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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55)화 (155/159)

외전 19화

일리온이 피노를 데리고 교실로 돌아온 이후, 피노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고, 가끔은 웃는 모습도 보여 줬다. 가장 놀라운 건 그가 일리온을 따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뭘 어떻게 한 거예요?”

“당신한테 배운 대로 했을 뿐이야.”

“저요?”

내가 대체 뭘 가르쳐 줬는데? 자세히 좀 알려 달라고 일리온을 졸라보았지만, 그는 그 아리송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마치 둘만의 비밀이라는 듯.

왠지 모르게 사춘기 아들을 둔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전 오늘도 일이 있어 보육원에 다녀올게요.”

“그럼 나도…….”

“공작님은 일 많으시잖아요. 그러니 이따 데리러 와 주세요. 밖에서 저녁이나 같이 먹어요.”

책상 위에 쌓인 업무를 가리키며 말하자 일리온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옛날에는 일 말고는 안중에 없던 사람이.

하지만 하염없이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일리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데리러 갈게.”

손은 흔들어 주고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안에는 스피넬과 로이든이 먼저 타고 있었다.

“일리온은 안 따라온대?”

“일이 많아서요.”

“떼어 놓고 오는데 고생할 줄 알았는데.”

“세바스찬한테 보고서를 몰아서 올려 달라고 미리 부탁했죠.”

어깨를 으쓱이며 내 치밀함을 어필하자 로이든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 진짜 잔머리를 잘 굴리는구나!”

“현명하다고 해 줄래요?”

로이든의 말을 정정하며 어쩐지 쌀쌀해진 날씨에 양팔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요즘 좀 춥지 않아요? 벌써 겨울이 오려나.”

창밖에 물든 낙엽을 보며 중얼거리자, 로이든과 스피넬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물어볼 사람을 잘못 고른 내 잘못이지.

* * *

“오늘은 공작님 안 왔어요?”

보육원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어김없이 일리온을 찾기 시작했다.

“오늘은 공작님이 바빠서 같이 못 왔어.”

내 말에 아이들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애들아, 나는 별로 반갑지 않은 거야?

“너희들이 그럴 줄 알고 디저트를 들고 왔지!”

양손 가득 달콤한 과자를 들어 올리자 아이들은 언제 시무룩해졌냐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아직은 일리온보다 과자가 좋을 때지!

휴, 애들 마음 얻기 쉽지 않다, 정말.

아이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과자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난 그런 아이들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실은 오늘 너희들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아이들은 입가에 과자 부스러기를 잔뜩 달고 물었다.

“부탁이요? 뭔데요?”

“너희들이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운을 띄우며 상황을 설명하자, 동글동글한 눈동자들이 이내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 * *

싸늘한 바람이 창 너머로 불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까. 서류 더미에서 눈을 돌린 일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세바스찬도 조용했다.

잠시 자리를 비웠나?

로이든과 스피넬까지 집을 비워서 그런지 저택이 유독 적막했다.

일리온은 저녁을 먹자며 데리러 오라던 라벤느의 말을 떠올렸다. 몇 시까지 오라는 얘기는 없었는데. 지금 가도 되려나.

마차를 탈까, 텔레포트를 할까 고민하던 일리온은 결정을 마치고 외투를 입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라벤느를 보고 싶었으니까.

보육원 앞, 너른 공터에 도착한 일리온은 주변을 살폈다. 해가 넘어가고 있긴 했지만, 아이들이 집에 들어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일찍 들어간 건가?”

일리온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보육원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때마침 라벤느가 현관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왜,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일이 일찍 끝나서 왔는데……, 오면 안 됐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라벤느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다들 안에 있어?”

아이들과 인사나 하려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라벤느가 현관문을 막아섰다.

“어, 다들 안에 있는데요.”

“그럼 왜 문을 막는 건데?”

“그게, 지금 들어가면 안 된다랄까. 조금 있다 들어가야 된다랄까.”

일리온은 팔짱을 끼고 횡설수설하는 라벤느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걸 보니 뭔가 숨기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싶어 잠깐 귀를 기울여 보자 안쪽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이려는데,

“아아아아, 들으면 안 돼요. 듣지 말아요!”

“뭐?”

라벤느가 두 손을 들어 그의 귀를 막으며 외쳤다.

“지, 지금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갖는 거예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물론 그녀는 평소에도 종종 이해 못 할 얘기를 하곤 했지만.

“내가 언제?”

“아, 아무튼. 다른 데 집중하지 말고 나한테 집중해야죠!”

이렇게 안 하던 소리를 하는 거로 봐선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뭐길래.

그래도 뭐, 싫지는 않으니 조금 어울려 줄까.

“알았어. 그럼 당신에게 집중할게.”

일리온은 라벤느를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소리 없는 대치가 이어졌다.

노을이 내려앉은 양 볼이 점점 더 붉게 물들어 갈 때 즈음, 라벤느가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으으, 역시 못 버티겠어.”

그녀는 부끄러운지 두 눈을 가리고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동시에 문이 열리며 로이든이 나타났다. 로이든은 싸늘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애들도 많은데 뭐 하는 거야.”

불청객의 등장에 라벤느는 서둘러 일리온의 품에서 빠져나와 달아오른 볼을 문질렀다. 그리고 일리온은 갈 곳 잃은 양팔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안 했어.”

정확히는 못 한 거였지만. 일리온은 눈치 없이 나타난 로이든을 향해 차갑게 대꾸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대체 뭘 숨기려고 안 하던 말까지 한 걸까.’

그런 일리온의 의문은 아이들이 모여 있다는 교실 문을 여는 순간 풀리고 말았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팡 하고 터지는 폭죽과 함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생일 축하해요!”

폭죽 소리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자, 뒤따라온 라벤느가 한마디를 더했다.

“오늘 생일이잖아요.”

일리온은 짧게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동안은 생일이 언제인지 몰라 따로 기념해 본 적이 없었다.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버릇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일리온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갔나 했던 세바스찬도 여기 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공작님!”

“여기, 선물이에요!”

“저는 편지 썼어요!”

아이들은 하나둘 일리온의 주위로 모여들며 꼬깃꼬깃 접은 편지와 색종이로 만든 목걸이를 건넸다.

“고, 고마워.”

일리온은 양손 가득 선물을 끌어안고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런 그를 보며 라벤느가 설명했다.

“생일 파티를 하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부탁했더니 모두 흔쾌히 들어줬어요. 케이크도 다 같이 만든 거예요. 다들 꼭 축하해 주고 싶다고, 정말 열심히 만들었어요.”

일리온은 받아 든 편지를 열어 보았다. 서툰 글씨로 쓰인 편지에는 아이들의 마음이 꾹꾹 담겨 있었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서 고마워요!’

‘다음에도 또 같이 놀자!’

‘공작님이 행복했으면 조켓다!’

‘괜찮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생일 축하드려요.’

편지를 찬찬히 살피던 일리온은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조금 날 것 같아서.

어린 시절 자신은 생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자신은 저주받은 아이였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였으니까. 그런 자신이 태어난 날 축하를 받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래서 차라리 모르는 편이 마음이 편할 거라고, 어린 시절 일리온은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곤 했었다.

“다들 고마워. 생일을 축하해 줘서.”

일리온은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했다.

잔뜩 잠긴 목소리에는 울음이 조금 섞여 있었지만, 라벤느는 모르는 척해 주기로 했다.

* * *

그날 저녁 일리온은 선물에 보답하고 싶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해가 빨리 지는 가을 밤하늘엔 어느새 별이 가득했다.

“뭘 할 건데요?”

아이들과 함께 나 역시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일리온은 빙긋 웃더니 하늘 높이 불꽃을 쏘아 올렸다. 팡 터지는 불꽃들이 오색 빛깔로 반짝이며 퍼져 나갔다.

스피넬과 로이든도 구경만 할 수 없었는지, 서로의 마법을 자랑하며 불꽃을 쏘아 올렸다.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더니,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에 반해 버린 아이들은 세 사람 주변으로 몰려갔다. 당연하게도 나는 또 한 번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티팩트 들고 오는 건데!

“공작님 꼭,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 같아요!”

“맞아! 너무 멋있어요!”

“저기, 공주님들? 왕자님은 이미 나랑 결혼했거든? 그러니까 넘보면 안 된다?”

일리온 주변에 모여 있는 아이들 사이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한마디 하자 아이들은 그런 날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와, 저기 봐!”

한참을 웃던 아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모였다. 거기엔 마법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고래가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로이든의 작품인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로이든을 보며 대단하다고 치켜세웠고, 관심에 꽤나 목말라 있던 로이든은 어깨를 으쓱였다.

덕분에 잠시 자유가 된 우리는 함께 풀밭에 앉았다.

폴짝폴짝 뛰며 고래를 잡아 보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못 들었는데.”

“뭘요?”

“자선 사업을 하게 된 이유.”

아, 그거.

이유를 말하려니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져 볼을 긁적였다.

“……그냥, 공작님처럼 혼자서 우는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에게 기댈 곳이 있고, 기댈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조금 더 행복하게 자랄 수 있다면…….”

잠시 뜸을 들이다 일리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걸로 당신의 상처받은 어린 시절이 조금이나마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그는 말이 없었고, 나는 어쩐지 일리온의 눈치를 보고 말았다. 그의 과거를 모르는 내가 어쭙잖게 그를 위로하려 하지는 않았나 하고.

“너무 주제넘은 생각이었나요?”

내 질문에 일리온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단지, 당신이 그렇게까지 생각해 줄 줄은 몰랐어.”

“무슨 소리예요. 제가 얼마나 신경이 쓰였는데. 어린 도련님을 데리고 집을 나왔을 거란 말도 진심이었다고요.”

열심히 투덜대자, 일리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 진심인 거.”

그는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날 바라보았다.

“고마워. 이렇게 멋진 추억을 선물해 줘서.”

“이걸로 너무 감동하면 곤란한데.”

일리온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앞으로 같이 만들 추억이 더 많은걸요. 설마 그때마다 울 건 아니죠?”

“오늘 건 못 본 척해 주기로 한 거 아니었나?”

“아, 그랬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일리온의 팔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기댔다.

피어나는 불꽃들은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처럼 아름답게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그 불꽃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작은 소원을 빌었다.

부디, 앞으로 우리가 쌓아 갈 추억 역시 저 불꽃처럼 아름답게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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