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10년 후 앨리스 이야기)
앨리스가 황성에서 일한 지 한 달이 지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그날은 이웃 나라인 칼마르 왕국에서 페르나 대공이 방문했던 날이었다.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이었고, 실상은 조금 달랐다. 대공은 단순히 우호 관계를 쌓고자 안티아스를 만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를 대접하기 위한 식사 자리에서 대공은 자신이 제국을 방문한 진짜 이유를 살며시 비추었다.
“앞으로 이오니아와 칼마르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좀 더 강력한 결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떠하신지요?”
“결속이요?”
안티아스는 페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 칼마르 왕국의 제1 왕녀님께서 성인이 되시지요. 아름답고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역시나 그 얘기를 하려고…….’
안티아스는 대공이 왜 왕녀의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
강력한 가문과 결혼해 황권의 기반을 다지라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 황권이 안정된 지금은 자신의 나이를 들먹이며 황비를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난리였고.
이러나저러나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옆자리에 누가 앉게 될지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제안은 감사하나, 아직 황비를 맞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안티아스는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순간 대공의 녹색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는 후식으로 나온 디저트를 한 입 떠먹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 마음에 두신 영애가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것과 관련이 있으십니까?”
마음에 둔 영애라니,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돌아다니는 것인지. 일에 치여 사람 만날 시간도 없는 제게는 참 과분한 소문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결혼이 아니더라도 두 나라 간의 우호 관계는 지속될 거란 말을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뭐, 이런 입에 발린 말로 물러설 것 같지는 않지만.
안티아스는 그런 속마음을 삼키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성격 때문에 젊은 나이에도 꽤나 유능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고.
그래서 불편한 대화가 지속되리라 예상했으나, 생각과는 다르게 페르나는 빠르게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얘기는 이쯤 하도록 하죠.”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안티아스는 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순간, 페르나의 몸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안티아스는 빠르게 그에게 달려갔다.
“페르나 대공!”
그는 바닥에 누워 고통스러운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안티아스는 서둘러 근처에 있던 시종에게 명령했다.
“의사를 불러와, 빨리!”
페르나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와중, 복도를 내달리며 도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앨리스였다. 앨리스는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페르나에게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못 먹는 음식 있어요? 예를 들면 비즈 베리 열매라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못 먹는 음식이라니!”
대공은 잔뜩 부은 얼굴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자신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을 거라 의심되는 상황에서 못 먹는 음식을 묻고 있다니. 그것도 모자라 의사라고 데리고 온 이가 새파랗게 젊은 여자애일 줄은.
“일단 주사를 투여해 드릴게요.”
페르나가 말이 없자 앨리스는 약을 투여하기 위해 가지고 온 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내 대공의 팔에 가져다 댔다.
“너같이 어린 여자애가 뭘 안다고…….”
부어오른 목 때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서, 그는 앨리스의 손을 쳐 내며 진찰을 거부했다. 앨리스의 손에서 떨어진 주사기가 바닥을 구르다 멈춘다.
떨어진 주사기를 바라보던 앨리스는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대로 놔두면 당신이 죽을 거라는 건 알고 있죠.”
“뭐?”
앨리스의 비아냥에 페르나는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는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제가 못 미더우시다니, 천국에서 내려온 천사는 남자이길 빌어 드려야겠네요.”
“너 감히……!”
안티아스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쩜 저 성격은 예전 그대로인지.
“이분 팔 좀 잡아 주세요.”
단호한 목소리로 하는 부탁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역시나 안티아스였다. 안티아스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페르나의 양팔을 잡아 그의 움직임을 막았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설마 음식에 독을 넣은 게……!”
“대공, 우리 중 누구도 당신의 음식에 독을 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유능한 의사입니다.”
안티아스는 진지한 얼굴로 페르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얼마나 납득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의 두 눈동자는 여전히 분노로 이글거렸으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그 짧은 사이 앨리스는 재빨리 주사를 투여하고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응급조치는 했으니, 방으로 옮기세요.”
그렇게 시종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나가는 페르나는 여전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이 일을 왕국에 알리겠다며 주절거렸으니까.
페르나가 나간 뒤 안티아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대공이 갑자기 왜 그런 건가?”
“비즈 베리 때문일 겁니다.”
앨리스가 대답했다.
“비즈 베리?”
“디저트를 먹다가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독약을 먹었다기엔 그는 제법 또렷한 정신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얼굴과 목이 붓고 호흡 곤란을 겪는 것뿐이라면 독약보다는 알레르기 반응인 것이 분명했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먹었던 게 비즈 베리 타르트였고.
“칼마르에는 나지 않는 과일이니 본인도 몰랐겠죠. 그 과일에 알레르기가 있는 줄은. 뭐, 걱정하지 마세요.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나가려던 앨리스는 쉬이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남은 일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밟혔다.
이제 더 이상 옛날 같은 사이가 아니라 해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대공의 상태는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일어나면 이해할 수 있게 설명도 하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아니, 아니네. 내가 설명하지.”
안티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나오는 말을 정정하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어쩐지 앨리스의 앞에서만큼은 자꾸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듯했다.
“대공께서도 저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실 겁니다. 그러니 제게 맡겨 주세요, 폐하.”
그녀의 입에서 나온 폐하라는 말이 왜 이렇게 듣기 불편한지. 안티아스는 그 이유를 잠시 고민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앨리스의 말대로 칼마르 왕국과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르나 역시 증세가 호전되면서 독약이라는 오해를 풀었고.
그렇게 되기까지 앨리스의 노력이 컸다. 그녀는 한동안 그 말버릇 나쁜 남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고생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다음 날 아침, 페르나의 방에서 나온 앨리스는 복도를 쿵쿵 걸으며 소리쳤다.
“살려 준 은혜도 모르고 입만 살아 가지고! 이래서 황성에 들어오는 게 싫었는데, 아아악!”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어뜨리며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안티아스의 뇌리에 남아 양심을 쿡쿡 찔러 댔다.
그야, 앨리스를 로베르트에게 추천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 * *
“요즘 황성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 거 같지 않아요?”
한차례 일이 세차게 몰려왔다 빠진 후의 의무실은 평화로웠다. 잠시나마 평화를 만끽하던 앨리스는 문득 든 생각에 로베르트를 향해 물었다.
“그야 곧 폐하의 탄신일이니까.”
“아…….”
안 그래도 지나가는 계절을 늘 뒤늦게 눈치채곤 했는데, 어느새 장미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계절이 돌아왔나 보다.
“연회를 열겠네요.”
“그렇겠구나. 듣자 하니, 칼마르 왕국의 공주도 온다고 하던데.”
“아, 그때 그…….”
칼마르라는 말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불쾌하리만치 자신을 무시했던 그 남자.
“그나저나 공주는 왜요?”
“지난번 페르나 대공 건으로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다고 하더구나.”
로베르트는 허허 웃으며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본인도 아니고 공주가요? 그것도 반년 가까이 지난 일을 이제 와서?”
“뭐, 꼭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만.”
그의 말에 앨리스는 아아- 하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가 직접 행차한다는데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하여튼 핑계는.
앨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공주와 춤을 출 안티아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잘 어울릴 두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불편하게 뛰기 시작했다.
황비 자리를 노리는 게 어디 공주뿐이랴. 쟁쟁한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그 뒤로 줄을 설 것이다.
안티아스는 이미 결혼 적령기였고 언제까지고 그 옆자리를 비워 둘 수도 없을 테니 선택을 해야만 하겠지.
그 당연한 사실을 왜 자꾸만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틈바구니에 끼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알면서도.
“그날은 너도 하루 쉬면서 연회를 즐기도록 하려무나.”
“괜찮아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로베르트의 제안에 앨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연회에 간다고 해도 사교계 경험이 적은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쪽 구석에서 눈치만 보다 돌아올 게 분명했다.
안티아스가 다른 영애와 춤추는 걸 굳이 제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고. 그럴 바에야 그냥 일이나 하고 말지.
“그런데 선생님…….”
“왜?”
“선생님은 왜 절 여기 부르신 거예요?”
머리에 가득 찬 안티아스의 생각을 지우기 위해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지 하고 미루어 두었던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야 네가 성적이 제일 좋았으니까.”
“제가 여자인 게 신경 쓰이진 않으셨어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성별은 그리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려던 로베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자꾸만 입이 가벼워지려 했다.
“그보다 황성에서 일하는 게 힘들진 않으냐?”
“그리 힘들지는 않아요. 귀족들이야 익숙하고…….”
그들의 차별과 멸시에는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더욱더 지지 않으려고 했고.
하지만 가끔은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꺾이는 것보다 구부러지는 게 나은 것인지. 그렇게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야 하는지.
로베르트는 앨리스의 어두운 표정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만약, 황성에서 일하는 게 너와 맞지 않는다면 다른 곳에서 남은 3년을 채울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마. 수도의 병원도 괜찮고, 아니면 한적한 시골의 병원도 괜찮겠지. 네가 맘 편히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앨리스는 뜻밖에 제안에 놀라며 로베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한번 고민해 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