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3화 (10년 후 앨리스 이야기)
앨리스는 영혼 없는 얼굴로 눈앞의 귀족에게 약 봉투를 건넸다.
“여기 소화제예요.”
“약 먹고 또 음식 먹어도 되죠?”
되겠냐? 앨리스는 화를 내고 싶은 걸 참으며 입가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물었다.
“소화가 안 된다면서요?”
“내 말이요. 음식을 더 먹고 싶은데 소화가 안 된다니까요.”
“그럴 땐 그냥 약 먹고 일찍 주무셔야 합니다.”
“아니, 이제 겨우 연회가 시작됐는데 자라고요?”
앨리스는 이를 꽉 물었다. 매튜만큼이나 대화가 통하지 않는 멍청이였다.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이것보다는 나을 텐데.
“정 그러시면 맘대로 하세요. 대신 소화 안 된다고 찾아오지 말고요.”
앨리스는 적당히 손을 흔들며 남자를 내보냈다. 그는 불쾌함을 표하며 의무실을 나갔다. 여자가 의사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다는 둥 어쩌고저쩌고 연신 투덜거리면서.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또렷한 목소리였지만, 앨리스는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어차피 이 짓도 앞으로 한 달 남짓 남았으니까.
로베르트에게는 이미 부탁을 해 두었다. 이왕이면 수도에서 먼 곳으로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황성이 싫다는 이유로 달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바라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왕이면 수도에서 먼 곳, 좀 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말이다.
그렇게 능력을 쌓다 보면 여자라고 무시하는 놈들도 좀 줄어들 것이다. 뭐,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겸사겸사 안티아스를 볼 일도 없을 테니, 그를 떠올릴 때마다 심란해지는 마음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랬다.
“저…….”
연이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또 다른 환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이번에도 소화제나 달라고 온 환자인가 했는데, 모습을 드러낸 건 페르나 대공이었다.
“또 비즈 베리라도 드셨나요?”
“아니요. 오늘은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죄송하지만 바빠서요. 놀러 오신 거라면 최대한 빨리 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로베르트가 잠시 자리를 비운 덕분에 앨리스는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몹시 바빴다. 설사 여유가 있다고 해도 그와 함께 시간을 때우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다른 환자가 올 때까지만 있다 가면 안 되겠습니까? 당신의 일을 방해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방해하는 것 같은데.
그가 매튜라면 단박에 내쫓았겠지만 상대는 이웃국의 대공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관심을 받는 것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왜 또 절 찾아오셨습니까?”
앨리스는 미간의 주름을 숨기지 못한 채로 물었다.
“지난번의 무례를 사과하고 은인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거라면 충분히 들었습니다.”
앨리스의 반응은 시종일관 차가웠다. 페르나는 물론 이해했다. 자신의 첫인상이 워낙 안 좋았으니 말이다.
“사실 방금 한 말은 핑계고, 오늘은 당신을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한 번에 인상을 바꾸긴 어렵겠지만, 집요함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페르나였다. 그러니 급하게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공작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앨리스의 뒤끝도 그의 집요함 못지않다는 것.
앨리스는 공작의 정중한 요청을 단칼에 잘라 내며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안 됩니다.”
아니, 하려 했다. 누군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안 된다는 말은 그녀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제가 할 말을 대신 해 줬으니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다며, 앨리스는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폐하?”
그가 안티아스라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러니까……, 안 됩니다.”
다짜고짜 뭐가 안 된다는 것인지. 앨리스의 머릿속으로 연신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 상황을 가장 먼저 이해한 건 페르나였다. 페르나는 안티아스와 앨리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요. 무슨 오해를 하신 것인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앨리스 양께 다른 마음을 품고 온 것은 아니니.”
“오해?”
안티아스는 멍한 얼굴로 페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 그녀의 뛰어난 실력에 반해 스카우트 제의를 하려고 온 겁니다. 수습 기간이 끝나면 칼마르 왕국에서 일해 주실 수 있나 하고요.”
“그리고 전 거절했고요.”
앨리스는 혹여 놓칠세라 다시 한번 제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했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조금 더 생각해 주시지요.”
물론 페르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대체 몇 번이나 거절해야 알아먹을 건지.
“그나저나, 제가 들은 소문이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무슨 소문이요?”
앨리스는 페르나를 보며 물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묘하게 빛나며 휘어진다.
“그건, 본인께 직접 들으시죠.”
페르나는 두 사람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간 뒤 분위기는 점점 얼어붙어 갔고,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페르나와 있었을 때가 나았다는 생각을 하며.
의사로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지만, 차라리 환자라도 나타나 준다면 좋을 것 같았다. 소화제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칼마르로 갈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긴장으로 굳은 목소리는 생각보다 딱딱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안티아스는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무래도 라벤느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간 듯했다. 물론 그 덕분에 자신의 진심과 마주할 수 있었지만.
“폐하, 제게는 말씀을 높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단둘이 얘기하는 것도 오랜만인데 그 정도는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앨리스의 지적에 안티아스는 말투를 고치는 대신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체면을 차린다는 이유로 모처럼의 기회를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앨리스는 어린 시절처럼 그와 대화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는 불편한 상황을 지속할 바에는 차라리 대화를 빠르게 끝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네?”
“제가 왜 여기 왔는지요.”
글쎄. 앨리스는 곰곰이 생각하다 물었다.
“소화제 찾으러 오셨나요?”
안티아스는 멋쩍게 웃었다.
궁금해할 법도 한데,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뭐, 이유를 물어본다고 해서 솔직히 털어놓을 자신도 없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대공이랑 단둘이 있는 게 싫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네, 소화제 하나 주세요.”
안티아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가 정말 소화제를 찾으러 왔다고 할 줄은 몰랐지만, 앨리스는 별 의심 없이 약을 지었다.
“황성에서 일하는 건 어떠세요?”
“지낼 만해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앨리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바뀐 말투 때문인지 묘하게 안톤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무심코 속마음을 말할 것만 같았다. 뭐 따지고 보면 같은 사람이긴 하지만.
“적응하는 중이라서요. 여기, 소화제 드릴게요.”
앨리스는 그에게 약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원하던 물건도 받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의미였으나, 안티아스는 약 봉투를 받고도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가씨께서는 왜 의사가 되고자 하셨습니까?”
“그건 개인적인 질문이신가요?”
“거기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까요?”
“면접용 답변을 준비해 놓긴 했거든요.”
앨리스의 대답에 안티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곱게 휘어지는 촘촘한 속눈썹이 앨리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딱딱했던 분위기 역시 조금 누그러들었다.
“둘 다 듣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궁금하네요. 황성에서 일하는 거라면 의사가 아니더라도 많았잖아요.”
가능성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의사로서 황성에 일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만큼 자리가 없었으니까.
“꼭 황성에서 일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앨리스는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다 민망한지 목덜미를 긁적였다.
“실은 폐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백성들을 위하고,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셨던 모습이요. 그래서……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앨리스는 라벤느와 같이 종종 봉사 활동을 다녔고,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아이들을 봐 왔다. 비싼 약값은 평민들의 일주일 치 식비와 맞먹어 가난한 부모는 아픈 아이 걱정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로 했다. 사람들이 돈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그런 꿈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지금 이러고 있죠.”
앨리스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선택권이 없다는 이유로 황성에 들어와, 매일같이 무시당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멋진 여자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그냥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된 듯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안티아스를 마주하는 게 싫었던 건. 스스로의 모습에 자신이 없으니 그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왜요?”
안티아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앨리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위로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이니까요.”
“위로가 아니에요. 줄곧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 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아스의 푸른색 눈동자가 진심을 전하려는 듯 앨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만 계속해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그녀는 꾹 눌렀다. 이제 안티아스는 황제고, 자신은 일개 황궁 의사였다. 예쁘게 포장해 준 말에 떨리면 그것도 추태였다.
“하, 겨우 여길 떠나려고 마음 다잡았는데 왜 자꾸 옛날 생각나게…….”
앨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다독였다. 이래서는 기껏 한 결심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잘해 주지 말아요. 사람들이 오해해요.”
누구보다 앨리스 자신이 오해하고 만다. 과거에도, 지금도.
“마음이 있으면요?”
“네?”
“마음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면 괜찮나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앨리스는 당황한 얼굴로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가 사라진 그의 모습은 자신이 기억하던 소년이 아니었다.
“그러는 아가씨는요?”
“제, 제가 뭘요?”
안티아스의 눈빛에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저를 첩으로 맞이하러 오겠다 하셨잖아요.”
“내, 내가 언제……!”
“물론 아직 황제를 첩으로 맞이할 수 있는 법이 없긴 하지만,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지금부터 만들어 볼게요.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앨리스는 그 말이 저를 놀리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았다.
왜 이런걸 고민하는 건지. 그야, 농담인 게 분명하잖아.
“농담도 진담처럼 하시네요. 그런 거 안 하셔도 돼요. 누가 황제를 첩으로 삼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겠어요.”
앨리스는 자신이 한 말을 되뇌다 변명하듯 덧붙였다.
“10년 전의 저는 빼고요.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그럼 지금은요?”
“네?”
“지금은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그의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안티아스는 이제 한쪽 무릎을 꿇고 앨리스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앨리스는 그런 안티아스를 바라보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고작 백작 영애한테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태도부터 지적하는 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질문에 대답부터 하는 게 옳은 것인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셨습니까?”
말이 없는 그녀를 향해, 안티아스는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해 왔다.
대체 이 고집은 어디서 배운 걸까.
“제 마음이 중요한가요? 폐하께서야 말로 공주님이라던가…….”
앨리스의 눈에 떨리는 안티아스의 손가락이 보였다.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던 말이 저절로 멎고, 그제야 긴장이 역력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감추었다.
“저, 저는 다음 달까지만 황성에서 일할 거예요.”
“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요. 3년이 될 수도 있고, 5년이 될 수도 있어요.”
“기다릴게요.”
“그, 그때 가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말에 안티아스는 살짝 실망한 듯 눈을 아래로 내리며 대답했다.
“절 두고 본부를 들이실 건가요? 그건 좀 싫은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대체 어쩌다가 대화가 이 지경이 된 걸까. 앨리스는 어쩐지 안티아스가 자신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게 처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애가 아니었다. 안티아스가 당연히 제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황제와의 로맨스라니, 코웃음 칠 일이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답지 않게 충동적인 결정을 하고 싶었다. 아니, 몇 년 동안 품고만 있던 마음을 이제는 뱉고 싶었다.
그리하여, 어쩌겠는가. 설사 그가 대답을 종용하고 있더라도 제 입에서 나올 대답 역시 하나뿐인걸.
앨리스는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바뀌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맞이하러 올 테니까.”
안티아스는 붉어진 앨리스의 얼굴에 눈을 맞추며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