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 내가 아까 말했잖아. 기억 안 나남? 왜 여기 사람들은 멸망 중인데 천하태평이냐고?”
“…….”
리온의 말에 지성준이 입을 꾹 다물고 가라앉은 눈빛으로 우리를 보았다.
“하. 정말이지 금제 때문에 내 입 가지고 말도 못 하고 답답해 죽겠다, 마스터.”
그건 최지혁도 마찬가지였다. 최지혁은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곧 내게로 몸을 기울인 채 속삭였다.
“채유라. 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그에 나는 이를 악물며 그에게 똑같이 속삭여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집 가서 얘기해요.”
“나는 당장 알아야겠,”
그때였다. 지성준이 열 받는다는 듯 테이블을 쾅 내려치며 눈을 매섭게 뜨고 말했다.
“누구 염장질러? 작작 안 해?”
그리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본인도 현재 상황이 굉장히 착잡한 모양이었다.
일단 회귀는 했고, 최지혁은 일전에도 여러 번 놈의 뒤통수를 쳤기 때문에 못마땅한 것도 같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과 같은 회귀자는 최지혁밖에 없으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했다.
사실, 세계 멸망이라는 단어는 내게 좀 까마득한 단어였다.
솔직히 적응도 안 되고, 현실감도 없었다.
“나랑 거래 하나 하지?”
지성준이 제 시스템창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아이템 하나를 우리 쪽으로 쓱 내밀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펜이었다.
‘서약의 깃펜.’
주로 각성자들끼리 계약할 때 주로 쓰는 아이템이었다.
그래도 거의 유일한 S급 각성자라고 포인트 꽤나 번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저 아이템이 꽤 값이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이 세계 기준으로 말이다.
내가 사면 저건 1원도 안 하는데.
“곧 각성 검사 시작될 거야. 네 등급 내 권한으로 숨겨 줄 수 있어. 대충 A 정도로 하면 S급 게이트 터졌을 때 입장하는 거 무리 안 갈 거고.”
지성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뭔 소리지? 갑자기 S급 게이트 얘기를 왜 꺼내?
설마 싶었다.
에이, 아직 S급 게이트는 안 터진다고 최지혁이 말했다. 그동안 등급 열심히 올려놓으라는 소리겠지?
“……장난하냐?”
최지혁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지성준이 약 올리듯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장난 아닌데. 진지한데. 곧 S급 게이트 터지는 거 알잖아?”
지성준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S급 게이트라니? 최지혁은 분명 나한테 아무 말 안 했는데. 오히려 당분간은 안전하다고까지 했다.
“준비하셔야지?”
최지혁이 나를 쳐다보며 불안한 듯 미세하게 발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대충 내 귀를 막았다.
물론 대충 막았기 때문에 뭐라 하는지는 다 들렸다.
아무래도 지성준이 내가 최지혁의 회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하니 못 듣게 하는 척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제네바 S급 던전은 권한 없어서 못 갈 텐데.”
“내가 바보냐? 우리가 EU 가입 국가도 아니고, 어차피 스위스는 못 가.”
스위스는 유럽연합 소속 국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참았다.
“일본 S급. 거기 보스 우리가 잡……을 건데, 염병. 둘이 안 떨어지냐?”
지성준의 반응에 괜히 민망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입 다물고 있긴 했지만 포즈가 상당히 민망했기 때문이다.
“지혁지혁만큼 성격 더러운 인간 남자. 적응해라. 원래 이래.”
“……엿 같네?”
그러나 최지혁은 앞에서 지성준이 욕을 하든 말든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일본 S급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진압해라? 내가 왜.”
“새끼야, 그걸 진압해야 한국까지 그 미친놈들이 못 건너오니까 그러는 거 아니야!”
지성준이 화가 난 듯 버럭 소리를 질렀고, 최지혁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넌 뭐 하고?”
“야. 너 나랑 장난하냐?”
분위기가 또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둘이 떠들라고 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아무튼 지성준의 말을 정리하자면 제네바에서 S급 게이트가 터지고, 곧 일본에서 게이트가 하나 더 터진다는 건데…….
몇 개월이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이곳에 떨어진지도 벌써 5개월은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 말인즉, 내가 최지혁과 그 빌어먹을 ‘성좌 계약’을 맺었던 시점도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근접 국가에 S급 터지면 그래도 한국에 S급 한 명은 버티고 앉아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제기랄, 이미 공무원 하겠다고 지랄지랄 했는데 내가 남의 나라 S급 게이트 쳐들어가는 걸 노친네들이 가만히 보고 있겠냐?”
“그러니까 내가 왜 그 짓을 하냐고.”
“X발, 말귀 못 알아처먹냐? 나 말고 우리나라에 능력자가 너밖에 없는데 뭐 어쩌라고! 그렇게 걱정되면 네 여친님은 떼고 가면 되잖아, 새끼야.
지성준의 말에 리온이 혀를 끌끌 차며 대답했다.
“안 돼, 인간 남자. 지혁지혁이 그랬다가는 마스터한테 대가리 깨져.”
“…….”
나는 살포시 내 귀에서 최지혁의 손을 치웠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남?”
***
도경 아저씨는 최지혁과 인생의 담화를 깊게 나눴는지 저녁에 만났을 때는 한껏 착해진 눈동자로 내게 말했다.
“자, 불법 자금을 어떻게 세탁할지 생각은 해 오셨어?”
당연히 생각해 왔을 리가 없었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구워지고 있는 삼겹살만 쳐다보고 있자 도경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그럼 법인은 내셨나? 거, 저번에 회사 차린다고…….”
“거기 인간 남자, 고기 탄다. 고기나 뒤집어라.”
“……음.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하하!”
아저씨는 해탈한 듯 하하하하 웃었고, 최지혁은 매서운 눈으로 아저씨를 째려보며 말했다.
“내가 그거 해결하라고 당신 고용한 거 몰라?”
“아니, 내가 무슨 만능이여? 지금 게이트 터져서 안 그래도 그거 복구한다고 세금 많이 나오는데, 걸리면 큰일 나! 아무리 나라 구하는 헌터 양반이라도 불법자금 다 털린다고. 아오, 큰일 났네, 큰일 났어.”
갑자기 슬퍼졌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저씨, 그럼 저희 서울 못 가요?”
“서울 같은 소리! 거 서울에 있는 부자들 세무조사 싹 다 들어갔어. 백 프로 걸린다, 걸려.”
아저씨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더니 핸드폰으로 뭘 뚝딱뚝딱 살펴보며 말했다.
“서울은 못 가고 인천에서 월세방으로 좀 좋은 데 알아봐야 해. 세금 무서운 줄 모르는구만. 일단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볼 텐데…….”
그에 최지혁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아저씨를 쪼기 시작했다.
“현찰로 30억 있잖아. 어떻게 못 해? 세금 내도 상관없다고.”
“그러니까, 최지혁 군. 이게 합법적인 루트로 번 돈이 아니라, 세금이 문제가 아니고 다 몰수하고 벌금 낸다니까? 딱 봐도 불법인 게 너무 티 나잖아.”
아저씨는 착잡한 얼굴로 최지혁에게 속삭였다.
“게다가 자네 빚도 갚아야 할 거 아니야. 물론 내 빚도. 그러니까, 벌금은 안 돼. 빨간 줄도 안 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말도 안 돼. 30억을 벌었는데 서울 상경이 어렵다니!
“일단 빚부터 갚아요. 그리고 월세도 상관없으니까 인천에 사무실하고 괜찮은 집 구하죠. 차도 더 좋은 걸로 새로 뽑고. 그리고 뭐, 꼭 게이트가 서울에서만 열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최지혁이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로 가만히 불판을 쳐다보았다.
환장하겠다.
최지혁이 왜 저런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가 갔다. 최지혁은 계속 현재 우리의 재정 상태에 대해 안절부절못했으니까.
꼭 본인의 치부를 들키기 싫은 것처럼.
최지혁이 이미 빚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빚 얘기를 안 꺼내려는 것부터 딱 보였다.
그래서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아니, 내가 서울 펜트하우스로 이사 가고 싶다고 떼쓴 것도 아닌데 왜 저런데.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 일단 거 돈세탁 내가 10억까지는 어떻게 해볼 테니까, 서류들 다 준비해 놔.”
“와, 대박 10억.”
내가 10억에 감탄하자 도경 아저씨는 인상을 팍 쓰며 경고하듯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리 각성자라도 걸리면 끝장이야, 끝장!”
음, 사실 등급 높은 각성자는 살인을 해도 감옥에 처넣기 매우 어려워진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일단 참았다.
아직까지 이 세상은 법과 상식이 통하긴 하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는 최지혁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좋아요! 천천히 하면 되죠. 당장 돈이 급한 것도 아닌데요, 뭐.”
최지혁은 죄지은 사람처럼 계속 뚱한 얼굴로 연탄불만 쳐다보았다.
그에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최지혁에게 속삭여주었다.
“수틀리면 지성준더러 해결하라고 해요. 어찌 됐건 공생 관계인데 도와주겠죠, 뭐. 우리가 기업 회장처럼 막 100억 단위로 빼돌린 것도 아닌데.”
“…….”
그에 최지혁이 이를 빠득 갈았다. 또 자존심은 세서 지성준한테 뭘 부탁하기는 죽어도 싫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용어를 정정해 주었다.
“도움 요청이 아니라 등골 빼먹는 거니까 안심해요.”
그에 리온이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가만 보면 마스터가 제일 무섭다.”
“……입 안 닫아?”
“된장찌개 시켜주면 조용히 하징.”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이모님! 된장찌개 하나 추가요!”
“공기밥도!”
“……공기밥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