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45)

의외였다. 최지혁이 저렇게 어른스러운 말을 한다고?

“네? 그, 그래도 게이트 안에 자주 들어가려면 일단 수업은 자주 못…….”

“교수한테 말해.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그거 하나 편의 안 봐줄 리가 있어? 웃돈 얹어주든가, 협박을 하든가 해서 그 교수한테 과외라도 받으라고.”

“…….”

“세상이 바뀌었다고 기존 논리가 안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 있는데, 개소리 말라고 해. 네 힐 능력으로 해결 못 하는 일은 항상 존재하고, 지금 네 전공이 그런 약점을 메꾸는 수단이니까. 공부해. 시간을 쪼개서라도.”

나는 가만히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뭐야, 나이 헛먹은 줄 알았는데 저런 말도 할 줄 안다고?’

솔직히 말해서 조금 충격적이었다.

그냥, 최지혁의 저런 면은 4년 동안 지켜보면서 처음 봤다.

“그런데 강준우. 더 고민 안 해? 우리랑 같이 다니기로 얼렁뚱땅 결심한 거 아니냐? 우리랑 계속 같이 다닐 마음은 있냐?”

최지혁의 물음에 준우가 눈을 크게 뜨고 조금 흥분한 듯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도움받은 것도 있고,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형이랑 다녀야죠!”

그런 준우의 말에 최지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너 내가 무슨 제안 하고 있는지는 알고 대답해?”

“네. 유라가 이미 말해줬는데요? 회사 만들 건데 들어오겠냐고?”

최지혁의 고개가 순식간에 내 쪽으로 돌아갔다. 그에 나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여주며 말했다.

“오늘 왜 만나는지 미리 설명해 주는 건 기본 아니에요?”

“……그러니까 길드 가입을 무슨 의리로,”

“이왕이면 믿을 수 있는 사람한테 가는 게 좋지 않아요?”

준우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최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제 미간을 문질렀다.

“그딴 식으로 의리 찾다가 배신당하는 거야.”

“지혁지혁. 너어는 너무 심하게 인간 불신이다. 악마인 나보다 심한걸?”

나는 오랜만에 리온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지혁 씨. 케이스 바이 케이스, 사람 바이 사람. 몰라요?”

“……맘대로 해. 어차피 내가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

저거저거, 츤데레 유행 지났다니까 또 저런다.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준우에게 나긋하게 이야기했다.

“아마 다른 길드도 이제 곧 생길 거야. 원래 힐러가 되게 드물어서 너한테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들어올 거고.”

“음……. 그 길드라는 거 성주호 패거리 같은 놈들이야?”

“거의 그럴걸? 일단 너도 봤겠지만 내 특성이 조금 특이해서, 아마 다른 길드랑 던전 돌고 수익 배분하는 것보다 우리랑 다니는 게 돈 자체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물론 아이템 지원도 우리가 더 잘해 줄 수 있고.”

“맞아! 지혁지혁 칼만 네 개다.”

리온의 말에 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더라고. 아무튼 나는 너랑 다니는 거 좋……. 아, 형이랑 다니는 거 좋아요!”

그리고는 황급히 최지혁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꿨다.

뭔가 싶어서 최지혁을 쓱 보니 싹 정색을 하고 말 잘못 하면 죽여버릴 것처럼 준우를 쓱 훑고 있었다.

“최지혁 씨, 내가 눈빛으로 협박하지 말라고 그랬죠.”

“마스터 눈치 어따 팔아먹었냐? 지혁지혁이 다른 수컷 경계, 악!”

최지혁이 옆에 있는 쿠션을 리온의 면상에 퍽 처박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경보 떴어.”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순식간에 삐!삐!삐! 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시끄럽던 카페에 정적이 감돌았고, 곧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워졌다.

다들 들고 있던 짐을 챙겨 황급하게 카페 밖으로 나갔고, 몇 명은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고, 또 몇몇은 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최지혁의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종로구청] 긴급, A급 게이트 진압 실패. (아트빌 미술관) 시민 여러분은 대피 바라며, 근처에 있는 각성자분들은 신속한 협조 부탁드립니다. 주소 참조 - https://www.jongno……’

그리고 창밖을 보았다.

“오우. 마스터, 경치 죽인다.”

삽시간에 하늘이 검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발밑으로 미약한 진동이 둥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이거 나서야 하는 거죠?”

준우가 긴장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최지혁에게 물었다.

그리고 나 또한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A급 게이트가 한국에 터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엿 같네.”

최지혁이 제 머리를 멋들어지게 위로 쓱 쓸어 올리며 전방을 쳐다보았다. 곧 그의 인벤토리에서 끝내주는 루나소드가 튀어나왔다.

“어떡해요, 최지혁.”

“……일단 있어 봐.”

사실, 게이트 밖에서는 어지간하면 힘을 숨기는 편이 좋았다.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도 그럴 게, 게이트 밖에는 CCTV도 있고, 아직 정신 못 차린 방송국 카메라도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전국구 슈퍼스타 예약이다.

그리고, 보통 과도한 관심은 독이나 다름없는 법이었다.

“각성자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최지혁의 검을 보고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집중되었고, 나는 한숨을 쉬며 리온에게 말했다.

“리온, 전투 준비해.”

“아싸!”

촥! 리온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자 내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왜냐면 이미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몬스터가 우리 일행이 있는 구역 전체를 장악해 버렸으니까.

형광등 필라멘트 끊기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일제히 나가버렸고, 창밖은 순식간에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그리고 하늘이 뒤집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짙은 안개가 도처에 깔렸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핸드폰을 쥐고 서로 웅성거렸다.

“신호가 끊겼어요.”

“그렇겠지. A급 터졌으니까.”

최지혁은 이 일이 익숙한 듯 태연하게 준우에게 대답해줬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최대한 안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안심하시고, 천천히 건물 안쪽으로 이동해 주세요.”

사실 우리가 저 사람들을 지켜줄 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지혁도 민간인들 보호에 대해 별생각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차피 우리가 반드시 나서야 하니,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불의를 보면 조금 못 참는 성격인 면도 한몫했다. 그리고 그건 준우도 마찬가지 같았다.

역시 의대생!

“여러분, 일단 돌발 상황이라고 패닉에 빠지지 마시고, 침착하게 대처해주세요.”

보면 본인이 제일 당황한 것 같은데 말은 또 번지르르하게 한다. 와중에 최지혁은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오로지 전방만 살폈다.

꼭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그때였다. 쿵, 쿵, 커다랗고 육중한 무언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최지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형 몬스터야. 건물이라도 부수면 끝장인데……. 제기랄, 다들 따라와. 최대한 공터 쪽으로 유인해야 하니까.”

“이 근처에 공터가 어딨어요!”

최지혁의 말에 경악한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물었고, 내 질문에 응답한 건 다름 아닌 준우였다.

“차, 창덕궁?”

“…….”

순간 고민했다.

문화유산이 먼저인가, 인간 목숨이 먼저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최지혁이 해주었다.

“헛소리 하고 있어! 오늘 주말이니까 근처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가!”

최지혁은 그대로 카페 문을 박차고 나갔고, 나도 재빠르게 리온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난번에 산 빛의 요정 니니를 풀자 새카만 길거리가 삽시간에 환해졌다. 그 덕에 안개에 가려진 거대한 무언가의 실루엣도 보였는데, 나는 입만 쩍 벌리고 놈을 쳐다보았다.

어지간하면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 고, 곱등이…….”

“어, 마스터 눈에 초점 나갔다.”

키리릭, 더듬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안개 사이로 저층 건물 한 채만 한 곤충형 몬스터의 새카만 눈이 드러났다.

“채유라, 너 왜…….”

“최, 최지혁, 고, 곱등이, 어어어어, 꼬, 꽁무니 저거 벌레, 벌레. 악!”

그리고 놈의 꽁무니에서 뱀같이 생긴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우리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저, 저거 연가시인가? 연가시야?

“어어어억! 뭐 해요! 빨리빨리 넓은 데로 도망!”

“으어어어! 형, 저거 뭐, 뭐어어억!”

징그럽기 그지없는 대형 몬스터의 출현에 이 광경이 익숙하지 않은 나와 준우는 패닉이 왔고 최지혁은 그에 욕을 낮게 읊조리며 근처에 있는 스포츠카의 문짝을 힘으로 뜯어버렸다.

그리고는 그 안에 숨어있던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스포츠머리 남성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차 좀 빌립시다.”

“다, 당신 뭐야!”

“곧 공중파 탈 것 같으니까 내 이름은 그때 가서 아시고. 카페로 가면 목숨은 건질 텐데, 빨리 도망가지?”

최지혁은 기어코 운전석에 있던 아저씨의 뒷덜미를 잡아 카페 안으로 던져 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뭐 해? 어그로 안 끌어?”

그에 내 옆에 있던 준우가 입을 쩍 벌린 채로 뭐라 중얼거렸다.

“……와, 인성.”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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