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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53)화 (153/159)

외전 17화

처음 보육원에 방문하던 날, 아이들은 무척이나 쭈뼛거리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처럼 나란히 서서 인사를 건넸다.

“야, 다 같이 해야지.”

“너 먼저 하면 어떡해.”

“라나가 먼저 시작했단 말이야.”

작게 소곤거리는 아이들 뒤로 수녀님께서 이마를 살짝 짚으셨다. 누가 시킨 게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목소리가 잦아들며 미처 못다 한 인사를 끝냈지만, 그마저도 순서가 제각각이라 웃음이 살짝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이렇게 맞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눈치 없이 뻣뻣하게 서 있는 일리온의 옆구리를 툭 하고 쳤다. 일리온은 당황하면서도 제법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들자, 아이들은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이시죠?”

“응 맞아. 나는 라벤느 셀레스타인. 이쪽은 일리온 셀레스타인이고, 저기 두 사람은 스피넬이랑 로이든 이야.”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도 데려왔다. 스피넬은 귀찮은 표정으로 하품을 내뱉고 있었고, 로이든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우와……. 진짜 신문에 나오는 그 공작님이에요?”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나와 일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일리온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쩌면 이렇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발전이 없는지. 그래도 대답은 잘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조금 발전했다고 여기기로 했다.

“그럼 공작님, 잠시만 아이들과 놀아 주실래요?”

내 말에 일리온은 청천벽력이라도 들은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당신은?”

“저는 수녀님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정말 나 혼자 이 많은 애들을 보고 있으라고?”

그는 내 말을 믿고 싶지 않은지 재차 되물었다. 그런 일리온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예요, 스피넬 님이랑 로이든도 있잖아요.”

그는 저 두 사람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되냐고 묻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혼자 이 많은 아이를 상대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말이야. 점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일리온을 내버려 두고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공작님이랑 저기 있는 언니, 오빠가 같이 놀아 준대! 너희들 줄 선물도 가져왔다니까, 다 같이 재밌게 놀고 있어야 한다?”

“정말요?”

“와아!”

아이들은 선물이라는 소리에 눈이 초롱초롱해져 대답했다.

반면 일리온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받은 학생처럼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 * *

“으아악, 매달리지 말라니까!”

“스피넬, 애들한테 화내면 안 돼. 라벤느가 신신당부해- 으어억, 내 머리카락!”

“흥, 꼴좋다!”

스피넬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기는 로이든을 보며 코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는 그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비명 아닌 비명을 질러야 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터를 가득 메웠지만, 개중엔 그 흐름에 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리온이라던가.

“멍청하긴.”

“…….”

일리온은 옆에서 혼잣말하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일리온 하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또래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가 멍청한데?”

일리온은 무심코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그것 말고 할 일이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아이들은 이상하게 자신의 눈치를 보며 다가오려 하지 않았으니까.

멍청하다며 혼잣말을 하던 아이는 일리온을 흘끔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오늘 지나면 다시는 볼 일 없을 사람들인데, 좋다고 노는 꼴이요.”

“…….”

“공작님도 그렇잖아요. 우리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겉으로 착한 척하려고 우릴 이용하는 거잖아요.”

꼬였네.

일리온은 속으로 짧은 감상을 남겼다.

하지만 아이의 말이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대부분의 귀족이 자신들의 대외적 이미지를 위해 보육원을 방문하곤 했으니까.

아이의 입장에선 그럴 수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 멀리서 스피넬이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일리온 이 자식! 넌 왜 안 돕는 건데?”

그녀는 고통 분담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일리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애들이 네가 더 좋다는데 어떡해?”

스피넬은 일리온에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아이들에게 외쳤다.

“일리온이랑도 가서 놀아!”

“싫어. 스피넬 언니가 더 재밌는걸.”

“그리고 공작님 좀 무서워…….”

“맞아, 무서워.”

어쩌면 저렇게 하나같이 솔직한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는 재주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애들아 무슨 소리야. 공작님이 얼마나 친절한데. 선물도 가져왔는걸?”

그 옆에서 머리카락을 희생하고 있던 로이든이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중얼거렸다.

“선물이요?”

“그럼. 장난감을 잔뜩 사 왔지.”

그렇게 말하며 로이든은 손가락을 튕겼고, 마차에 실어 두었던 장난감이 일리온의 옆에 나타났다.

“저거 봐, 공작님이 마차에서 선물 가져오셨잖아. 어서 가 봐.”

선물이라는 단어가 주는 효과는 굉장해서,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일리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선물이 의아할 만도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선물이 나타났는지보다는 선물 그 자체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았다.

일리온은 난데없이 나타난 선물 꾸러미와 밀려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자, 잠깐만.”

비로소 아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스피넬과 로이든은 조금 후련한 얼굴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이제 네 차례야.”

라는 말을 건네며.

* * *

“재밌게 놀았던 모양이에요.”

“아, 뭐.”

그날 저녁. 일리온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지쳤어요?”

“조금…….”

기사단 훈련에도 지치지 않는 사람이 별일이었다. 쌀쌀한 날씨에 입었던 외투를 옷장에 걸고 나서 일리온에게 다가갔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단순히 지쳤다기엔 표정이 좋지 못해 그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일리온은 감았던 눈을 뜨며 날 바라보았다.

“그냥, 좀. 신경 쓰이는 애가 있어서.”

“어떤 아이인데요?”

일리온은 잠시 고민하는 듯 천장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성격이 꼬인 아이.”

“풉.”

그의 입에서 성격이 꼬였다는 말이 나왔다는 게 웃겨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에요. 그런데 그 애가 왜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일리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일리온은 그게 싫지 않은지 눈을 살며시 감고 중얼거렸다.

“혼자 있던 게 마음에 걸려서.”

그는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일리온이 신경 쓰는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섞이려 하지 않았고, 선물도 받아 가지 않았다고.

그래서 눈에 밟힌다 했다.

“그럼 우리 다음 주에도 갈래요?”

“응?”

“걔가 그랬다면서요. 관심도 없으면서 겉으로 착한 척하려고 이용한다고. 그 말에 반박해 주러 가자고요.”

내 말에 일리온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왜요?”

“아니,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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