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10년 후 앨리스 이야기)
“여기 약 처방해 드릴 테니까, 식후 30분 이내 복용하세요.”
앨리스는 알약을 담은 봉투를 환자에게 건넸다. 환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약 봉투를 받아 들며 물었다.
“거, 로베르트 선생님은 안 계시는가?”
“선생님께서는 잠깐 자리를 비우셨는데, 왜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앨리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미심쩍은 것이다. 여자인 자신이 진료를 하는 게. 그래서 로베르트를 찾는 거겠지.
남자가 나간 뒤, 앨리스는 차트를 정리하며 한숨을 내뱉었다. 황제의 주치의인 로베르트 밑에서 일한 지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자신이 느낀 건 이 빌어먹을 귀족 놈들의 낡고 낡은 사고방식은 도저히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과 그들이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게 끔찍하게 싫을 정도였다.
이래서 황성엔 안 올 생각이었는데.
“저기…….”
“네, 들어오세요.”
또 다른 환자가 온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열린 문틈 사이로 은색 머리카락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녹색 눈동자를 깜박이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자신을 불렀다.
“앨리스 언니?”
“로즈으으으!”
앨리스는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양 눈썹을 한껏 휘며 아이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로 왔어?”
“보고 싶어서 놀러 왔어요.”
“그랬쪄요? 보고 시퍼쪄요?”
앨리스는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아이를 껴안고 볼을 비볐다. 어쩌면 이렇게 귀엽게 생겼는지.
아이는 아빠를 닮아 투명한 은색 머리카락과 살짝 올라간 눈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웃을 때 사랑스럽게 휘어지는 녹색 눈동자만큼은 엄마를 빼닮은 듯했다.
“안녕, 앨리스! 나도 놀러 왔어!”
뒤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앨리스는 정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공작 부인.”
한겨울 서릿바람보다도 차가운 앨리스의 환대에 라벤느는 살짝 풀이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로즈랑 나랑 너무 차별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앨리스의 차가운 목소리에는 영혼이 담겨 있지 않았고, 라벤느는 서럽게 투덜거렸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럴 수가 있냐며. 그러거나 말거나 앨리스는 로즈를 번쩍 안아 들고 의무실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라벤느보다 로즈가 귀여운 것이야 당연하니까.
“일은 할 만해?”
녹을 것처럼 흐물흐물한 얼굴로 로즈에게 케이크를 떠먹여 주던 앨리스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아뇨. 전혀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진심 어린 대답이었다.
“고생이 많구나.”
한때는 황성에서 일하겠다고 노래를 불렀던 그녀가 이토록 황성을 증오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귀족들의 사고방식에 질려 버린 것이다.
앨리스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만 해도 언젠가 세상이 바뀔 거라 생각했다. 황제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확대하고 있으니, 귀족들의 가치관도 조금씩 바뀔 거라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빌어먹을 것들은 그 싹부터 썩어 있었다. 다름 아닌 아카데미에서부터 말이다.
썩은 싹이 자란다고 제대로 된 나무가 될 리 없었다. 그들은 신분, 성별, 계급에 따라 온갖 차별을 했고, 끊임없는 멸시에 진절머리가 난 앨리스는 더 이상 귀족들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작은 마을에서 작은 병원을 차려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뿐.
“여자니 뭐니 무시해도 자기들 목숨 줄 쥐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입 다물지 않겠냐 했던 제 생각이 틀렸어요. 이것들은 숨이 넘어가도 입만 살아서 주절거릴 인간들이에요.”
그런 놈들이라면 그냥 그렇게 눈을 감는 편이 세계 평화를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제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어쩌다 저런 염세주의자가 되어 버렸는지. 라벤느는 분노하는 앨리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왜 황성에 온 거야?”
라벤느의 질문에 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절 불러 주는 의사가 로베르트 선생님뿐이었거든요.”
앨리스는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이가 갈렸다.
아카데미에서 의학 수업을 수료한 학생들은 3년 이상 현직 의사 밑에서 일을 배워야만 정식으로 병원을 차릴 수 있는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황립 아카데미는 명성이 높기에 보통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여러 병원에서 러브 콜을 받게 된다.
앨리스는 그 학생들 사이에서도 단연 뛰어났다.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제의도 오지 않았다.
단 한 명, 로베르트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싫어도 와야지.
“폐하랑은 인사 나눴어?”
“뭐, 한두 번 봤나.”
앨리스의 애매한 답에 라벤느는 의문을 표했다.
“왜?”
“폐하께서는 늘 바쁘시잖아요. 얼굴을 본다 해도 딱히 할 말도 없고요.”
앨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로즈에게 케이크를 떠먹이는 데 열중했다. 그런 앨리스를 보며 라벤느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안톤을 첩으로 들이겠다며 소리치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거니.”
“부, 부인!”
앨리스는 포크를 꽉 쥐며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포크에 걸린 케이크가 접시를 튕겨 나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로즈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떨어진 케이크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 얘기는 이제 제발 잊어 주세요.”
앨리스는 떨어진 케이크를 휴지로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흑역사를 끄집어내 자신을 놀리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는가?
“엄마, 괴롭히지 마.”
로즈 역시 그런 앨리스를 토닥이며 라벤느를 나무랐다. 앨리스는 언제 한숨을 쉬었냐는 듯 로즈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옛날 일은 옛날 일이에요. 저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고요.”
10년이면 사람이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생각도, 가치관도, 하다못해 취향마저도.
자신의 마음은 더 이상 옛날 같지 않았다. 안티아스 역시 그럴 것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안티아스에게 자신은 일하는 주인댁의 딸일 뿐이었을 텐데, 바뀔 마음이라는 게 있겠는가.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라벤느는 그런 앨리스를 보며 어쩐지 아쉬운 얼굴로 차를 홀짝였다.
* * *
물론 앨리스도 알고 있다. 10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게 있다는 걸.
예를 들면 여전히 사이가 좋은 공작 부부의 모습이라거나.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두터운 애정을 과시했다. 옆에서 보는 자신이 질투가 날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또 한 가지.
“앨리스!”
“…….”
앨리스는 못 들은 척 발걸음을 옮겼다.
“앨리스! 앨리스!”
그러나 우렁찬 목소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걸 참아 내기 힘들었던 앨리스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매튜를 바라보았다. 10년째 한결같이 자신을 귀찮게 구는 녀석이었다.
왜 아침부터 이 짜증 나는 얼굴을 봐야 하는 건지!
“하아, 하아. 오랜만이다. 그치?”
숨을 헐떡이며 인사를 건네는 매튜에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왜, 우리 저번에 만나고 못 만났잖아.”
저번에 언제? 내가 널 언제 만났는데? 응?
저번 만남 따위 기억에서 지워 버린 지 오래였지만, 매튜는 끈질겼다. 아니면 눈치가 없던가.
“그보다 네가 웬일로 황성에 온 거야?”
“면접을 보러 왔어.”
그는 어깨를 빳빳이 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면접?”
앨리스는 말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이 바보더러 면접을 보러 오라 한 걸까.
“오늘 몇 시에 일 끝나?”
“그건 왜?”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해서.”
앨리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매튜를 돌아보았다.
“네가 잊어버린 것 같아서 말해 주는데, 우리 더 이상 약혼한 사이 아닌 거 알고 있지?”
아버지의 사업이 잘되면서 갈리온가에 빚을 모두 다 갚았고, 그 이후로 약혼은 없던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매튜는 여전히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지금 이렇게.
“어차피 너랑 결혼하겠다는 가문도 없잖아.”
왜 이 자식은 매를 못 벌어서 안달일까.
앨리스는 매튜를 노려보며 대꾸했다.
“없긴 왜 없어? 나도 있어!”
“어디?”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앨리스는 매튜를 향해 톡 쏘아붙이고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 그녀의 뒤를 쫓던 매튜가 별안간 비명을 질렀다.
“앨리…… 으아악!”
이어지는 둔탁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매튜가 보였다. 앨리스는 저 멍청이는 언제쯤 어른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부디 주변 사람들이 매튜와 자신에 대해 모르길 바랄 뿐이었다.
* * *
“흠, 흠. 폐하.”
창밖을 내려다보던 안티아스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미카엘 경.”
그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 듯 미카엘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방금 건 그냥 못 본 척해 주게.”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셀레스타인 공작가에 자주 왔다 갔다 하더니, 말투도 공작 부인을 닮아 가는 건가. 안티아스는 미카엘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말을 삼켰다.
“앨리스! 같이 가!”
등 뒤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안티아스의 귓가를 찔렀다. 커다랗게 외치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앨리스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매튜 때문이 아니더라도 앨리스의 표정은 줄곧 안 좋았지만.
그녀는 날이 갈수록 얼굴에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 역시 풀릴 기미가 안 보였고.
안티아스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걸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