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부인, 괜찮으세요?”
“으, 응.”
부딪힌 엉덩이가 아파,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일어났다.
“어떻게 사과도 안 하고 갈 수가 있지?”
“저, 부인. 혹시 잃어버린 물건 없으세요?”
앨리스는 분개했고, 안티아스는 떨어진 물건을 가방에 주워 담으며 물었다.
“잃어버린 물건? 아 그러고 보니 지갑이…….”
물건을 살피던 난 지갑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지갑을 훔쳐 갔을 줄이야.
“저게 진짜……!”
앨리스는 화가 나 아이가 사라진 골목길로 달려가려 했으나, 나와 안티아스가 서둘러 그녀를 잡아 세웠다.
“앨리스, 괜찮아. 어차피 돈은 얼마 안 들어 있었어.”
“하지만…….”
“쫓아갔다가 위험한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우리의 만류에 앨리스는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쫓아가려던 걸 멈추었다. 그래도 카메라를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니?”
“드문 일은 아니에요. 좁은 골목길에는 저런 아이들이 많으니까요.”
그래…….
어린아이가 소매치기를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만큼 이 세계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다니는 길은 언제나 대로변이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루카스 혹은 스피넬과 함께였다. 내 시선은 늘 그 근처에서 머물러 있을 뿐, 좀 더 깊고 어두운 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았던 거겠지. 난 언제나 일리온을, 이 세계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클라우스가 사라진 지 일 년. 줄어든 세금으로 삶이 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라는 사실이 어쩐지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앨리스를 바래다주는 것만으로도 약속한 한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그럼 부인, 조심히 돌아가세요. 빌리 너도.”
앨리스는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안티아스에게 말을 걸었다.
“유모는 안 만나고 가셔도 되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아무리 변신을 했어도 유모의 눈은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오늘은 그리운 집에 와 본 것만으로 만족해요.”
만족한다는 말과는 다르게 안티아스의 얼굴은 그리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표정이 안 좋으신데 혹시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나요?”
“……표정을 감추는 건 아직도 어렵군요.”
안티아스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인정했다.
“저는 제가 백성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누구보다도 그들과 가까이 지내 왔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보니 지난 일 년간 제가 그들을 위해 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듯합니다.”
안티아스는 어렸고, 그로 인해 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일리온에게 듣기로는, 클라우스의 뒤에서 벌벌 떨던 이들이 이제는 안티아스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다고.
일리온이 그를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고는 있지만, 일리온 역시 때로는 그 사이에서 선을 지키는 게 힘들다고 토로했다. 안티아스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강력한 지원을 해 줄 수도 있겠지만, 지나친 도움은 오히려 독이었다.
황제라면 왕관의 무게를 이겨 내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일리온이 그렇게 말했다는 거다. 내 의견이 아니라.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그는 고작 16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다. 그 어린아이가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가족들을 만나고 싶은 걸 참아 가면서까지.
“저는 제가 얼마나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티아스는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한 외출이었는데 아무래도 더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또 한 번 착한 어른이 나설 차례였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훌륭한 황제가 되실 자질은 충분하신 듯합니다.”
“네?”
안티아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그런 의미에서 폐하, 저랑 사업 하나 하실래요?”
“……사업이요?”
안티아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 * *
가까스로 황성에 도착한 나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정말 성수 안 뿌려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그럼 제가 감옥에…… 아니, 혼이 날 텐데요.”
여전히 붉게 부어 있는 볼을 보며 묻자 안티아스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제가 잘 둘러댈게요. 연고가 마를 때까지는 그냥 이대로 두고 싶어요.”
그냥 동생일 뿐이라고?
안티아스는 그 동생이 발라 준 연고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고집을 꺾지 못한 나는 나중에라도 꼭 치료하라 부탁하며 그의 손에 성수를 들려 주었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난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
마침내 집무실에 도착한 우리는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리온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을 꽤 즐겼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딱 맞출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일리온은 시계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실은 나도 그래.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시간 맞춰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안티아스는 내 상상 이상으로 성실한 아이였다. 그는 내게 공작을 걱정시켜서는 안 된다며, 돌아오는 내내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으니까. 마치 내가 매일 일리온을 걱정시키는 사람처럼.
이상하게 틀린 말이 아니라, 일리온이 안티아스에게 나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공작, 공작 부인.”
안티아스의 볼에 난 상처를 발견한 일리온이 한바탕 놀라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어찌어찌 잘 넘기고 나서 우리는 집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집무실을 나와 마차로 돌아가는 길, 한참 걸어가던 일리온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빤히 바라봐?”
순간 잘생겨서라는 말이 무심코 튀어나올 뻔했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난 서둘러 정신을 차리며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흠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별일이네. 허락받고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일리온은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물었다.
“별건 아니고, 저 돈 좀 빌려주세요.”
“돈이라면 세바스찬이…….”
“아니요. 이건 공작님의 승인이 필요한 일이에요.”
일리온은 내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원래 제 목표가 공작님 재산을 탕진하는 거였거든요? 지금까지는 계속 실패했는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탕진을 해 볼 생각이에요.”
“글쎄.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안 될 텐데.”
얼핏 농담처럼 들렸지만, 일리온은 진심으로 하는 얘기였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모습에 하마터면 또 한 번 반할 뻔했다.
“아뇨, 이번엔 제대로예요. 사업을 해 볼 거거든요. 수익이 아주 안 나오는 사업이죠.”
“그래, 알았어.”
“네?”
사업 계획서를 내놓으면 검토해 보겠다는 지극히 사업가다운 대답을 기대했건만, 일리온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내 부탁을 승낙했다.
“돈이 안 되는 일인데도요?”
“그래도 하고 싶은 거잖아?”
그의 반문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하고 싶다고 해서 다 시켜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무, 무슨 얘긴지도 안 듣고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
그 한마디에 일리온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했던 말들이 모두 쓸모없어지고 말았다. 그만큼 나를 믿어 준다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늦을까 봐 조바심을 내며 집무실로 들어갔을 때 일리온이 꽤나 여유로웠던 게 생각났다. 마치 내가 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듯.
어쩐지 낯이 뜨거워진 나는 괜히 볼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걱정 마. 당신이 한두 푼 쓴다고 무너질 집안은 아니니까.”
일리온에게 미안한 말이었지만, 역시 그의 최대의 매력은 저 잘생긴 얼굴과 넘치는 재력인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심장이 이렇게 뛸 리가 없다.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일리온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날 바라보았다.
“별생각 안 했어요. 그, 그냥…….”
눈동자를 데굴 굴리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 약속한 시각보다 5분 정도 늦게 돌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