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9)화 (149/159)

외전 13화

매튜 길리온. 그간 앨리스가 입이 닳도록 험담을 늘어놓았던 그녀의 약혼자였다.

“헉, 헉. 대체 왜 그냥 가 버리는 거야?”

매튜는 숨을 헐떡이며 앨리스 앞에 멈추어 섰다.

“그야 네가 바보 같은 얘기만 하니까.”

그리고 우리의 앨리스는 자신의 특기인 독설을 내어 주었고.

바보 같다는 평가는 우리끼리 있을 때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본인에게도 직접 해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하지 마! 난 너한테 선물을 주려고 온 거란 말이야.”

매튜는 쌩하고 사라져 버린 앨리스가 야속했는지, 억울한 듯 소리쳤다.

난 그들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며 안티아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 즐거운 표정으로.

“이런 상황이 익숙한가 봐요.”

“아, 그게……. 반가워서.”

살며시 속삭이자, 그는 무심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의 입에서 반갑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늘 있던 일인가보다.

“선물? 무슨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엘리스는 짜증스럽게 매튜를 보며 물었다.

“여기.”

매튜는 조금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이다 손바닥을 펼쳐 동그란 나무 공을 꺼내 보였다. 공 가운데는 홈이 파여 있고 그 사이로 끈이 매달려 있었다.

앨리스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얼굴로 매튜와 공을 번갈아 보았다.

“이게 뭔데.”

그래도 예의상 물어는 봐 주는구나.

“너도 처음 보는 거지? 우리 아빠가 외국에 가서 사 온 거야.”

“아, 그래.”

“내가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보여 줄게.”

매튜는 어깨를 으쓱이며 으스댔다. 아이의 까만색 눈동자에는 앨리스가 모르는 걸 자신이 알고 있다는 우월감이 살짝 엿보였다. 그걸 눈치챈 앨리스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매튜를 노려보았다.

안타깝게도 눈치가 많이 없는 매튜는 그런 앨리스의 시선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튜는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공 끝에 달린 줄을 손가락에 끼우고는 힘을 주어 아래로 던졌다. 던져진 공은 회전해 다시 감겨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요요 장난감이었다.

“네 말대로 다 봤으니 가도 될까?”

줄에 매달려 회전을 반복하는 요요가 흥미를 끌 만도 했으나, 앨리스는 여전히 관심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 다른 것도 더 보여 줄게.”

매튜는 금방이라도 가 버릴 것 같은 앨리스를 서둘러 붙잡았다. 그리고는 이번엔 요요를 뱅글뱅글 돌렸다. 그 모습이 사뭇 위협적이라 앨리스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며 물었다.

“이제 다 봤으니까 가도 되지? 오늘은 빨리 집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

“자, 잠깐만!”

매튜는 그런 앨리스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고, 순간 요요가 손가락에서 빠지며 앨리스를 향해 날아들었다.

“앨리스!”

다급히 앨리스를 부르는 내 외침보다도 한발 먼저, 안티아스가 내 옆을 지나쳤다. 그는 무척이나 날렵한 몸놀림으로 앨리스를 감싸 안았다.

다행히 앨리스가 다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폐……아아아악!”

요요는 안티아스의 광대를 맞고 튕겨 나갔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용안에 상처가 나다니!

저게 나 때문이라는 걸 알면 일리온이 아니라 황실에서 날 가만 안 둘 터였다. 내가 어떻게 단두대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그건 절대 안 돼!

“서, 성수. 성수가 필요해. 으아아아 잠깐 여기 계세요. 아니 있어! 성수를 가져올 테니까!”

또다시 감옥에 갇힌 내 모습을 상상하던 난 기어이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지르며 신전으로 달렸다.

* * *

“야 너…….”

라벤느가 당황한 얼굴로 뛰어간 뒤, 안티아스의 얼굴에 난 상처에 앨리스의 얼굴이 와락 찌그러졌다.

“매튜!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뭘!”

“이게 진짜. 너 때문에 사람이 다쳤잖아! 어서 사과해!”

잔뜩 화가 난 앨리스의 모습에 매튜는 기가 눌려 말을 더듬었다.

“걔, 걔가 멋대로 끼어들어서 다친 거잖아. 그리고 쟤는 평민 아니야? 내가 왜 사과를 해?”

“평민이든 귀족이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해야지!”

“싫어. 난 잘못한 거 없어!”

앨리스는 매튜의 어린애 같은 고집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당장 꺼져. 이 멍청아!”

“뭐? 머, 멍청이? 너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매튜는 충격받은 얼굴로 앨리스를 바라보다 그녀의 매서운 표정에 뒷걸음질 치며 도망쳐 버렸다. 저만치 사라져 가는 매튜를 씩씩거리며 바라보던 앨리스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머리에 달린 분홍색 리본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너도 말이야, 네 일도 아닌데 왜 끼어들어?”

“저, 그게……. 아가씨께서 다칠 것 같아서.”

안티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게 앨리스의 화를 돋군다는 것도 모르고.

“넌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그리고 잘못해서 눈을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그렇네요. 운이 좋았어요.”

안티아스는 그제야 광대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쓱 문질러 보았다. 피부가 쓸려 피가 조금 맺혀 있었다.

“만지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 네.”

안티아스는 서둘러 팔을 내려 다소곳이 모았다.

“그리고 손 안 닿으니까 고개 좀 숙여 봐.”

뭐랄까. 뼛속 깊이 남은 시종의 버릇이랄까. 안티아스는 이번에도 자신도 모르게 앨리스의 말에 따르며 고개를 숙였다.

코앞에서 본 앨리스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꽤나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 주었다. 볼을 스치는 손길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안티아스는 어렵지 않게 그녀가 정말로 자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피를 닦은 앨리스는 부스럭거리며 다시 한 번 주머니를 뒤졌다. 스커트 자락 옆에 귀엽게 달린 주머니에서는 낡은 연고 통이 나왔다.

“부인께서 성수를 가져오시겠지만, 일단 이거라도 발라 둬.”

연고 통을 받아든 안티아스는 뚜껑을 열어 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연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빌려 쓰기 민망할 정도였다.

“제가 써도 되는 건가요?”

“얼마 안 남았다고 무시하지 마. 이래 봬도 효과는 좋은 애라고.”

앨리스는 민망했는지 연고 통을 뺏어 들며 안에 든 연고를 손수건의 깨끗한 면으로 살살 긁어 안티아스의 볼에 발라 주었다.

“자, 이제 됐어.”

“연고, 새로 하나 사 드릴까요?”

더 이상 고개를 숙이고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안티아스는 여전히 앨리스와 눈높이를 맞추고선 물었다.

앨리스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됐어. 집에 연고 많아.”

“그럼 왜…….”

왜 굳이 내용물도 거의 남지 않은 통을 들고 다니는 걸까.

“너랑은 상관없잖아.”

앨리스는 연고를 주머니에 도로 넣으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소중한 사람이 준 거예요?”

그리고 안티아스의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굳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도 독심술 쓸 줄 알아?”

앨리스의 솔직한 반응에 안티아스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자신도 은근 성격이 못된 모양이다.

그 연고가 자신이 선물한 거라는 걸 알면서 일부러 앨리스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으니 말이다. 단지 앨리스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다는 이유로.

“아뇨. 독심술은 못 써요. 그냥 찍어 본 거예요. 그나저나 연고를 선물로 받으시다니. 다치는 일이 많으셨나 봐요.”

“아니, 뭐 좀.”

앨리스는 민망한지 볼을 긁적였다.

“요즘도 많이 다치세요?”

“날 뭐로 보고. 이래 봬도 11살이란 말이야.”

앨리스는 빙긋이 웃는 소년을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소년은 이상하게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언젠가 이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있는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모두 다르지만 어딘가…….

“저기, 너 말이야. 어디서 만난 적…….”

“빌리!!!”

앨리스의 질문은 소년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목소리에 삼켜지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라벤느가 저 멀리서 호들갑을 떨며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 성수 가져왔어. 으아아 괜찮아?”

“괜찮아요.”

“괜찮기는! 지금 당장 뿌려 줄 테니까…….”

“공작 부인. 전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마을 구경하러 가면 안 될까요?”

패닉에 빠진 듯 안절부절못하는 라벤느와 달리, 소년은 제법 어른스럽게 대응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앨리스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디가 이상하다고 콕 집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아무튼 이상했다.

* * *

“안 바래다주셔도 되는데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요즘 같은 세상에는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걸. 집에 데려다줄게.”

앨리스는 왜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냐는 듯 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11살의 눈치와 촉은 무시할 게 못 되는구나.

앨리스의 눈빛을 슬금슬금 피하며 두 사람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앨리스는 아주 자연스럽게 빌리, 그러니까 안티아스와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절반은 매튜의 흉이었다. 요즘 들어 자길 귀찮게 구는 게 심해졌다며.

“약혼자면 약혼자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정말 보기 싫은 애야.”

“그렇군요.”

안티아스는 꽤나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아뇨……. 아까 같은 장난이 계속된다면 그건 문제가 될 테니까요.”

대화 내용이야 어찌 됐든 둘이서 나란히 걷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둘까?

잘 어울리는 둘의 모습을 담기 위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셔터 소리에 놀란 앨리스가 날 바라보았고, 안티아스 역시 날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당황하는 둘의 모습을 렌즈를 통해 확인하며, 몇 번 더 셔터를 누르는 사이.

“부인, 조심하세요!”

“응?”

안티아스가 손을 뻗으며 내게 다가왔고, 카메라 렌즈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난 반응할 새도 없이 누군가와 부딪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날 밀치고 간 사람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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