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58)화 (158/159)

외전 22화 (10년 후 앨리스 이야기)

로베르트의 제안을 받은 뒤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시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앨리스의 고민은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매튜가 면접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머릿속이 복잡했다. 평소 같았으면 꼴좋다며 비웃었을 텐데.

생각해 보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처음부터 황성에 오고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것처럼 구는 걸까. 대체 뭐가 그리 발목을 잡아서.

자신도 모르게 안티아스를 떠올리던 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얌전히 교양 수업 같은 거나 받을 걸 그랬네.”

그래봤자 성격 드센 백작 영애라는 타이틀이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어떤 놈이 붙인 별명인지, 덕분에 집에선 혼삿길이 막혔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의 고민과는 상관없이 황성 정원에는 붉은 장미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햇살도 화창해서 공작 부인이랑 차라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은 날씨였다.

‘고민 상담이라도 한번 하러 갈까.’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라벤느라면 자신에게 무엇이 정답인지 알려 줄 것만 같았다. 옛날 그때처럼.

“근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는 그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말았다.

“페르나…… 대공.”

“절 다시 만난 게 그리 싫으십니까?”

옅은 갈색 머리와 잘 어울리는 녹색 눈동자가 가볍게 휘어지며 미소를 그렸다. 꼭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습이었다.

앨리스에게는 그저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그럴 리가요.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표정은 그리 반갑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알면 말 좀 그만 시키고 갈 길 가면 좋으련만. 웃으면서 욕하는 법을 조금 배워 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런데 황성엔 어찌한 일로 또 오셨나요.”

“폐하의 탄신일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요.”

불쾌한 그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는 뜻을 은연중에 비쳤으나, 페르나는 앨리스의 의도를 모르는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시군요. 그럼 즐겁게 지내다 가시길 바랄게요. 전 이만…….”

앨리스는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눈치를 줘도 모르면 먼저 자리를 비킬 수밖에. 그러나 페르나는 그런 앨리스의 속도 모르고 그녀를 붙잡았다. 아주 노골적으로.

“괜찮으시다면 잠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렇게 말하는 대공은 필요 이상으로 앨리스에게 정중했다. 앨리스는 살짝 경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 * *

“여기서 뭐 하세요, 폐하?”

라벤느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뭐라도 잘못하다 걸린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 공작 부인.”

뭘 그렇게 정신없이 보고 있었던 걸까?

라벤느는 입가에 미소를 걸고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안티아스가 바라보던 곳에는 앨리스와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황성에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었나? 그랬더라면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에 궁금증을 가진 것도 잠시, 라벤느는 짐짓 단호한 얼굴로 안티아스를 나무랐다.

“폐하. 염탐은 나쁜 짓이에요.”

“여, 염탐이라니요.”

그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 온 탓인지, 라벤느는 종종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며 놀리곤 했다. 문제라면,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자신이 여전히 그녀의 장난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그럼,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건데요?”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게 있어서…….”

“앨리스가요? 아니면, 저 남자분?”

라벤느의 질문에 안티아스의 표정이 점점 곤란으로 물들어 갔다.

귀족들을 상대할 때면 찔러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처럼 냉정한 그에게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라벤느는 그의 그런 약점을 기가 막히게 찔러 왔다.

그걸 모르지는 않으나 어쩌겠는가. 그녀에게 들켜 버린 운 없는 자신을 탓해야지.

안티아스는 숨기길 포기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앨리스 양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게 조금 걱정이 돼서요.”

“그럼 직접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안티아스는 황성에 들어온 걸 후회한다며 혼자 푸념하던 앨리스를 떠올렸다. 로베르트에게 앨리스를 추천한 게 자신이었으니, 구태여 이유를 찾을 것도 없이 원인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물어보겠는가.

그런 자신의 사정을 라벤느에게 설명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거뿐이세요?”

“네?”

“염탐한 것 치고는 이유가 너무 빈약한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염탐이 아니라.”

안티아스는 얼굴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라벤느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페르나 대공이 도착하자마자 앨리스 양을 찾는 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요.”

결국, 바닥의 바닥까지 다 보여 준 뒤에야 라벤느는 수긍했다.

“폐하, 예전에 그러셨죠. 앨리스 양은 폐하께 소중한 동생이라고.”

“물론입니다.”

“그럼 폐하께서는 뭘 그렇게 신경을 쓰고 계신 겁니까?”

“…….”

“동생을 맘에 들어 하는 남자가 나타난 게 그렇게 싫으신가요?”

라벤느의 질문에 안티아스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대꾸했다.

“가족으로서 걱정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글쎄요. 가족이라면 앨리스 양의 의견을 존중해 주셔야죠. 앨리스도 그 남자를 좋아한다면 어떡하실 건데요?”

“그럴 리…….”

그럴 리 없다는 말을 하려던 안티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방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셨죠?”

라벤느의 질문에 새파란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그야…….”

안티아스는 주저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푸른색 눈동자는 라벤느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허공을 응시했다.

앨리스는 제게 소중한 동생이었다. 그 생각에는 한 치의 의심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비록 떨어져 지낸 지 10년이 흘렀지만, 줄곧 그녀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봐 왔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는 앨리스는 제게 동경의 대상이자, 자랑이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내미는 정체 모를 욕심에 안티아스는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라벤느는 대답을 망설이는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뭔가 나올 것 같았지만, 이 이상 그를 괴롭혔다간 앨리스한테 좋은 소리 못 들을 듯했다.

무엇보다 곧바로 정답을 알려 주는 것보다 고민하는 걸 지켜보는 게 더 즐거울 테니 말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한번 고민해 보시는 게 좋겠네요. 폐하.”

그렇게 라벤느는 안티아스 마음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고 홀연히 사라졌다.

* * *

즐거운 음악이 감도는 연회장 한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러 온 귀족들이 이따금 눈치를 살폈지만, 정작 연회의 주인공인 안티아스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폐하?”

“아, 공작 부인.”

라벤느는 그런 그가 걱정되어 다가가 물었다.

병 주고 약 준대도 할 말 없었지만 이러다간 왕국에서 온 손님에게마저 성의 없는 태도를 보여 책이 잡힐지 몰랐다.

물론 그가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마음은 정리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럼 좀 현실로 돌아오던가. 무슨 정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의 말을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라벤느는 가볍게 그를 떠보기로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페르나 대공이 의무실 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푸른색 눈동자에는 망설임이 깃들었다. 고작 이런 말로 동요할 거면서.

“꽃을 들고 갔었죠, 아마……?”

라벤느는 일부러 뒷말을 흐리며 안티아스의 반응을 살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페르나가 의무실 쪽으로 가는 걸 실제로 봤으니까. 꽃은 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두 사람이 잘되도록 응원해 주시면 좋지 않겠…… 어머, 벌써 사라지셨네.”

라벤느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성에서 마법을 쓰면 안 된다는 규칙은 사실 황제에게는 해당하지 않았지만, 안티아스는 나름대로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제해 왔다. 그런 그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마법을 썼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는 얘기겠지.

“동생은 무슨…….”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놀릴 걸 하는 후회가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비쳤다.

“폐하는?”

그때 일리온이 다가오며 라벤느에게 물었다.

“급한 일이 있으시다며 잠깐 나가 보셨어요.”

라벤느의 입술이 씰룩거리는 걸 보아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무슨 즐거운 일이 있어서 그래?”

“나중에 얘기해 줄게요. 그보다, 주인공이 사라져 버렸는데 어쩌죠?”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 걱정스러워서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주인공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연회가 중단되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뜻이었다. 일리온은 그런 라벤느의 기분을 눈치채고 허리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춤이라도 출까?”

그의 제안에 라벤느는 새초롬하게 웃으며 일리온의 손을 잡았다.

“뭐, 바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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