단 말이야. 세상 멍청하면서.”

리온은 푸른색 책을 책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바닥을 쿵쿵 발로 두어 번 구르며 말했다.

“렘브란트가 심장에 꽂아 넣은 건 주신 라크펠트의 봉인 검. 그리고 이 밑에 그려진 건 아주 고대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봉인진.”

리온의 설명에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천사는 무언가를 봉인하려고 했다.

“보다시피 대천사의 피가 아주 잘 흐르는 걸 보면 봉인의식이 성공하긴 한 모양이야?”

리온의 말에 최지혁은 골치 아프다는 듯 앞머리를 쓱 쓸어 넘겼다.

“그래서. 지금 봉인이라도 풀어야 한다 이거야?”

최지혁의 말에 리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혁지혁, 뭐 그리 당연한 걸 새삼스레 묻고 그러냐?”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왜냐고?

최지혁은 퀴즈에 매우 약하니까! 물론 최지혁이 멍청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최지혁도 꼭 해야 하는 거면 한다!

다만 머리 쓰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

귀찮아한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화면 밖에서 내가 다 검색해서 풀어줄 테니 굳이 머리 굴릴 필요성도 못 느꼈을 거다.

“근데 멸망하는 와중에도 애써 봉인을 했는데 그걸 푸는 방법을 남겨 뒀을까?”

준우가 리온에게 묻자 리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봉인이 왜 봉인이겠어? 풀리라고 있는 거다, 준우준우. 생각해봐. 여기 뭘 가둬놨겠어? 세상은 이미 멸망했는데 도대체 봉인할 게 뭐가 있다고.”

리온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멸망한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씨앗 같은 거……?”

내 말에 리온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마스터 똑똑해!”

나는 여태까지 얻은 정보들을 모아 보았다.

이곳은 이미 멸망한 세계이다. 하지만 리온의 말대로 대천사라는 사람이 멸망 이후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두었다면?

이 세계는 더 이상 멸망한 세계가 아니게 되는 것 아닐까?

그렇게 되면 클리어 목표가 달라지려나?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네요. 따로 시도해 볼 것도 없어 보이고.”

준우가 대천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봉인의 검이라는 걸 그냥 빼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

리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쟤들이 그럴 때를 대비해서 함정 같은 걸 설치 안 해 놨을 리가 없다. 준우준우.”

그에 최지혁이 피식 웃었다.

“함정? 어차피 다 멸망했는데 몬스터를 숨겨놨을 리도 없고, 해봤자…….”

그리고 들고 있던 검으로 책장을 휙 갈라버렸다.

“엄마야!”

와르르!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책들이 밑으로 우르르 쏟아졌고, 그 뒤로 천사상 4구가 시퍼런 무기들을 든 채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자, 봤지? 저 검을 빼면 보나마나 쟤들이 움직이겠지. 책은 눈속임이야.”

그리고 나는 최지혁의 등짝을 후려칠 수밖에 없었다.

“야! 무모하게 뭐 하는 짓이에요!”

“아씨, 채유라, 왜 때려!”

“어우, 진짜 이 인간 때문에 내가 간담이 막 서늘해! 저걸 무슨 자신감으로 다짜고짜 부숴요?”

준우가 하하하 웃으며 나를 최지혁에게서 떼어내며 말했다.

“유라야, 일단 잘 풀렸으니까 된 거 아닐까? 형, 저거 이제 부수면 되는 거죠?”

최지혁은 심통 난 표정으로 준우를 보더니 곧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무모하게 상의도 없이 막 튀어 나가면서. 나라고 안 될 건 또 뭐야.”

나는 최지혁을 째려봐 주었다.

저렇게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한데.

아니 근데 저게 나랑 또 싸우자는 거야, 뭐야!

“됐고, 이리 와.”

최지혁은 또 내 손목을 잡고 제 옆으로 질질 끌어당겼다.

“봉인을 푸는 것 말고 다른 묘안이 있으면 다들 말해봐.”

최지혁의 말에 준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거 말고는 없어 보이긴 하는데…….”

“…….”

“…….”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가?”

“고?”

“진짜 해요?”

그에 최지혁이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쑥 빼내며 말했다.

“해.”

그리고는 그대로 망치를 조각상 쪽으로 집어 던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부서진 천사상에서 뭐가 우수수 떨어졌다.

보아하니 아이템 같았다.

푸른색 보석 4개와 시계태엽 장치들.

핸드폰 화면에 아이템을 담아보니 전부 가격이 상당했다. 기본 30만 원부터 시작하는 걸 보니 등급이 매우 높은 아이템일 게 분명했다.

리온은 천사상 밑에 떨어진 보석들을 주워들며 내게 물었다.

“마스터. 이거 내가 먹어도 되지?”

극단적인 표현에 준우와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저게 뭔 줄 알고 먹는다는 거야?

“야, 뭔데 막 먹어! 기다려!”

나는 황급하게 리온에게 달려가 이미 반쯤 입에 구겨 넣은 보석을 빼냈다.

“우왁!”

“이게 뭔지 설명하고 먹어! 뭔데!”

내가 리온의 등짝을 후려갈기며 말하니, 리온은 억울하다는 듯 꽥꽥대며 내게 그 푸른 돌의 정체에 대해 설명했다.

“마나석이다! 마나석! 내가 지혁지혁인 줄 아나, 아무거나 처먹게!”

“야, 내가 언제 아무거나 처먹었는데!”

리온의 때아닌 저격에 최지혁이 발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온은 열심히 궁시렁댔다.

“지혁지혁은 미각이 없잖아! 그저께도 상한 음식 먹고 마스터가 그거 버릴 때 앗 한 거 내가 봤다!”

나는 가만히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그에 최지혁이 크게 움찔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어쩐지, 회귀 전에도 돈이 아무리 많아도 라면만 처먹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냉장고에 있던 어묵 볶음 먹었어요? 내가 그거 만든 지 2주 지났다고 먹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걸 왜 먹어!”

“……안 뒤졌으니까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최지혁, 뒷걸음질 치지 말고 당장 이리 안 와요?”

내 말에 준우가 옆에서 한숨을 폭 내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유라야. 일단 형보다는 저 천사상부터 부수는 게 낫지 않을까?”

순간 아차 싶었다. 최지혁은 빠르게 시치미를 떼며 나머지 천사상을 착실하게 부숴 나갔다.

그리고 리온은 땅에 떨어진 마나석을 착실하게 주워 먹었다.

“헿, 최후 병기라 그런지 꿍쳐놓은 전설급 다 때려박았네. 다 내 거지롱.”

실시간으로 리온의 레벨이 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저걸 다 팔면 엄청난 부자가 되겠지만 리온의 레벨이 먼저였다.

아쉽긴 하지만 꾹 참고 바닥에 잔해물처럼 떨어진 톱니바퀴만 주워다 팔았다.

이제 정말 돈 걱정 따위는 안 해도 될 만큼 잔고가 넉넉해져서 좀 뿌듯했다.

최지혁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통보하듯 말했다.

“뽑는다.”

최지혁이 있는 힘껏, 대천사의 심장에 꽂힌 검을 뽑아내는 순간, 최지혁과 준우의 시스템창이 붉게 달아오르며 알 수 없는 문자를 띄웠다.

살짝 느낌이 이상했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핸드폰도 미친 듯이 윙윙 울려서 더 그랬다.

나는 불안한 눈초리로 핸드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알림]

- 클리어 조건(NEW!)

<서번트 퀘스트>

: 이미 정리된 세계의 최후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차원 관리자를 피해 씨앗을 부화시켜 서번트로 삼아 ‘지구 3ab-1934’로 귀환하세요!

- 서번트 부화까지 00: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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