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45)

최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의외였다. 계속 혼자 다닌다고 고집부릴 줄 알았는데, 은근히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다른 나라 같은 경우에는 이미 길드들이 등장했고, 활동을 시작했어. 앞으로 몸집을 불려갈 예정이고.”

최지혁은 나른하게 한숨을 쉬며 미간을 문질렀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꽤나 골치 아픈 듯 보였다.

“채유라. 말해, 네 계획.”

최지혁이 나를 쓱 쳐다보며 물었고, 나는 여태까지 내가 생각했던 계획들을 줄줄이 뱉었다.

“돈, 명예, 권력. 다 잡을 거예요. 무시 안 당하고, 우리가 무조건 갑의 입장에 설 수 있게끔.”

그리고 손가락 다섯 개를 펴고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그러려면 다방면으로 알고 지내야 할 존재들이 있겠죠? 정계, 제계, 언론, 각성자 및 헌터들, 그리고 법조계까지.”

최지혁의 세계를 지켜봐 와서 알고 있었다.

최지혁의 세계는 빠르게 멸망한다.

그리고 나는 멸망을 막아야 했다.

물론 이 세계가 나의 세계는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살아야 돌아가든지 여기서 쭉 살든지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여기가 멸망해 버리면 난 어떡해?

그러니까, 멸망은 안 된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앞으로 생길, 혹은 이미 생긴 길드는 보통 각성자, 즉 헌터 영입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우리는 좀 다른 식으로 운영해볼까 해요. 소규모 던전 공략 집중 컨설던트, 뭐 이런 거?”

그때였다.

“유라야, 형, 이것 좀 봐봐요.”

준우가 조금 다급하게 제 핸드폰을 내밀어 실시간 뉴스 영상을 보여주었고, 그 안에는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새파란 회견장에서 침착한 표정으로 비쳤다.

지성준이었다.

-“게이트 도시 붕괴 대응, 특별 대처방안 회의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브리핑은 게이트 특별 관리부 지성준 S급 각성자가 진행합니다. 먼저,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게이트 관리 및 대응 계획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최지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괴랄해졌다. 꼭 ‘이 새끼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게이트 특별 관리부 지성준입니다.”

솔직히 나도 멀끔하게 검은색으로 머리칼을 물들이고 양복을 입은 지성준을 보고 놀랐다.

‘그러게, 쟤가 왜 저기 있지?’

내가 알기로는 정부랑 뭔가 할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는데. 실제 내 기억으로도 지성준도 최지혁과 성향이 비슷했다. 쟤도 혼자 다니는 거 좋아했던 것 같은데. 등급 높은 애들 특징인가?

-“현재, 국민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게이트 공략과 관리에 대한 범정부적 대응을 실시하고 있지만, 상황적으로 여러 어려움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최지혁이 화면 속 침착하게 브리핑을 이어가는 지성준을 보고 낮게 욕을 읊조렸다.

“……저 새끼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실시간 라이브 영상 옆으로 미친 속도로 채팅 스크롤이 올라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몇몇 훌륭한 각성자 의인분들 덕분에, 다른 국가들에 비해 게이트 진압 실패 사례 및 게이트로 인한 사상자 수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나, 나날이 늘어가는 게이트 수 및 타국의 게이트 진압 실패로 인한 몬스터 방출로 인해 비교적 안정적인 이 생활이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큰 상황입니다.”

최지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제 핸드폰을 들고는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거의 반이 욕인 걸 보니 지성준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호소합니다. 국민 여러분, 아픈 기억으로 남은 지난 붕괴 사고를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친구, 애인, 가족.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각성자분들이 필요합니다.”

“채유라. 이 새끼가 선수 쳤는데 어쩔 거야.”

최지혁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화면 속 지성준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분열이 아닌 단합뿐입니다. 각성자 여러분, 힘을 보태주십시오. 함께 게이트 안,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람들을 위협하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가 되어 주십시오.”

“…….”

얼이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내 계획은 최지혁을 일종의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성준이 선수 쳐 버렸다.

이미 화면에는 정부에서 만든 듯한 공익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영상 속 지성준은 다른 헌터들과 멋들어지게 몬스터를 사냥하고 있었고, 그 밑에는 정부 소속 헌터 모집 연락처와 홈페이지 사이트가 적혀있었다.

최지혁이 미치겠다는 얼굴을 하고 마른세수를 하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욕을 읊조렸다.

욕 나올 상황이긴 한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출범해야 하는 각성자 조직은 백호 길드였다.

하지만 내가 성주호를 깜빵에 집어넣는 바람에 무산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처음 출범한 공식 조직이 국가 소속 헌터 협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형, 어떡해요? 그럼 저희 군대처럼 싹 다 잡혀가요?”

“도대체 사고가 왜 그렇게 이어져? 어차피 저거 권유야. 만약에 각성자들 잘못 건드려서 반발하면 정부에서도 통제 불가능이라 강제로 징집 못 해.”

최지혁은 이를 악물고 아직까지도 화면에 멋있는 척하며 떠 있는 지성준을 노려보았다.

“개자식…….”

사실 최지혁이 지성준더러 개자식이라고 할 자격은 없었다.

어찌 되었건, 지성준도 최지혁과 함께 회귀한 상태였다.

지성준도 미래에 이 파, 저 파로 분열되어 있는 헌터 무리들과 게이트 밖에서 각성 능력만 팔아먹고 다니는 각성자들을 보고 환멸이 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아무도 하고 싶지 않아 하는 정부 소속 헌터를 자처했겠지.

원래 정부 소속 헌터들은 공무원처럼 정부에 소속되어 일하기 때문에 큰돈을 만지지 못하는 편이라 게이트에 들어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헌터들에게는 아주 비인기 단체였다.

그렇다고 명예나 권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어쩌긴 어째요? 협업해야죠. 좋네! 어차피 둘이 아는 사이잖아요. 정부 연줄은 끝났네.”

“……지금 저 새끼가 너 납치했던 거 벌써 까먹었어?”

최지혁이 열 받았는지 특유의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좀 같이 오래 있으니까 저렇게 쳐다봐도 하나도 안 무섭다.

“뭐, 그건 그거고. 신경 안 써요. 절대 지성준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사람도 화날 만했으니까, 뭐. 그런데 그때 서로 잘 푼 거 아니었어요?”

“그걸 어떻게 신경을 안 쓰는데!”

그에 최지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인간이 지금 남의 집에서 예의 없이!

“목소리 안 낮춰요?”

“그 자식이, 널…….”

최지혁은 내가 확 째려보자 급 쭈그러들어 우물거리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억울한 듯이 억눌린 목소리로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너한테 그딴 개짓거리를 벌여놨는데 내가 그 자식이랑 풀긴 뭘 푸는데.”

최지혁의 말에 준우는 처음 듣는 얘기인지 아연실색해진 얼굴로 핸드폰 화면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S급 각성자라는 사람이 유라를 납치했다는……뭐 그런…… 미친.”

“그래, 미친 새끼 맞으니까 그 인간이 너한테 접근하면 엿이나 날려주고 꺼지라고 그래.”

“최지혁. 말 예쁘게 안 해요?”

나는 준우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최지혁을 쿡쿡 찔렀다.

“……지성준 이외에 다른 사람이 찾아와도 씹…….”

“…….”

“……는 게 아니라, 입을 다물고 나한테 연락하든가.”

***

준우 어머니는 굉장히 친절하셨다.

“와, 대박. 아, 향긋해…….”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백만 년 만에 맡는 집 김치 냄새를 맡았다. 어른들 없이 둘이 산다고 하니까 반찬이고 뭐고 이것저것 챙겨주셔서 거절할 새도 없이 다 받아왔다.

“마스터. 도대체 저게 어떻게 향긋한 거냐.”

“최지혁 씨, 우리 라면 먹어요.”

나는 상큼하게 리온의 말을 무시해주고 최지혁의 옷자락을 살살 흔들었다. 최지혁이 다른 건 몰라도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였다.

“……좋아?”

최지혁이 어이없다는 듯 김치통을 안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맨날 파는 김치만 먹었잖아요. 그거 니글니글해서 별로예요.”

“허…….”

나는 얼른 김치통을 닫고 냉장고에 넣었다.

“마스터, 그럴 거면 김장을 해라. 마스터가 보던 어비스월드 티비에서도 어제 김장했다!”

“……어비 뭐?”

리온의 말에 최지혁이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리온은 얄밉게 웃으며 최지혁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마스터가 요즘 빠진 아이돌이라고 했잖아. 지혁지혁, 좀 주의를 기울이고 머리에 새겨 넣어라. 참고로 거기 있는 어비스월드 썬이 지혁지혁보다 마스터 취향이라고 했다.”

“…….”

“그리고 지혁지혁보다 성격도 좋다!”

쟤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생각난 김에 ‘어비스월드 에브리웨얼’ 티비나 재탕하려고 식탁 앞에 앉았다.

내 세계에 없는 아이돌이라 그런지 신선해서 좀 관심이 가는 편이었다. 리온의 말대로 그 그룹에 있는 썬이라는 애가 참 잘생겼다.

내가 좋아하던 연예인이랑 비슷하게 생기기도 했고.

“오, 지혁지혁. 냄비 손잡이 부러진다.”

리온의 말에 최지혁을 쳐다보니 라면 냄비를 잡은 손에 힘줄이 돋아 있었다.

“당장 그 거지 같은 호칭 집어치워.”

“어우, 지리겠어. 지혁지혁.”

“집어치우라고!”

“왁! 마스터! 지혁지혁이 괴롭힌다!”

결국 최지혁이 냄비를 들고 도망가는 리온을 때려잡으려 비좁은 주방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뭐, 늘 있는 일이라 이제 감흥도 없다.

동영상이나 봐야지.

-“엔젤들 안녕~! 오늘은 어비스월드 썬타임~.”

“거기 서, 개자식아.”

“멋있는 헌터는 바르고 고운 말을 사용합니다!”

“멋 같은 소리 하네. 안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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