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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파혼에 진심입니다 (147)화 (147/159)

외전 11화

숲속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작은 호수가 보였다. 그 옆에 놓여 있는 아기자기한 오두막 한 채. 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긴 했으나 잘 정돈된 모습이었다.

“조용하네요.”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적막함을 달래 주는 곳이었다. 어째서 일리온이 이곳을 찾아왔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일리온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집과 많이 닮아 있었다.

“여기서 주로 뭘 하셨어요?”

“딱히 뭔가 하지는 않았어. 그냥…….”

일리온은 울었다고 말하기 부끄러운지 말을 얼버무렸다.

잠시 주변 구경을 하는 사이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신기하게도 다람쥐는 도망가지 않고 일리온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아는 사이에요?”

“응?”

“아니, 아는 사이 같길래.”

다람쥐와 일리온을 번갈아 보며 농담을 던지자 일리온은 픽 웃었다.

“뭐,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

거짓말이 심하시네. 언제부터 그렇게 능청을 잘 떨게 됐냐고 물으려는데 일리온은 정말로 다람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람쥐는 일리온을 피하지 않고 그의 손 위에 올라탔다.

“디X니 공주세요?”

“뭐?”

일리온은 그게 뭐냐며 궁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왜, 있잖아. 디X니 공주라면 갖춰야 할 조건 같은 거. 사연 있는 과거라던가,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 아니면 뛰어난 노래 실력 말이야.

일단 두 개는 충족한 것 같은데, 노래도 잘하냐고 물어볼까?

사람을 따르는 다람쥐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자, 일리온은 내게 다가와 다람쥐 친구를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어, 어……!”

“왜?”

“다, 다람쥐를 만져 보는 건 처음이라.”

만져 본다고는 했지만, 그 말도 틀린 말이었다. 난 마치 구걸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굳어 있었으니까.

코끝을 움찔거리며 내 손을 이리저리 탐색하던 그 작은 생명체는 이번엔 팔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자, 잠깐만.”

마침내 내 어깨 위에 도착한 녀석은 코를 킁킁거리며 목 주변을 간질거렸다. 덕분에 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일리온을 바라보았다.

“친구분이 좀 예의가 없는 것 같은데, 제발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아쉽게도 난 디X니 공주 체질은 아닌지, 작고 귀여운 동물과는 영 상성이 좋지 못했다. 보송보송한 꼬리가 내 목과 볼을 이리저리 스치고 다닌 탓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아, 자, 잠깐만. 너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야!”

어쩐지 불안하다 싶더니, 다람쥐는 기어이 내 옷자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난 기겁을 하며 다람쥐를 빼내기 위해 파닥거렸다. 장담하건대 옆에서 보면 꽤나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거지.

한참을 발을 동동 구르며 팔을 내젓던 찰나, 뒷걸음치던 발이 바닥을 딛지 못하며 몸이 기울었다.

그런 날 즐겁게 보고 있던 일리온이 황급히 달려와 잡아 주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둘이 사이좋게 호숫가에 빠지고 말았다.

물이 깊지는 않았으나, 넘어진 모양새 때문에 온몸이 모두 젖어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우리의 작은 다람쥐 친구께서는 호숫가 풀밭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조롱하고 있었다.

“저거 우리 비웃고 있는 거 맞죠?”

어정쩡하게 일리온의 품에 안겨 묻자,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음을 터트렸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을 하고서.

곧이어 우리를 향해 세바스찬이 다급히 달려왔다.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옷이 좀 젖긴 했지만.”

일리온과 함께 물가로 걸어 나오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발자국을 남겼다. 좀 더 놀려고 했는데 그냥 돌아가야 할 듯했다.

“일단 오두막에 앉아 계세요. 제가 가서 갈아입을 옷과 수건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이 공작님이…….”

“그래. 우린 오두막에서 좀 쉬고 있겠네.”

순간 이동해서 데려다주면 될텐데, 왜?

구태여 세바스찬에게 수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는 일리온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셨어요?”

저만치 걸어가는 세바스찬의 뒷모습을 보며 일리온에게 물었다.

“뭐가?”

그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텔레포트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쓸데없는 일에 마법 쓰지 말라며?”

그는 내가 얼마 전에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며 반박했다.

그야,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그건 네가 불필요하게 마법을 남발해서 그런거고. 그리고 세바스찬을 시키는 것보다 돌아가는 편이 더 낫지 않나? 무엇보다 언제부터 그렇게 말을 잘 들었다고?

“쓸데없지 않은 것 같은데요?”

나도 모르게 톡 하고 튀어나오는 반발심에 한마디 더 하자 일리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쓸데없어.”

저 고집.

오두막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리온을 살짝 째려보자 그는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기껏 둘만 있을 수 있게 됐는데, 내가 왜?”

“…….”

새롭게 느끼는 사실이지만, 일리온은 종종 자신이 한 말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듯했다.

덕분에 오늘도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 * *

작은 오두막은 최근에 청소한 모양인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래도 워낙 작은 집이라,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벽난로가 전부인 곳이었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자 이내 따듯한 온기가 퍼져 나갔다.

“어디였어요?”

벽난로 옆에 쪼그려 앉으며 일리온에게 물었다.

“뭐가?”

“어린 도련님께서 혼자 훌쩍이던 장소 말이에요.”

일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번엔 무슨 장난을 치려고?”

“장난이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은 꽤나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삭막하고 건조했다. 깨끗하게 정돈된 이 방에 온기가 부족한 게 아닌데도.

“그냥 여기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요.”

공작저의 화려하고 따뜻한 저택보다, 이 좁고 쓸쓸한 방이 더 위로되었을 아이의 마음이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글쎄.”

내 말에 일리온은 나직이 대답하며 내 옆에 앉았다.

“아무도 날 찾지 못했으면 좋겠다. 이대로 사라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할아버지한테 들키기 전엔 돌아가야지……. 뭐 그런 생각.”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방 안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기보다는, 이곳 말고는 맘 놓고 울 곳이 없던 것이었다.

이 차가운 방 말고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담담하게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텼을까. 아마도 내가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아프고 괴로운 시간을 홀로 보냈겠지.

난 일리온의 손을 잡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면 좋을지 몰라서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울리려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일리온은 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조심스럽게 훔쳐 주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 알아.”

주책맞게 나오는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 있자, 일리온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넘칠 듯한 사랑을 받았고, 언제나 맘 놓고 울 수 있는 품이 있었다.

그 따뜻함을 잃어버린 상실감으로 오랜 시간 자신을 원망하며 살았지만,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것 역시 사랑받았던 기억과 사랑했던 추억임을 곧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일리온이었다. 사랑받은 기억도, 사랑했던 추억도 없던, 누구보다 사랑에 목말라 있던 사람.

“우리가 좀 더 빨리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그럼?”

“공작님을 데리고 저택에서 달아났을 거예요. 할아버지가 못 찾게요.”

내 말에 일리온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이러기예요? 정말이라니까요.”

“미안. 못 믿는 게 아니라 그냥 잠깐 상상을 해 봤어. 당신은 도망치는 데 재주가 없으니까.”

도망치는 데 재주가 없다니? 그냥 운이 조금 없었을 뿐이었다고!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분명 즐거웠겠지.”

일리온은 씁쓸하게 웃으며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뭐가?”

“그냥……, 그냥요.”

정확히 콕 집어 뭐가 미안한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난 그의 괴로운 어린 시절에 사과를 건네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찮아. 당신이 사과할 일도 아니고, 지금은 이렇게 행복하니까.”

일리온은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챈 것인지, 날 끌어안으며 오히려 울적한 날 위로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 취미가 뭔지는 결국 못 들었네요.”

일리온의 품에 안겨 코를 훌쩍이다 보니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음……, 궁금해?”

그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온은 뭔가 말해 주기 싫은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중얼거렸다.

“정원에서 새가 지저귀는 걸 보는 걸 좋아해.”

얘 진짜 디X니 공주 아니야? 그게 취미라고?

“정원에 새가 살아요? 무슨 새인데요?”

“그건 말 못 해.”

“네?”

“비밀이야.”

우리 공주님은 정말 이상한 데서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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