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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51)화 (151/159)

외전 15화

탁.

일리온의 책상 위로 꽤나 많은 양의 서류를 쌓아 올렸다. 일리온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뭔가?”

“사업 계획서에요.”

“아, 저번에 말했던…….”

일리온은 기억났다는 듯 중얼거리며 서류의 첫 장을 살폈다.

“자선 사업이라, 확실히 이익이 나는 사업은 아니군.”

사업의 정체를 알게 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께서 이미 여러 곳에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좀 더 제대로 하고 싶었어요.”

보고서를 살피던 일리온이 되물었다.

“황실에서도 지원을 해 준다고?”

“네. 이미 허가를 받았죠.”

그 외에도 란셀 후작이나, 슈테란 후작에게도 이야기를 꺼내 보았고,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특히나 란셀 후작 부인은 워낙 사교계에 발이 넓어, 든든한 지원군이 될 듯했다.

“보금자리 마련 및 도서, 교육 지원 사업…….”

일리온은 내 보고서를 쭉 넘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좀 더 많이 보살필 수 있도록, 보육원과 같은 보호 시설을 확대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려고 해요.”

“갑자기 이런 일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나?”

일리온은 보고서를 쭉 살피며 물었다.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다기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처럼 보였다. 하긴 어리둥절할 만도 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는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전생에서조차.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대신 오늘 저랑 같이 가 주셨으면 하는 데가 있는데요.”

“오늘?”

“네.”

“어디?”

* * *

일리온과 함께 방문한 곳은 수도에서 가장 큰 장난감 가게였다. 매장 안에는 형형색색의 장난감과 인형들이 진열대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른인 내 눈에도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여긴 왜?”

“이번 주에 보육원을 방문할 거거든요. 물론 공작님도 같이요.”

“이번 주는…….”

“네, 맞아요. 주말에 저랑 데이트하기로 하셨잖아요?”

이제 막 데이트 장소를 깨달은 일리온은 아-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좀 사 가려고요. 공작님도 좀 골라 주세요.”

일리온은 장난감을 쓱 둘러보더니 조금 머뭇거리면서 날 돌아보았다.

“이런 건 굳이 내가 고르지 않아도…….”

“무슨 소리예요? 공작님 돈으로 선물할 건데. 당연히 골라 주셔야죠.”

그렇게 말하며, 일리온에게 바구니 하나를 쥐여 주었다. 그 바구니 다 채울 때까지는 절대 나갈 생각 하지 말라는 엄포와 함께.

억지로 바구니를 받아 든 일리온은 장난감이라고는 처음 보는 아이처럼 선반 앞에 멀뚱히 서서 눈동자를 굴렸다.

“공작님께서 무척 곤란하신 것처럼 보이는데요.”

동행한 릴리가 일리온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그야 뭐…….”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장난감을 골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일리온에게 장난감이란 단순히 생소하기만 한 물건이 아니었다. 공 작가에 들어오고부터 어른처럼 행동할 것을 강요받은 그에게 있어 장난감이란 한 번도 가지지 못한 평범한 어린 시절을 뜻하는 물건이었을 테니까.

그는 여전히 장난감을 들었다 놨다 하며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바구니를 다 채우려면 한참 걸릴 듯 보였다.

난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선물 상자를 들고 일리온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공작님.”

“응?”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앞에서 선물 상자를 열어 보였다. 상자 안에서 피에로 인형이 뿅 하고 튀어나와 흔들거렸다. 일리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뻣뻣하게 굳은 채로 흔들거리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많이 놀란 모양인지, 손에 쥐고 있던 인형이 터질 것처럼 구겨졌다.

“많이 놀라셨어요?”

“아니, 별로.”

일리온은 표정을 고치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놀란 표정이었는데 아닌 척하기는.

“이거도 하나 챙길까요?”

상자를 닫으며 묻자 일리온은 조금 퉁명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건 별로 맘에 안 들어.”

아무래도 싫어하는 물건 취향만큼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일리온이 스스로 장난감을 고르게 두고 매장 안을 쭉 둘러보았다.

인형이나 보드게임 같은 것을 바구니에 담던 중, 무언가 흥미로운 게 눈에 띄었다.

“유령의 집?”

계산대 옆에 놓인 팸플릿을 집어 들자 옆에 있던 릴리가 알고 있다는 듯 설명해 주었다.

“아,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곳이에요. 오래된 폐건물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안에 유령이 있는 거야?”

“뭐, 진짜 유령은 아니고, 유령 모형인 거죠. 어린애들이 좋아한대요.”

“…….”

나는 팸플릿을 들고 일리온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연인끼리는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걸까? 일리온은 순간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썩 내키지 않은 얼굴로.

구입한 장난감들은 포장 후 공작저로 배달해 달라 요청한 뒤 가게를 나왔다. 가게 안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탓인지 배가 조금 고파 왔다. 밥 먹을 시간은 아직 안 됐고……. 허기나 달랠 겸 카페를 갈까 하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흔치 않은 푸른색 머리카락에, 거무튀튀한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

“미카엘 경?”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거기서 뭐 하세요?”

“그, 그냥 있었어요. 차를 한잔 마시려고.”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게 조금 이상한데. 그리고 차를 마시러 온 거면 밖에서 알짱거릴 게 아니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마침 잘 만났네요. 안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들어가요. 제가 차 한 잔 사 드릴게요. 괜찮죠, 공작님?”

“아뇨, 괜찮습니다. 최근엔 부인께 고맙단 인사를 받을 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요.”

미카엘은 극구 사양하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져요. 어서 들어가죠.”

“좀 따져 주실래요? 후환이 두렵거든요?”

미카엘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일리온의 눈치를 보았다.

아, 괜찮다니까. 우리 애가 표정이 좀 사나워서 그렇지 착한 애야. 표정 좀 풀라는 의미로 일리온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미카엘과 함께 카페 안으로 향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미카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메뉴를 뚫어지게 보다가, 주변 사람들이 뭘 먹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여기는 뭐가 맛있나요?”

“음, 치즈케이크랑 홍차가 괜찮아요.”

“그럼, 커피 한 잔이요.”

아니, 그럴 거면 왜 물어봐? 홍차도 케이크도 아닌 커피를 주문하는 미카엘을 조금 삐뚜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카엘 경, 솔직히 말해 보세요. 차 마시러 온 거 아니죠?”

“차 마시러 왔습니다.”

“황성에서도 한참 먼 디저트 카페까지 찾아와 놓고 커피만 마신다고요?”

미카엘은 다시 한번 움찔하며 날 바라보았다. 난 그의 앞에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털어놓을 게 있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라는 무언의 압박을 하며.

잠시 고민을 하던 미카엘은 결국 이렇게 될 걸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드미트리 님의 심부름을 하러 온 겁니다.”

“심부름이요?”

“데이트 코스를 짜 오라고 하셔서요.”

데이트라니, 설마.

“로라랑요?”

미카엘의 상관인 드미트리가 황성의 하녀장 로라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런데 데이트라고?

“내가 자고 있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엄밀히 말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습니다.”

“그럼요?”

“그저…….”

살짝 입을 뗀 미카엘은 치가 떨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일 일만 남은 거죠.”

“아하.”

한숨을 내쉬는 미카엘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원래 상관이 행복해야 직장 생활이 평화로운 법이었다.

차일 일만 남았다는 건, 앞으로 있을 드미트리의 히스테리를 견뎌 내야 한다는 뜻이겠지.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미카엘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딱 잘라 거절했다.

“친구의 불행을 두고만 볼 수는 없죠. 데이트라면 또 제가 전문 아니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라벤느…….”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일리온은 날 말리려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고 미카엘은 내 도움을 거절하려 했지만, 진정한 여주인공은 이런 핍박에 굴복하지 않는 법이었다.

“사양할 거 없다니까요. 고백이 성공할 가능성을 1%라도 올려야 하지 않겠어요?”

내 친절에 미카엘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카엘 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저희 아가씨께서 철이 좀 드셨거든요.”

“…….”

“아주, 조금.”

릴리의 조언을 들으며 미카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일리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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