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45)

최지혁이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건 도대체 무슨 대사란 말인가.

의심받을 만한 일 있으면 무조건 자기가 한 걸로 돌리라니?

“그럼 내가 은행 금고 털어도 최지혁 씨가 했다고 해요?”

“……그 뜻이 아니잖아!”

나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뭔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나한테 분명 이득인 제안인데도 말이다.

사실 최지혁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만약 내게 특별한 힘이 있어서 남에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보이고, 남들은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분명 관심을 보이고 내 능력을 탐낼 것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다가 내가 각성자가 아님을 들킨다면?

아니면, 내가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이 들통 난다면?

아니지.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면?

“빨리 알겠다고 해. 쟤들 거의 다 올라왔어.”

최지혁이 뒤를 흘끗 쳐다보며 내게 협박하듯 말했다.

“아니, 말이 좀 이상하잖아요. 내가 한 일을 왜 그쪽이 덮어써요…….”

“그럼 일 터지면 화살 다 네가 맞게? 네 능력은 무조건 숨기는 게 좋아. 만약 네가 어떤 존재인지 세상에 드러나면 빌어먹을 개자식들이 너도나도 침 줄줄 흘리면서 달려들 거라고. 감당할 수 있어?”

최지혁의 말에 나는 소심하게 최지혁을 째려보았다.

말 한번 진짜.

“준우한테는 어떻게 할 건데요? 앞으로 계속 던전 같이 돌 건데 준우는 못 속일 거 아니에요. 그리고 속인다고 쳐도 사람이면 분명 소외감 느낄,”

“네가 지금 그런 거 걱정할 때야?”

순간 최지혁이 인상을 빡 쓰고 나를 쳐다보았다.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 아니야?”

“…….”

나는 최지혁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남이야. 지금은 착한 척해도 언제고 돌변할지도 모르는 거고, 남 기분 일일이 챙겨줘 봤자 남는 게 뭐가 있는데?”

최지혁의 말을 대충 해석하자면 사람한테 너무 잘해주지 말고 선 좀 그어라, 나중에 진짜 배신당하면 어떡하냐, 이 뜻인 것 같았다.

내가 시선을 떨구고 땅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최지혁이 크게 움찔거리면서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불안한 듯 저도 모르게 내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되지도 않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네가 곱게 자라서 뭘 모르나 본데, 원래 인간들은 목숨 걸린 일일수록 더 비열하고 냉정해진다고. 쟤한테 우리 정보 다 오픈했다가 저 새끼가 언론이든 다른 길드든 다 풀어버리면…… 듣고 있어?”

뉘앙스를 보니 본인이 막말한 것 같아서 대충 변명이라도 해보려는 것 같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땐 마이너스였다.

지적해 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지적할 만큼 화가 나지도 않았고.

“그래도……, 신뢰를 얻으려면 신뢰를 줘야…… 하는데…….”

“그러니까, 그 자식한테 신뢰 얻어서 뭐 하냐고. 어차피 나중에는 다 갈라질 건데.”

나는 흘끗 준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우리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보이자 저 아래서 기다려주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볼 때 준우는 괜찮은 사람 같았다.

최지혁도 딱히 준우가 미래에 나쁜 짓을 한단 얘기는 안 했다.

그리고 최지혁 성격상 진작 준우가 별로였으면 내가 같이 다니자고 해도 절대 안 다녔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둘만 다니자고 했잖아. 그랬으면 이딴 골치 아픈 일도 없었어.”

“……그래도. 만약에, 내가 내 세계로 돌아가 버리면 최지혁 씨는 혼자잖아요.”

“…….”

나는 최지혁을 흘끗 쳐다보았다. 뭔가 표정이 이상했다.

“당장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없을 때도 믿을 만한 사람 하나 정도는…….”

뭔가 말을 잘못 했나 싶었다. 최지혁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안 좋아졌고, 나는 갑작스러운 정적에 최지혁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지금, 너 설마 나한테 친구라도 만들어 주고 싶은 거야?”

최지혁이 나한테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매서운 어조로 말을 툭 뱉었다.

“…….”

“……너, 설마 나 동정하냐?”

그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 큰일 났다. 말실수했다. 그 뜻은 아니었는데.

“……왜 그런 표정 짓는데?”

“최지혁, 그러니까 나는.”

최지혁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뭐라고 더 말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최지혁은 잠깐 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가만히 생각에 잠긴 듯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겨우겨우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없어 보여? 사회 부적응자 같아?”

최지혁이 자조적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왜 나한테 친절한지 이해 안 됐었는데, 이제 알겠네. 뭐? 네가 가버리면 뭐? 믿을 만한 사람?”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게 동정이 아니면 뭔데. 넌 지금 날 버릴 생각…… 그러니까, 내가 불쌍하니까 그딴 식으로 구는 거지? 내가 불쌍하니까 네 그 잘난 동정심으로 아이템 몇 개 던져주고. 내가 궁상맞으니까 그 빌어먹을 동료 타령이나 하고.”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최지혁의 말이 아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 최지혁을 봐 오면서 불쌍하다고 생각한 적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억울했다.

내가 언제 동정심만 가지고 쟤를 대했는데?

게다가 방금 내가 한 말은 동정심이 아니라 단순히 최지혁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다.

물론 최지혁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쟤가 화내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저런 식으로 나한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말이다.

“…….”

지금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혼자 덜렁 떨어진 내 사정도 안 좋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저 자식 위해준다고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자꾸 기죽으니까 기죽지 말라고 옆에서 똥X쇼도 많이 했고, 최지혁이 선 넘어도 나는 이해하고 넘어가 줬다.

그런데 왜 나한테 화를 내?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가?

최지혁도 나처럼 그냥 실수했구나 하고 넘어가 주면 안 되는 건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건 말건 최지혁은 계속해서 말을 비꽜다.

“그래, 난 너랑 다르게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빚만 잔뜩 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새끼야.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잘난 너 아니었으면 안 그래도 개 같은 인생 뭐 나아질 거 없었겠지. 동정해줘서 뒤지게 고맙…….”

“나쁜 새끼.”

억울해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울면 지는 건데 눈물이 났다.

나는 그대로 최지혁이 잡고 있는 내 손목을 뿌리쳤다.

그리고 따졌다.

“그래, 네 말대로 나 곱게 자라서 나는 너한테 그딴 소리 들을 이유 없거든? 이 나쁜 놈아! 그리고 뭐? 내가 널 동정해? 사고가 어떻게 그렇게 튀는데? 그리고 그게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

내 말에 최지혁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본인도 방금 그가 무슨 개소리를 한 건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딴 식으로 생각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생각해. 굳이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 싹 사라졌으니까. 네 맘대로 하라고.”

사람 호의를 저딴 식으로 받아들이는 인간하고는 이야기할 마음 없다.

나는 그대로 최지혁에게서 등을 돌려 준우와 리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억울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 준우는 정말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나와 최지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건 리온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 뭐냐!”

리온이 깜짝 놀란 듯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쟤가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더 서러웠다.

맞아. 나는 지금 서러웠다.

내가 쟤한테 어떻게 굴었는데, 쟤는 나한테 어떻게 그딴 말을 지껄일 수가 있지?

동정심이라니?

뭐? 곱게 자라서 뭘 몰라? 지가 뭔데 그딴 식으로 말해?

“유라야, 너 왜 그래.”

나는 준우의 말에 얼굴을 손바닥에 처박고 소리 죽여 울었다.

진짜 서러웠다.

내가, 집 떠나서 이런 취급을 받으면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내가 쟤를 어디까지 배려해 줘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한순간에 가족, 친구 다 잃고 여기로 뚝 떨어졌다.

그런데 왜 나만 최지혁 사정을 신경 써줘야 하는데?

그래 봤자 쟤는 나를 저딴 식으로밖에 생각하는데.

물론 최지혁이 말만 저렇고 속으로는 안 그럴 거 알긴 하는데, 그래도, 짜증 나고, 억울했다.

“마, 마스터?”

리온은 완전 당황한 듯 엉엉 우는 나를 보고 멍하니 있다가 곧 최지혁에게 뭐라 뭐라 말했다.

“너 미쳤냐, 지혁지혁?”

최지혁이 여태껏 멍하니 있다가 내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채유라, 그러니까 나는…….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고…….”

나는 눈을 소매로 벅벅 닦고, 리온의 손을 잡아 앞으로 잡아끌었다. 저 인간하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치기 어린 행동인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사람 마음이 항상 이성적일 수는 없잖아.

정말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형, 왜 그래요?”

준우의 말에 최지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했다.

지금 뭐가 문제인지 알긴 하는 모양이다.

“…….”

리온과 준우가 흘끔 내 눈치를 봤다. 뭐라고 말 좀 해보라는 눈치 같았다.

“뭐 해, 다들?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할 거 아니야. 저기가 중심부라 그랬지? 뭔가 단서가 나올 거야.”

내 말에 준우와 리온이 최지혁을 흘끔 쳐다보며 뻘쭘하게 대답했다.

“응? 아, 응. 그래그래.”

그리고 최지혁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열심히 내게 말을 걸었다.

“얘기 좀 해.”

나는 이를 악물고 무시했다.

“채유라. 내가 잘못 말했으니까,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지만 최지혁은 끈질기게 날 졸졸 쫓아오며 애원하듯 자꾸 말을 걸었다.

시끄러운데.

“그쪽이랑 할 얘기 없어요.”

“……10분만, 아니 1분만 다시 얘기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최지혁 씨 말대로 나는 곱게 자라서 나한테 그딴 식으로 구는 인간하고는 굳이 말을 안 하고 싶네요.”

내 말에 준우와 리온이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혁지혁, 설마 마스터한테 인성질 했냐?”

“……형이 유라한테? 말도 안 돼.”

최지혁은 본인이 헛소리해놓고 상처받은 개새끼처럼 처량한 얼굴로 내 발끝만 쳐다보았다.

아니, 왜 저러는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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