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어서 오세요, 셀레스타인 공작, 그리고 공작 부인.”
오늘은 오랜만에 일리온과 함께 황궁을 방문했다.
새삼스럽지만, 안티아스가 황제에 즉위한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이 무렵의 아이들은 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모양인지, 그는 못 본 새 부쩍 자라 있었다.
“오늘은 어찌한 일로 두 분이 함께 절 찾아오셨습니까?”
“오늘은 그간 밀렸던 사진과 편지를 전달드리러 왔답니다.”
“저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요.”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아쉬움이 섞인 눈동자에서 왜 이제 왔냐는 듯한 질책이 느껴졌다. 난 잠시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흠, 흠. 제가 어찌 감히 폐하와 한 약속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사진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이에요.”
물론, 까먹긴 했어. 잠깐이라고 하기엔 조금 긴 시간 동안 까먹긴 했지.
사진만 찍어 놓고 인화하는 걸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지금이라도 까먹은 것을 만회하겠다, 이 얘기다.
안티아스에게 그간 앨리스와 함께 찍었던 사진과 함께 편지를 건넸다.
사진을 받아 든 안티아스의 얼굴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은 듯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사진 속 인물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넘겨 보았다.
“모두 잘 지내고 있군요. 즐거워 보이네요.”
그 안에는 앨리스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를 키워 주었던 하녀의 사진이나,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백작 부부, 그리고 함께 자랐던 친구들의 사진들이 섞여 있었다.
안티아스의 양쪽 눈썹이 아래로 지그시 내려간다. 그리운 사람들을 눈에 담는 듯 사진을 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그리고 이건 특별히 부탁받은 선물이에요.”
한참을 사진 속에 푹 빠져 있던 그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선물이요?”
그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다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쿠키가 고소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건…….”
어제 사진을 인화해 오는 길에 때마침 앨리스와 안티아스를 키운 하녀들을 만났다. 두 사람은 내가 황성에 간다는 얘기에 쿠키를 싸 주었다. 꼭 전해 달라며.
“어릴 때 좋아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네. 정말 좋아했어요.”
쿠키를 바라보는 안티아스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종종 다 같이 모여 쿠키를 만들곤 했어요. 온몸이 밀가루투성이가 돼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조각에 서로 비웃곤 했죠. 특히나 아가씨가 만든 건 늘 이런 모양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안티아스는 어딘가 조금 찌그러진 듯한 토끼 모양 쿠키를 집어 들었다. 그는 차마 손에 든 쿠키를 먹지 못하겠는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안티아스는 또래에 비해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아이라고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특히나 황제로 즉위한 뒤 일 년 사이에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는데, 이렇게 보니 또 그 또래의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리우면 한번 보러 가시는 건 어때요?”
그는 내 제안에 고개를 저었다.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이 갈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건 안 돼요.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황성 사람들이 걱정할 거예요. 그리고 간다 해도 기사단을 대동해야 하는걸요. 다들 불편해할 겁니다.”
마을에 나가는 것쯤이야 황제인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싫었겠지.
그가 황제라 다행이라는 생각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이는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엔 너무 어렸다.
그러니 이럴 땐 훌륭한 어른들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굳이 기사단을 대동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네?”
“얼굴을 바꾸면 되죠.”
안티아스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갑자기 자리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제가 사라지면 다들 절 찾아다닐 거에요.”
“그건 공작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난 일리온을 가리키며 말했다.
“……라벤느.”
아까부터 우리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일리온이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아직 그 입에서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기에 그의 뜻을 못 알아들은 척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적당히 둘러대 주시면 되잖아요. 한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지 않을까요?”
안티아스는 반쯤 넘어온 얼굴로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이 필요한 얼굴로.
어린아이를 황좌에 앉혀 놓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우셨으니, 애프터서비스 정도는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일리온은 나와 안티아스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그 이상은 안 됩니다. 한 시간 안에 돌아오셔야 합니다.”
일리온은 나와 안티아스에게, 아니 정확히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단호한 눈빛이 한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멱살 잡고 끌고 올 기세였다.
일리온의 동의에 안티아스의 눈빛이 생기로 반짝였다.
“물론입니다. 한 시간 안에 꼭 돌아올게요.”
나갈 생각에 잔뜩 신이 난 안티아스를 뒤로하고 일리온이 내게 속삭였다.
“한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해. 늦으면…….”
“늦으면요?”
설마 또 벌이라도 준다는 건 아니겠지?
너도 참. 같이 지낸 지가 몇 달인데 내가 아직도 옛날처럼 벌이라는 소리에 질겁을 할 것 같아?
당연히 질겁하지!
서류 더미에 파묻혀 책상과 한 몸이 되는 일만큼은 사양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시간 안에 돌아오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는데, 일리온이 나직이 귓가에 속삭였다.
“밤에 안 재울 거야.”
“네……?”
그 얘기는 그러니까…….
멍하니 서서 일리온의 말을 곱씹던 난 고개를 돌려 안티아스를 바라보았다.
“폐하, 이왕 외출하는 거 1박 2일로 다녀올까요?”
* * *
마법으로 외모를 바꾼 안티아스는 누가 봐도 황제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금발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색이 예쁜 푸른색 눈동자는 옅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거기에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영락없이 평범한 마을 아이였다.
“앨리스를 보러 가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네?”
“아까부터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으셔서요.”
귀엽게 올라간 양쪽 입꼬리는 외출이 결정되고부터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린 듯, 안티아스는 입을 살짝 가리며 입꼬리를 감추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겠으나, 그런 거 아닙니다.”
“뭐가 그런 게 아니신데요?”
“아가씨, 아니 앨리스에 대해서요.”
안티아스는 평소의 말버릇대로 앨리스를 아가씨라 부르려다 정정했다.
“저한테 앨리스는 그저 귀여운 동생 같은 아이예요.”
“전 별말 하지 않았는데요?”
내 말에 안티아스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곤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공작이 하던 말이 이런 거였군요.”
“공작님이요?”
“아닙니다. 그보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서 다녀오죠.”
아니 뭐, 꼭 한 시간 안에 돌아갈 필요는 없는데. 사람이 놀다 보면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세 시간이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나 안티아스는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나와는 다르게 그는 무척이나 성실한 소년이었다. 그리 급할 게 없는 나는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안티아스의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앨리스한테는 뭐라고 소개하실 거예요?”
“네?”
앨리스네 서점으로 향하며 묻자 안티아스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마을에 나가는 게 얼마나 즐거웠으면. 그래, 그래. 한창 그럴 때지.
“그럼…….”
“저한테 뭘 소개해요?”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내려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색이 옅은 갈색 곱슬머리가 보였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귀엽게 묶은 소녀는 다름 아닌 앨리스였다.
“아, 그러니까…….”
난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고, 나만큼이나 당황한 안티아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 이쪽은 그러니까 리, 릴리의 동생, 빌리라고 해.”
“아, 네.”
내 소개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를 자신에게 소개를 해 주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담은 채로.
“빌리가 수도는 처음이래서 말이야, 구경을 시켜 주려고 나왔어.”
난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설명을 덧붙였고, 안티아스는 장단을 맞추려는 듯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시작부터 들킬 것 같은데.
그러나 내 우려와는 다르게 우리의 거짓말은 들키지 않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앨리스는 우리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그럼 두 분 즐거운 구경 되세요.”
“응?”
“저는 조금 바빠서 먼저 가 볼게요.”
“자, 잠깐만.”
다급히 사라지려는 앨리스를 붙잡으며 물었다.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가는 게 아니라, 달아나는 중이에요.”
“뭐로부터?”
대체 이 귀여운 아이가 달아날 만 한 일이 뭐가 있어서? 그런 내 의문을 해결해 주려는 듯 저 멀리서 앨리스의 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며 한 소년이 등장했다.
“앨리스!”
앨리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멍청이로부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