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나는 A4용지에 이것저것 적기 시작했다.
“이게 뭔데?”
최지혁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용지 제일 상단에 크게 글씨를 적었다.
‘길드’
그에 최지혁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표정 구기지 마요. 다 보여요.”
“…….”
나는 볼펜을 손가락 사이로 휘리릭 돌리며 최지혁을 쳐다보았다.
“내가 이것저것 찾아봤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개인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나는 노트북에 띄워 놓은 기사 몇 개를 최지혁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길드의 이점 같은 건 최지혁 씨가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딴 거 안,”
“소규모로 해요. 한 5명에서 10명 정도로.”
최지혁은 기가 막히는지 제 이마를 짚었고,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길드 만들면 아이템 판매할 때 수수료 공제되는 것도 있지 않아요? 정부에서 투자금도 받았던 것 같은데.”
최지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수수료? 투자금? 어차피 이딴 거 언젠간 무너져. 알잖아. 그딴 거 받아봤자 아무 소용 없어.”
최지혁의 말이 맞았다. 정부는 언젠가는 무너진다.
세계가 무너지니, 정부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각성자들이 만든 세력만 남아서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무법지대가 되어 버리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였다.
“그러니까 안 무너지게 해야죠.”
나는 최지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왔으면 써먹어야죠. 최지혁 씨 생각은 어때요?”
내 말에 최지혁이 꽤 진지해진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 듯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계획이 뭔데.”
“일 좀 키워봐요. 우리.”
세상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인간관계라고 우리 아빠가 그랬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길드 만들어요. 힘을 키워야 발언권도 세지죠.”
나는 내가 적은 세 가지 단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법, 정치, 돈, 그리고 언론.
“하, 길드 같은 소리…….”
최지혁이 심란한 듯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쓱 쓸어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최지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최지혁 씨.”
그에 최지혁이 흘끗 나를 쳐다보았다.
최지혁의 인간 불신이 깊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무슨 커다란 일을 겪었기에 저렇게 방어적으로 나오는 걸까?
최지혁의 각성 이전의 자세한 과거는 몰라서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봐요. 몸집 큰 길드들에 당한 거 많잖아요. 안 억울해요?”
내 말에 최지혁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을 뭘 믿고 같이 행동해.”
“그러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죠.”
나는 최지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애원하듯 말했다.
“세상 사람 다 못 믿으면 사회는 왜 존재하고 단체는 왜 생겨나겠어요. 다 감수하고 모이는 거잖아요.”
최지혁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듯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어차피 넌 네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살짝 날이 서 있는 것 같기도 한 어조였다.
최지혁의 질문은 민감한 질문이었지만 생각보다 나는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못 돌아가면요?”
“…….”
“물론 돌아갈 기회가 온다면 돌아가겠지만. 그 기회가 언제 올지도 모르잖아요.”
나는 잡고 있던 최지혁의 손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놔야죠. 나 아직 죽기 싫어요.”
최지혁은 잠시 숨을 삼키더니 곧 이를 악물고 내게 말했다.
“채유라.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나같이 약해 빠진 새끼한테 누가 붙는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에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약하긴 뭐가 약해요?”
“아직은 약,”
“언제는 본인이 지성준보다 세다면서,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 새끼 얘기는 왜 튀어나오는데!”
“아무튼 힘이야 기르면 되는 거고! 아니, 근데 자꾸 부정적으로 나올래요?”
내가 그를 향해 빽! 소리 지르자 최지혁은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찔끔 놀라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힘? 드디어 사냥 가는 건가, 마스터?”
앞에서 열심히 시리얼을 퍼먹고 있던 리온이 날개를 활짝 펼치며 들뜬 얼굴로 내게 물었다.
“생각 중이야. 준우 오늘 수업 있대.”
“그 인간 남자는 왜 끼고 다니는 거야?”
“포션은 비싸잖아.”
하나에 천 원이나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버프형 포션이나 회복 포션이나 가격은 비슷해서 강준우를 데리고 가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어제 던전에서 꽤 넉넉하게 털어와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최대한 빨리 등급을 올려놔야 나중에 안전해. 지금은 일종의 유예 기간이나 다름없어서 미친 듯이 난도 높은 던전은 안 열려.”
최지혁이 본인 핸드폰으로 게이트 관리 사이트를 쓱 훑었다.
‘<긴급 모집(인천)> 게이트 등급 E.’
“이 정도면 만족하지?”
최지혁은 조금 불안한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하도 뭐라고 그러니까 좀 겁먹은 눈치였다.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그래서 괜히 망설이게 된다.
들어갔다가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지만 최지혁의 말대로 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던전을 많이 돌아서 그의 힘을 기르는 게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의 붕괴는 걷잡을 수 없어지니까.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예약 잡는다. 채유라.”
나는 가만히 핸드폰을 쥐고 있는 최지혁을 바라보았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내가 말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저 혼자 이리저리 쏘다닐 텐데 이상하게 내 의견을 너무 잘 들어주고 있었다.
좋은 일이긴 한데, 이상했다.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내가 무슨 생각에 빠져 있건 말건 최지혁은 세상 심각한 얼굴로 제 인벤토리에서 저번에 사둔 내 방어구들을 꺼냈다.
그리고 방어구 목걸이를 내게 걸어주며 말했다.
“입어. 바로 가게.”
* * *
“주민등록증 보여주시고 서류에 사인해주시죠.”
게이트 앞에 선 군인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와 최지혁을 쓱 훑었다.
“일반인은 출입 금지인 거, 아시죠?”
군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고, 나는 그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여기까지 왔으면 당연히 일반인 아닐 거 뻔히 알 텐데 도대체 왜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다.
최지혁은 그런 군인을 쓱 보고는 대충 종이에 휘갈겨 사인하더니 군인의 앞에 휙, 성의 없이 던져놓았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잡고 게이트로 향했다.
“짜증 나게 참견질…….”
군인은 최지혁의 말에 잠깐 발끈한 듯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거기, 외국인분 사인 안 하셨!”
“인간 남자. 내가 인간으로 보여?”
그에 리온이 제 날개를 쫙 펼치고 공중으로 번쩍 떠오르며 군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제 입을 쭉 찢으며 웃었다.
“흐, 으아아악!”
당연히 게이트 앞에 서 있던 군인 여럿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고, 나는 한숨을 쉬며 리온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악! 뭐 하는 짓이야, 마스터!”
“제발, 좀, 돌발 행동 좀!”
나는 밀려오는 민망함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최지혁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저 인간 남자가 감히 나를 인간이라 불렀다고! 나는 위대한 대악마 리카르디온, 악!”
결국 최지혁이 리온의 뾰족한 귀를 잡아당기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리온은 조용해질 수 있었다.
“에이씨, 인간 남자 맨날 지 맘대로야.”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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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멸망한 크르세르스의 인간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입니다.
살아 있는 자들의 영혼과 살점을 탐하는 저주받은 최후의 생존자들의 서식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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