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혁은 가만히 채유라의 뒤통수만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미 네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이 있었고, 너는 그 예언을 몰래 입수해서 천사들한테 붙잡혔다?”
“……그리고 마스터가 알다시피 인간계로 도주했지. 걔들이 내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중간에 들켜서 인간한테 봉인되어 버렸어.”
그냥 계속 후회만 하고 있었다.
어쩌자고 감당도 안 될 소리를 지껄였지?
자기 세계로 돌아간다는 말에 그냥 이성이 뚝 끊겼었던 것 같다.
최지혁 스스로도 웃겼다.
‘채유라가 날 동정하든 말든 내가 뭔 자격으로 화를 내는데?’
하지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이미 터져버렸다.
도대체 그가 채유라한테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냥, 다른 건 몰라도 최지혁은 채유라가 필요했다.
“음……. 리온을 그 E급 던전에서 만났다고 했지?”
“응. 왜인지 모르겠는데, 이곳도 거기랑 같은 세계 같고……. 아, 모르겠다. 머리 터지겠네.”
당장이라도 무릎 꿇고 빌어야 할까? 빌까? 미안하다고 빌면 용서해 줄까?
용서한 다음에는?
그에게는 지금 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죄가 존재했다.
채유라를 그의 세계로 소환한 것.
처음 만났을 때 그냥 말했어야 했다.
미안하다고. 널 이 세계로 끌고 온건 빌어먹을 다른 존재도 아니고 바로 ‘그’라고.
지금이라도 말할까? 하지만 그 사실을 있는 대로 다 불어버리면 지금처럼 단순히 말을 안 하는 수준이 아니라 영영…….
‘제기랄, 어차피 원래 세계로 돌아가도 평생 만날 일 없을 텐데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
채유라를 왜 신경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최지혁은 그렇게 가만히, 이유를 생각하다가 채유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제야 알았다.
‘모르긴 뭘 몰라.’
은연중에 다 알고 있었다. 채유라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대하는지.
채유라는 일반인에다가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기억하기로 채유라는 그가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생각해 보면 딱 대학교 강의 시간만 빼고는 연락이 두절된 적도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 끌려오기 직전에도 그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다 알고 있었다.
뭐? 동정심?
웃기지도 않았다. 동정심은 개뿔.
겨우 동정심 따위가 본인한테 도움 따위 되지 않는 일개 화면 속 인물한테 본인 일상을 갈아 넣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고?
개소리였다. 정말 개소리였다.
함께 지내면서 채유라가 그를 얼마나 배려해 주는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늘 그렇듯 최지혁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아, 잠깐만. 대충 생각해 보니까 뭔가 느낌이 오는 것 같기도…….”
엿 같았다.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결국 모두 그의 탓이었다. 채유라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도, 오기 전, 차에 치여 죽을 뻔한 것도.
당장이라도 멀리, 훌쩍 사라져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고립되고 싶었다.
차라리 채유라 앞에서 사라져 버리면 상황이 더 나아질까? 하지만 그건 싫었다.
버림받기 싫다. 아직 채유라는 그의 옆에 있어야 했다.
염치없는 거 알지만, 조금만, 진짜 조금만 더.
그때였다.
“…….”
채유라의 시선이 귀신같이, 또 자괴감에 빠져있는 그에게 닿았다.
그리고 조그만 입술로 작은 한숨을 뱉으며 그를 불렀다.
“최지혁.”
늘 이런 식이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
꼭, 그가 저 아래 캄캄한 심해 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으면 손을 뻗었다.
그에게 손을 뻗어버리면 본인도 같이 가라앉는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고 저러는 건지.
하지만 숨을 쉬기 위해서는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나랑 얘기 좀 해요.”
물 밖으로 나가고 싶으니까.
***
애같이 굴지 않기로 했다. 내가 최지혁에게 화가 났다고 해서 이대로 계속 최지혁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저렇게 비 맞은 똥강아지처럼 축 처져서 한 마디도 못 하는 거 보니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사실 벌써 싸운 지 40분이나 지나서 좀 누그러진 것도 있었다.
“리온이 말한 거 다 들었죠?”
내 물음에 최지혁은 죄인처럼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궜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할까, 아니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까 고민했다.
“나랑 말 안 할 거예요?”
“……아니.”
최지혁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 진짜 바보같이 헛소리했으면 그냥 미안하다 한마디 하면 될 걸 왜 저러고 있는지 이해가 도통 가지 않았다.
“……최지혁 씨를 대하는 내 태도가 동정심이라고 느껴졌다면, 내가 미안해요. 그런 의도는 정말 아니었어요. 내가 뭐라고 그쪽을 동정해요.”
결국 내가 사과했다. 그러자 최지혁은 제 입술을 꾹 깨물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여전히 나와 시선은 맞추지 않았다.
“최지혁 씨.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최지혁 씨라고 부르지 마.”
저건 또 뭔 소리람. 나는 최지혁의 괴상망측한 요구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쪽이라고도…… 하지 마.”
나는 가만히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나랑 무슨 대화를 하고 싶을 걸까?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거리 두지 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부탁이지? 쟤는 나랑 대화를 난센스로 하는 건가?
나도 모르게 흘끔 리온과 준우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흐르던 최지혁과 내 냉랭한 기운 때문에 둘 다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미안했다.
안 그래도 리온은 본인 세계의 멸망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아 보이는데.
“최지혁.”
“…….”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요. 바닥 보지 말고.”
내 말에 최지혁이 겨우겨우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최지혁은 겉과 속이 다르다.
보이는 것보다 속이 훨씬 물렁해서 그걸 지키려고 가시 난 갑옷을 겹겹이 둘러 입는다.
아무도 그의 옆에 다가올 수 없게끔 말이다.
“미안해, 유라야. 내가 말이 너무 심했지? 앞으로는 말을 예쁘게 해 보도록 할게. 따라 해요.”
최지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용서할 거라고 생각 안 한 모양이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한 것도 앞으로 다시는 안 보려고 꺼낸 말인 줄 아는 건가?
진짜 이 인간을 어쩌면 좋지.
“빨리!”
“……내가 미안해. 내가, 말이 심했어. 내가, 내가 미안해.”
툭, 건드리면 울면서 빌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정신계 보스몬스터도 아니고 왜 저렇게 덜덜덜 떠는 건데?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 유라야. 빨리 해요.”
“……유라야.”
순간 당황했다.
내 말 따라 하라니까 내 이름은 왜 저렇게 부른담?
나도 모르게 최지혁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정말,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미안…… 미안해…….”
최지혁은 의미 모를 사과의 말을 내게 계속 뱉었다.
사실 좀 이상했다. 저 정도로 사과해야 할 일인가?
아 이쯤 되면 나도 뭔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최지혁이 뭐라고, 아까 엄청 화났는데 시간 지나니까 또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최지혁이 저런 태도니 또 괜히 화까지 나는 것 같다.
이게 정상적인 감정의 흐름이 맞나 싶었다.
“야. 최지혁.”
“…….”
내가 짜증 난다는 어조로 그를 부르자 또 눈이 땡그래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아니, 내가 뭔데 저렇게 떨어?
“내가 네 상관이에요? 선생님이야? 아니면 내가 무슨 신이야?”
“…….”
“왜 빌고 앉아있어!”
“아아아악! 아파! 채유라! 악!”
나는 그냥 냅다 최지혁의 구레나룻을 잡아당겨 버렸다. 어차피 맷집도 좋아서 웬만한 데는 때려도 안 아플 것 같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아프긴 뭘 아파! 이게 아프면 여태까지 몬스터한테 칼빵은 어떻게 맞았대? 응?”
“악악! 채유라, 놔줘 야!”
열불이 확 났다. 나는 최지혁의 구레나룻을 놓고 씩씩대며 말했다.
“사과하랬더니 빌긴 왜 빌어? 아주 꿇으라면 무릎이라도 꿇겠어요? 사람이 어떻게 중간이 없어! 중간이!”
최지혁은 억울하다는 듯 내게 잡혔던 곳을 매만지며 울상을 지었다.
최지혁이 내게 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또 미안하다고 할 것 같아서 그냥 냅다 두 손으로 최지혁의 입을 막았다.
“시끄럽고! 우리 이제 화해한 거예요. 알겠어요?”
내 물음에 최지혁이 또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아니 이 인간이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최지혁의 구레나룻을 잡았다.
“아아아아! 아파! 악! 알았어, 채유라! 알았다고!”
“또 그딴 식으로 처져있기만 해요.”
나는 최지혁에게 바짝 다가가 경고하듯 말했다. 그에 최지혁이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안 할게! 평소처럼 하면 되잖아! 아파!”
꼭 몸의 대화를 나눠야 대화가 통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팔짱을 끼고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평소처럼 최지혁은 억울한 듯 씩씩대며 나를 쳐다보았다.
“자 이제 상쾌한 마음으로 여기서 어떻게 나갈지 이야기해볼까요?”
“……뭘 알아내긴 한 거야?”
최지혁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막묘지 던전 기억나요?”
“그게 왜.”
“왜, 그 던전도 멸망 어쩌고저쩌고 떠들었잖아요.”
“…….”
“게다가 이곳 이름도 정리 완료된 차원이고. 왜 정리라는 단어가 붙었을까요? 그리고 왜 자꾸 멸망 얘기가 나오는지 이상하지 않아요?”
내 말에 최지혁이 살짝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최지혁도 뭔가 감이 온 모양이었다.
“제기랄…….”
“말 좀 예쁘게 해요.”
“……대충 알 것 같아. 물론 조금 더 보긴 해야겠지만.”
“뭘 아는데요?”
최지혁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참 고민하다가 드디어 말하기로 결심했는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게이트 안 던전들은 대부분 멸망 중인, 혹은 멸망한 세계라는 거.”
최지혁의 말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사실 최지혁이 저렇게 말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난 안 믿었을지도 몰랐다.
최지혁이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내 핸드폰이 미친 듯한 경고음을 내뱉으며 진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